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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절이 있지 않았다면,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얼만큼이나 알 수 있었을까요? 인간은 아마도 항상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이해로 잘못된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본문 중에 하나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 말씀은 메시야가 오심으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사람들은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니 친히 하나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순히 어떤 정보를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안다고 하는 것은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그분을 인격적으로, 경험적으로 그리고 관계 안에서 안다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10:46-52에 보면, 바디매오라는 시각 장애인이면서 거지가 나옵니다. 거지라는 것은 그에게 필요한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소리를 질러서 예수님을 부릅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자 더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소리를 들으시고 와서 무엇을 주기를 원하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는 지팡이나 안내견 혹은 선글라스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이 말을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시각 장애인이 어떻게 그런 요청을 드릴 수 있었을까요? 이런 기도는 사실 쉽지 않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렀을 땐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그러니 소망을 갖긴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자 마자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르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이 때 마르다가 다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주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것을 제가 압니다.”

마르다는 죽은 자를 살리는 점에 있어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르다가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빠가 살아나는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면 당연히 그것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함에도 불구하고 요청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믿음의 한계가 원함의 한계를 규정지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각 장애인의 간구는 위대한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간구는 놀라운 기도입니다. 이 간구는 “주님 당신은 나를 눈 뜨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는 뜻입니다. 자기 확신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확신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도가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안다’고 하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정보 수집 차원에서의 앎이 아니라, 체험적이며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앎입니다.



메시야는 어떤 분이신가?

그러면 성탄절에 우리가 그분의 오심을 기념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본문은 심판자 되시는 메시야의 지혜에 대해 말씀하고(2절), 이어서 심판의 기준(3-5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판의 결과(6-9절)에 대해 말씀합니다.

심판자이신 주님
오늘은 본문의 흐름상 두 번째 모습, 심판자로서의 모습만 살펴보겠습니다. 심판은 우리에게 늘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재판장(court)에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 곳에는 가능한 가지 않는 것이 좋고, 평생 가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일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을 싫어합니다. 운전하고 가다가 경찰차만 보면 움츠러 들면서 긴장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말씀합니다. 성경은 수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말씀합니다. 요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마태복음 25장의 세 가지 비유, 즉 열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는 모두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메시야에 대해 3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은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메시야가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의 심판 기준입니다. 그분은 보이는 대로 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시고, 정직으로 겸손한 자를 판단하십니다. 심판자이신 메시야이십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메시야는 우리를 위해 심판자가 되어 주십니다.

오래 전에 가까운 분이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호등을 건너오던 어르신이 지나가던 승용차에 부딪치셨고, 바로 앞에 있는 카센타 주인은 그것을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기꺼이 증언을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후 말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을 정확하게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이 바뀔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거짓말을 할까요? 거짓이 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먹힐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왜 그렇게 불의가 판을 칩니까? 불의가 통용되기 때문입니다. 불의로 남의 것을 빼앗아도 누가 뭐라 하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문을 말씀을 보십시오.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4절).

본문 4절을 다시 보십시오.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4절). 이 말은 공의로 가난한 자에게 심판자가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 약한 자의 판단자가 되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힘이 없어 하루 밤에 뒤집어 지는 판결을 보면서 어디서 어떻게 뒤바뀌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억울한 상황을 당할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약한 자로 세상에 살아가지만, 우리 주님은 이 땅에 메시야로 오셔서 친히 우리의 심판자로 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둘째 메시야는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심판자이십니다. 우리를 항상 피해자처럼 말씀을 드렸지만,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더러움이 있고, 속임이 있고, 거짓이 있습니다. 나쁜 마음,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들지 않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교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많은 죄목들을 보면 거기에서 빠져나갈 사람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항상 들어야 합니다.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심판합니다. 매번 우리의 양심을 통해, 상황을 통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에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귀를 닫습니다. 설교를 하다보면 확실히 이런 설교는 부담스러워합니다. 귀를 닫습니다. 심판과 책망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이 심판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이슬비에 옷이 젖듯이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마음이 젖고, 생각이 젖고, 삶의 방향이 젖어야 합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해도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가난할수록, 고난이 올수록, 주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을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 우리를 주님의 심판대 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를 더욱 정결하게 주님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결국 승리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피를 묻혔다고 나도 함께 피를 손에 묻히면 그 죄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메시야는 심판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 정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판의 결과

이제 6절 이하에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 줍니다. 그것은 심판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이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 보셨습니까? 공격적인 적대자들과 힘없는 동물들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신학자들은 인간 본성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 나라에 가면 드라마틱하게 인간의 본성이 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공격적인 짐승과 힘없는 동물들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격적이고 잔인한 성품이 영원히 변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의 변화를 기대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순한 양처럼 사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다 주셨습니다. 어린 아이로 오셨습니다. 진리를 가르치시고, 제자들의 헛점과 약점들을 다 덮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저들이 배반할 것을 아셨고, 갸룟 유다의 배반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조용히 경고하셨습니다.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변화될 것을 알고 기대하면 이 땅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결국 앎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에 가서 누릴 영광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그 나라에서 살아갈 모습이 어떤 것인지 느껴지십니까? 이 모습 이 대로 천국에 가면 살 수 있겠습니까? 그곳에 가도 여전히 보기 싫은 사람이 있고, 계속적인 갈등과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곳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야 그냥 안 보면 되겠지만, 그곳에서는 그게 안 될 것 아닙니까? 어디에 있어도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고, 찾을 수 있고, 대면해야 합니다.


결론
다시 원점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부터 옵니다. 여호와를 알면 그런 기대가 생깁니다.

시각 장애인이 지팡이나 안내견을 구하지 않고 눈 뜨기를 간구한 것은 그가 주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무에게나 그런 소원을 드렸겠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눈을 뜨게 해 달라는 요청은 아무에게나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우리도 역시 그렇게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소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소원이 없는 것은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을 축하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의 더 깊은 의미는 그 분이 우리에게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신 사건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을 알 때, 그분의 사랑을 알고, 그분의 지혜를 알고, 그분의 심판주 되심을 알 때 우리는 그분 안에서 더욱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시각 장애인이 눈을 뜨는 것처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처럼, 그 분 안에서 풍성하고 놀라운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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