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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회를 통해 은혜 많이 받으셨습니까? 저는 부흥회와 반딧불 세미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천국(하나님 나라)이 어떤 곳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반딧불 모임에서 새벽 4시까지 토론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대한 그림자로서 교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있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이 땅의 현장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특권이자 책임입니다.

본문은 베다니라고 하는 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교회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유월절 엿새 전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와 함께 그의 동생(마르다 & 마리아)들이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배설한 자리였습니다. 이 가정, 이 잔치에 교회가 갖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곳입니다.

첫 번째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곳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1절).” 베다니는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린 곳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건이 바로 복음이고, 그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바로 이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의 모형으로서의 교회를 누리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가 약해져가는 것은 무엇인가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찾아가는 교회는 생명의 역사를 갖게 됩니다.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렇게 살아나야 합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낙담과 절망 가운데 빠졌습니다. 바로 앞장 11장에서 그들의 절망이 얼마나
었었는지 보여줍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예수님과 함께 앉아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주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주님의 능력이며, 주님을 모신 교회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단지 육체적인 생명의 살아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남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주인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생명만 살리시는 분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도 살리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교회 가운데 계시면 교회 안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전에 없던 생기와 활기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생명을 일으킵니다. 교회는 주님이 주인되심으로 그분이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며, 굽어진 길을 곧게 하십니다. 절망과 좌절에 빠졌던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새 힘을 얻고 소망을 얻고 삶의 능력을 회복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통해 그런 일들을 의도하시고 일하십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생명이 사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그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2. 교회는 기쁨이 가득한 곳입니다.

베다니에서 잔치가 열렸다. 이 잔치는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께 대한 감사로 마르다와 마리아가 배설한 자리였습니다. 나사로도 그 자리에 있었다. 마르다는 잔치를 준비하고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기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곳은 자연히 기쁨이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이 살아나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살아났는데,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은 내 오라비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산 것입니다.

죽은 오라비의 무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지난 며칠을 그들을 기억합니다. 그 시간은 지나온 세월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며칠은 정말 절망과 죽음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사로가 살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기뻤습니다.

마리아는 이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간직해 왔던 지극히 비싼 향유 곧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러자 향유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습니다. 향유는 본래 기쁨의 상징입니다. 기쁨은 표현되게 되어 있습니다. 기쁨은 전염되게 됩니다.

교회에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쁨은 주님께서 교회 가운데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심으로 인해 오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오락이나 세상의 흥미로운 일들을 통해 얻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 기쁨은 생명을 얻었을 때 누리는 기쁨입니다. 한 가정에 새 생명이 태어났을 때 느끼는 그런 기쁨이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을 때 얻는 기쁨입니다.

여기에 이 집에 가득한 기쁨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겸손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기쁨입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자기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겸손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기쁨은 겸손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기쁘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겸손하지 못한 것은 자기 마음에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기쁨의 특징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자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기의 머리를 푸는 것은 윤리적 해이함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대중들의 반응을 계산하기 위해 자신이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마음에 있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부흥회가 있었고, 일주일도 안되어 대학부 수련회가 오늘까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섬기셨습니다. 감사했습니다. 한 분께 수고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무 좋잖아요. 정말 교회 같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섬기고도 더 기쁜 것입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바로 그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교회 안에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쁨은 진정한 감사와 겸손, 섬김을 통해 일어납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3. 교회는 항상 세속적인 사고에 도전을 받는다(4-6절).

