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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밖의 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까지 가는 과정을 묵상하는 것은 참 신기합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까지 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도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20세 이상 되어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만나만 먹는다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예측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고, 자기 나라라고 할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땅의 경계도 없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40년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써, 그들의 역사적 배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과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히브리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는 위생의 문제였습니다. 정결의 문제였습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거룩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때 거룩은 내적인 거룩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거룩은 내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또한 외적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정결 예식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진 경우는 어떻게 하고, 여성에게 유출이 있었을 경우는 어떻게 하고, 문둥병이라고 하는 피부병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하고 등등 이런 규례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규례들을 잘 드려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살리시기 위해 얼마나 세심한 배려를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의 그런 정결 규레와 관련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들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문 밖”이라는 말과 또 하나는 “성문 밖”이라는 말입니다. ‘영문 밖’은 광야에 있을 때의 진영, 즉 camp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문 밖’은 예루살렘 성읍을 의미합니다. 둘 다 본질적인 면에서 같은 의미입니다.

레위기 16장 27-28절을 보면, 속죄제로 수송아지와 염소를 드릴 때는 그 짐승들의 피는 성소에 들여다가 속죄하고, 그 짐승들의 가죽과 고기와 배설물은 밖으로 내다가 불사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난 후 그것을 불사른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물로 그의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들어오도록 명령했습니다.

또한 레위기 13장 46절에는 나병(문둥병) 환자들은 병이 나을 때까지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이 때의 나병은 지금과는 조금 달라서 대부분의 피부병을 포함했습니다. 그래서 낫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다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레위기 24장 16절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들은 끌어다가 진영 밖에서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신명기 23장 9-14절에는 화장실도 진영 밖에 설치해 놓고 밖으로 나가서 일을 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진영 안에는 항상 정결하게 유지되도록 했습니다. 육체적인 면에서만의 정결함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정결함과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주 엄격한 율법(규칙)을 통해서  광야의 40년을 안전하게 보내고 광야까지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진영 바깥은 아주 불결한 장소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영 바깥은 나병 환자들이 배회하는 곳이었고, 죄인을 처형하는 장소이었고, 불결한 배설물을 묻는 곳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11-12절 말씀을 읽습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1절을 방금 설명한 내용입니다.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서 뿌리고, 그 육체, 즉 짐승의 고기와 가죽과 배설물, 내장과 같은 것들은 영문 밖으로 가지고 나가 서 불사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은 그런 구약적인 배경 하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그러므로’,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성문 밖은 예루살렘 밖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밖에서, 사람들을 처형하는 골고다(해골)라고 불리는 언덕에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즉 그곳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는 예수님의 이 십자가를 “그의 치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영문 밖은 문둥병자(나병환자)들이 머무는 곳이었고, 저주 받은 자가 죽임을 당하는 곳이었습니다. 제물을 제사 지내고도 가장 더러운 부분을 내다 태워버리는 곳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육체적 고통 못지 않게 정신적, 영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히브리서는 ‘영문 밖으로 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알면 알수록 십자가 사건을 충격적으로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영광스러운, 영웅적인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문 밖으로 쫓겨 나가서 문둥병자처럼 취급 당하셨고, 마땅히 사형을 받을 자로 여겨지신 것입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모든 상황들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낱낱이 실감나게 완전한 죄수의 사형집행이었습니다.


영문 밖의 길로 나가야 할 이유

그런데 이런 상황을 본문은 완전히 다시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새롭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9절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느니라.” 여기 마음은 은혜로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음식은 ‘ceremonial foods’, 즉 정결예식에 사용하는 음식을 말합니다. 이 음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 시대에 지키던 음식규례를 말합니다.

