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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었습니다. 2007년 한 해도 주님과 동행하시는 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올해는 Quiet Time을 함께 하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것은 목사 혼자만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도님들과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맛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은혜가 있을 것을 믿습니다. 가능하시다면 주보 뒷면에 나오는 매일 주어진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가능하신 분은 우리교회 사이트에 들어가면 ‘생명의 삶’ QT 사이트를 바로 접속할 수 있도록 해놨습니다. 더 권하고 싶은 것은 ‘생명의 삶’ 책자를 구입하셔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늘 손에 들고 시간이 날 때마다 묵상함으로써 훨씬 더 큰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에는 지난 한 주간 본 본문 중에 하나를 택해서 함께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3장 1-10절입니다. 본문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말씀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누가복음 1장 39절 말씀은 그의 집은 산 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장 80절을 보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상당히 어렸을 때부터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말씀을 전파했다고 기록합니다. 3절에 보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광야는 그의 생활터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말씀을 전파합니다. 광야란 말씀을 전하기에 그리 좋은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곳에서 살았고, 또 그곳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던 시대, 그래서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던 유대인들이 몰려나왔습니다. 세례 요한의 책망을 들으며 세례를 받습니다. 야단을 맞으면서도 좋은 것입니다. 의에 굶주렸습니다. 누군가가 영적으로 자신들을 야단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른 소리 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비리와 부정과 그릇됨에 대해 강하게 도전하고 책망하는 선지자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나서서 야단을 친다면 오히려 그들의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외치는 소리에 유대인들을 귀를 기울입니다. 그들 중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있었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세례요한의 영적 힘은 바로 광야에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광야에서 거하면서 하나님과 영적으로 깊은 교제를 나누고 훈련한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은 엄청난 능력으로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광야란 무엇입니까? 광야는 넓은 들판을 의미합니다. 나무도 없고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는 외로운 곳입니다. 인생으로 말하면 광야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곳입니다. 함께 짐을 나눠질만한 동료가 없는 길입니다. 함께 아픔을 나눌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매우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며 절망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광야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곳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곳입니다. 그곳은 훈련의 장소입니다. 광야는 묵상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놀랍게도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이 광야의 시기를 거쳐 갔습니다. 모세를 보면 우리는 매우 실감나게 그의 삶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는 나이 40세가 될 때까지 애굽의 왕궁에서 애굽의 왕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40세가 되었을 때 그는 광야로 나갔습니다. 왕자의 자리를 내어놓고 자기 민족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광야로 나갑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과거의 꿈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가 사는 것은 그저 평번한 한 촌부로 살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이방 제사장이었던 이드로를 만나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했습니다. 애굽에서의 영광스러웠던 생각을 하면 때때로 자신의 삶이 한탄스러웠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이미 모든 상황은 끝나 버렸습니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는 애굽 왕 바로의 손에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뒤돌아볼 작은 여지조차 잃어버렸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 민족을 생각합니다. 자기 민족은 지금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수 백 년을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타까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구원하려도 자기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떤 도전도 의미 없게 되었습니다. 나이는 점점 더 들어갑니다. 육체의 힘은 더 쇠약해져 갑니다. 눈도 흐려집니다. 그가 하는 일은 미디안 제사장이며 자신의 장인인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는 일입니다. 자기 재산도 없었습니다. 처가살이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그의 꿈이 물거품이 되자 반대로 그는 극도의 절망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본래 애굽의 학문을 배웠고, 지도자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그는 네 번에 걸쳐 하나님의 명령에 거절하면서 자신의 절망감을 드러내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생활이겠습니까?지난날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지난 고통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심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40년이 지난 후 그의 나이 80세에 그에게 놀라운 변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절망의 자리로 내려갔습니다. 삶은 지극히 초라한 상태입니다.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나이 이미 80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호렙 산 정상에서 장인의 양 무리를 치고 있는데, 한 곳에 떨기나무가 불타고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떨기나무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를 합니다.

그가 애굽의 왕궁에 있으면서 호화스럽게 살고 있을 때, 그래서 그 나름대로 자기 민족을 구하겠다는 의지로 불탔을 때, 그는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에 대해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 자기 민족을 구하겠다는 의지로 불탔습니다. 그리고 시도했습니다. 자기 민족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한 명 죽였습니다. 조용히 퍼져 나가는 이 소식들은 다른 히브리 민족들의 마음을 모으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히브리인들끼리 싸움이 붙었습니다. 모세가 그 싸움을 말리러 갔을 때 그들 중 한 동족이 모세를 오히려 대적했습니다. ‘어제는 네가 애굽인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느냐?’라고 대적했습니다. 그 말에 모세는 더 이상 애굽이 있지 못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의 꿈은 한 순간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광야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40년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실입니다. 광야에서의 40년의 세월동안 그는 전에 누렸던 애굽 왕궁의 영광에 대한 기억들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 민족을 위해 갖는 애굽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분노와 회한의 감정으로부터 자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니 그의 눈에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되었고, 그의 귀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한 것입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의 삼촌 집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13년동안 종살이와 죄수로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을 살면서 하나님을 다시 고백하고 경험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광야는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광야는 권력과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단절된 곳이었습니다. 광야는 인간적인 욕구를 채울 수 없도록 갇혀진 곳이지만, 그러기에 광야는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영적 충만과 능력을 얻는 곳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세 가지를 경험했습니다. 첫 번째,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한 없이 초라하고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함과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자신에게 주심도 발견했습니다. 그 분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분은 우리를 처음 만드셨을 때의 창조적 능력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담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능히 감당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시간이 없고,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도는 오히려 우리의 시간을 절약하게 해 주고,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지혜를 갖게 해 줍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일하십시오. 열심히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십시오. 사실 나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매일 아침 제일 첫 세 시간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광야의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광야로 나가는 것입니다. 광야로 나가서 자신과 하나님과만 조용히 만날 시간을 찾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요한은 광야에서 자신을 만났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살면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 말은 곧 모든 일들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신의 의지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모세의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모세가 그의 의지를 일할 때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자신을 보지 말고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이 광야에서 자신을 본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나는 그의 신을 드는 종도 될 자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일하신 것입니다.