교회는 사람을 살리고, 기쁨만 있는 곳은 아닙니다. 이런 은혜, 이런 능력을 누리기까지 교회는 계속해서 세상으로부터 도전을 받습니다.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향유 부음에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말은 노동자의 1년 품삯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NIV성경에는 아예 ‘일년 치 품삯’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적지 않은 금액의 향유 부음에 대해 가룟 유다가 시비를 건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이면서 또한 예수를 배신하여 팔아버린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오늘날 교회가 어떤 도전을 받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타이틀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교회를 향해 도전합니다. 그들은 제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예수님의 재정을 담당한 사람의 위치를 가지고 향유로 가득한 기쁨의 잔치 자리, 곧 교회의 참된 기쁨의 공동체에 도전하고, 역행합니다. 주님의 은혜, 생명의 역사로 인해 오는 기쁨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본문의 기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같이 나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한 사람을 ‘어떤 사람들’이라고 묘사했고,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분개’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동일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위를 가장 표면적으로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만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들도 가룟 유다의 말에 동조했습니다. 그들도 어쩌면 한 마디씩 거들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주도적으로 그런 말을 했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가룟 유다의 말이 옳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제자들도 암묵적으로 동의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합니다. 가룟 유다는 이 일을 하고는 그대로, 그가 생각하는대로 그렇게 행했습니다. 그리고 은 삼십(마26:15)을 받고 예수를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자들도 유다와 동일한 가치관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가룟 유다는 물질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버리고는 자기도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운명입니다. 그의 생각이 무엇이냐가 결국 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에 의해 자기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이 곧 자기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세속적인 가치관에 영향을 받습니다. 불신자만, 혹은 예수를 배반한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끊임없이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주님의 명령을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렇게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하지만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항상 세속적인 사고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합니다. 우리가 유다처럼 돈 꿰에 있는 돈을 훔쳐 가지는 않더라도, 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감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가 누리고 경험한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복음으로 인한 기쁨이 없으면 여러 가지 논리들이 나타납니다. 나름대로 다 논리적입니다. 값비싼 향유를 한 순간 예수님의 발에 부어버리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 가난한 자를 돕는 것보다 더 옳은 일이라고 규정을 만들어 놓는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가룟 유다와 제자들, 그리고 이 일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마리아가 누리는 감격, 기쁨, 감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죄로 타락한 인간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긍휼입니다. 마리아는 그 사랑의 깊이를 알았습니다. 그 은혜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으로 다시 주님께 반응했습니다. 그런 허비하는 사랑이 마리아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향유를 붓는 사건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안에 마리아가 누렸던 놀라운, 비밀스러운, 감격스러운 기쁨과 감격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 기쁨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속적인 사고의 도전을 이겨야 합니다. 이런 감격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4.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 구원의 역사 위에 세워졌다.

가룟 유다의 시비에 주님께서 나서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7절).” 주님께서 가룟 유다의 야단을 중단시키십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편에 서십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향유는 잔치를 위한 용도로 쓰였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표시였습니다. 확실히 기름은 잔치와 기쁨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도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배설하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식할 때 경건의 표시로 기름을 바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너의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말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상 쓰고 금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름을 바름으로 금식 중에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름을 분명 기쁨의 표시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향유를 당신의 십자가와 연관시킵니다.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재해석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위에 서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것을 고백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우선하는 일입니다.


결론 및 적용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곳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주님의 은혜로 지금도 여전히 사람을 살리는 곳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생명의 역사, 생명의 기운이 교회 안에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교회는 또한 잔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자기 오라비 나사로가 산 것을 기뻐하며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인 것처럼, 오늘날 교회는 주님의 구속의 역사를 기뻐하며 잔치하는 곳이어야 한다. 매주일 예배는 잔치요 축제다. 그런 기쁨이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교회는 세상과 차별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자기의 잣대로 교회를 재단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가룟 유다의 말에 동조합니다. 제자들조차 유다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의 마음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깊은 감사와 넘치는 기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기쁨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교회가 이런 기쁨으로, 이런 감사로 향유 냄새가 진동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남 모르는 감사, 잔치집 같은 기쁨이 넘치는 그런 곳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는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을 이해할 때만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 생명의 역사를 경험하십시오. 주님의 그 사랑을 누리십시다. 주님의 그 기쁨을 즐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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