지난 주간 리버티 신학교에 가서 일주일 간 수업을 듣고 왔습니다. ‘건강한 교회 리더십’이라는 주제였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클래스에 한국 목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담임목회 경험도 3년 정도 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교수가 강의를 하면 중간 중간 ‘한인목회는 상황이 달라서 그대로 적용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참 좋은 목사님이셨는데, 상황적인 한계에서 눈을 떠지 못하시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일주일간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문제를 만납니다. 그런 문제들은 우리의 앞길을 막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에서 방해하는 사람들만 없으면 일이 잘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럴 때만다 상황보다는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애굽 왕자의 신분을 이용해서 자기 민족을 구원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자기 동족의 고발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동족이 모세의 의도를 약점을 잡았습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있어서 민족의 구원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모세는 그를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약점을 잡은 히브리인은 모세에게 있어서 분명 매우 장애물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보지 않으셨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맡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모세가 준비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먼저 필요했습니다. 애굽 왕자의 혈기와 용기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모세에게 있었던 것이지, 모세를 대적한 히브리인에게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사실 짧은 목회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동일한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저에게는 실패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종이에 적으면 몇 페이지가 될지도 모릅니다. 당회에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겠다고 결정해 놓고 하지 못한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마음에 품은 계획과 방향들이 그대로 되지 않은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일들을 포기하고 실패했다고 느낄 때는 결코 후퇴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새신자를 섬기는 일이나, 대학부의 일들, 구역에 대한 일들, 수 없이 많은 일들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더 선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내가 스스로 일을 포기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였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내가 포기할 때 하나님은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광야의 삶, 그것은 기도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입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능력 많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께서 상황에 대한 변화보다 먼저 우리 자신을 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먼저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너무 매여 있지 말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편안하게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님들에게도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요한은 광야에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세례 요한 당시 유대 사회는 결코 깨끗하거나 맑은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타락과 암투가 성행했습니다. 주로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제사장 계층들조차도 로마의 권력에 붙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습니다. 철저한 믿음으로 산다고 하던 바리새인들도 결국 속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영적 교만으로 철저히 뭉쳐서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였습니다. 자신들만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당시 영적으로 가장 타락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무지막지하게 책망을 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신기하게도 당시 종교적 자존심이 가장 강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세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욕을 먹으면서도 그들이 영적 갈증을 가지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또 한 사람의 회개해야 할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들은 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증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역시 나의 동역자들이어야 할 사람들이었고, 믿음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야 할 사람이었고, 섬겨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세례 요한에게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을 만난 후 그들의 영혼이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감췬 위선과 악함을 강하게 책망하고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 안에 있는 영적 고통이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영혼의 방황과 갈등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광야에서 주님을 만난 요한에게 하나님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놀라운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능력이 바로 ‘소리’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여기서 말하는 소리는 그냥 소리입니다. 즉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 소리입니다. 모세가 40세에 의욕과 투지를 가지고 자기 민족을 구하겠다고 나서던 때의 소리가 아닙니다. 분노와 아픔을 그대로 드러내는 소리도 아닙니다. 이 소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자신을 발견하고, 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소리입니다.

목사가 마음에 분노를 품고 설교하면 성도가 설사한다고 합니다. 목사의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설교하면 성도의 마음에 근심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이 불편이 생겼다고 무조건 목사 책임은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에게 광야가 필요합니다. 조용히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목사는 목회를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외롭고 고독할 때 그 고독과 외로움이 분노로 터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깊은 영적 경험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 상처가 있는 사람의 말은 가시와 같습니다. 그래서 함께 대화를 하면 그 가치에 찔립니다. 그런데 그 가시에 찔리면서 그 안에 있는 아픔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분노 안에는 독이 있습니다. 분노를 품고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독을 마시는 것과 같이 됩니다. 그 분노로 인한 독은 다시 나에게 옵니다. 그러면 그와 나는 회복하기 힘든 삶의 상처와 아픔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분노와 독을 해독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투명해져야 합니다. 무채색이어야 합니다. 독이 아무리 많이 들어와도 이 안에서 다 용해되고 해독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어떤 그림을 그리시더라도 주님이 의도하신대로 그리실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께 온전히 맡기면 주님은 우리교회에, 우리 가정에 멋진 그림을 그리실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그렇게 되어 가고 있음을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하지만 언제 사단이 기습을 해서 먹물을 튀기고 갈지 모릅니다. 그래서 또한 긴장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광야로 들어가는 일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광야는 정말 필요합니다. 광야는 주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기도로 만나고 말씀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경제적 위기의 광야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인간관계의 위기에서, 고독과 외로움의 광야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세례 요한 앞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나와 무릎을 꿇는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의 광야로 들어갑시다. 그러면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옳곧게 설 것입니다. 광야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 같지만, 그곳은 주님을 만나고, 자신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을 올바르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정말 놀라운 곳입니다. 한 주간, 아니 일평생 광야를 가까이 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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