이 음식은 그들이 영문 안에서 지키던 규례들이었습니다. 영문 안을 정결하게 유지시켜 주는 규례들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들과, 그들이 스스로 만든 수많은 규례들이 합쳐져서 지켜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들은 광야라는 죽음의 장소에서 그들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런 규례들은 단지 육적인 의미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영적인 의미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규례를 지키면서 그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상황은 뒤바뀌어졌습니다. 그들의 규례는 더 이상 그들을 거룩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광야의 영문(camp)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예루살렘으로 그 의미가 대치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역사 속에서 가장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난 종교인들로 가득찬 우상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루살렘의 주도적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영문 안에, 예루살렘이라는 성문 안에 거하는 것이 그들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담보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제사 의식은 타락했고, 그들의 중심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버렸습니다. 여전히 정결예식은 행해지고 있었지만, 영적인 거룩함은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문 안에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문 밖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히브리인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그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도전을 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10-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우리에게 있는 제단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제단이 아닙니다. 이 제단은 십자가에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장막에서 섬기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누릴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지만,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성문 밖에서 십자가 위에서 불사라짐으로 제물로 드려지셨기 때문에 성문 안에 거하는 제사장들은 성전 밖에서 진행되는 그 제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제사의식과 구약의 제사전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의 맥락에서 12-13절을 통해 우리에게 다음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고난의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 성도들이 본문 말씀을 볼 때 그들은 주님의 고난을 더욱 실감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영문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영문 밖에서 문둥병자들이 걸어다니고, 사형 집행장소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알았었습니다. 해골이라는 뜻의 골고다 언덕을 생각할 때마다 소름이 끼칠만큼 무시무시한 곳으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영문 밖에서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 가장 더럽고 비참하고 저주 받은 자들의 장소인 영문 밖에서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삶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영문 밖을 배회하는 문둥병자의 손을 잡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죄수로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를 향해 “오늘 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불결한 배설물, 죄와 악한 생각, 더러운 죄들을 덮으셨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주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지치고 힘든 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그분의 사랑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그분의 사랑을 충분히 알고 느끼고 그 안에 잠겨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역사적으로 알아야 하고, 인격적으로 알아야 하고, 삶 속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 앞에서 참된 은혜와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을 알아갈 때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포로가 됩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주고, 우리에게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성경은 온통 그분의 사랑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은혜가 내 안에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철저히 그분의 은혜와 사랑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9절에서도 말씀하기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안에 가득할 때까지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이런 은혜가 우리 마음에 강 같이 흐를 때까지 주님을 묵상하십시오. 이런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힘써 달려갈 수 있게 할 때까지 그분을 바라보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가 서 있는 자리, 아니 우리보다 더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그 주님을 만남으로 참으로 큰 은혜를 누리고, 믿음의 승리를 맛보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그의 치욕(능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고 권면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능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에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12절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신 한 없는 그분의 사랑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13절 말씀은 우리에게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보통 은혜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를 그냥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데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은혜란 무엇이든 저절로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은혜가 충만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은혜가 충만한 상태를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는 상태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마치 로보트에 프로그램을 입력해 놓고 감정적인 기복도 경험하지 않고, 의지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연상합니다.

하지만 은혜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은혜란 ‘거져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거져 받은 하나님의 사랑, 거져 받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근거해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져 받았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거져 받은 은혜는 우리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합니다. 거져 생명을 받았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은혜를 받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그 은혜 앞에 가만히 있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에서 보면,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다짐합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것이 거져 받은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품꾼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들이 품꾼처럼 산다는 것은 그가 진짜 자기 일처럼 여기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작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내가 이제부터는 품꾼처럼 일하리라고 결심하고 갔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서 밤 늦게까지 열심히 아버지를 위해서 일합니다. 과연 아들이 일을 하고 싶을 때만 하겠습니까? 컨디션이 좋을 때만 일하겠습니까? 아니면 기분이 좋을 때만 일하겠습니까? 아버지의 은혜를 알게 된 아들이 아버지의 은혜로 산다고 하는데, 그 은혜로 산다는 말이 곧 자기가 하고 싶을 때만 하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하고 싶을 때만 하는 것은 대가를 받고 하는 사람들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은혜로 일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은 받은 삯보다 더 많이 일한다고 생각되는 순간 일하기를 멈추거나 게을리합니다. 하지만 은혜로 섬기는 사람은 그렇게 멈추지 않습니다. 은혜로 섬기는 사람은 훨씬 더 큰 에너지와 열정을 가지고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렇게 일할 수 있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다 보면 당연히 세상에서의 삶도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보장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번영 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바르게 알고 살면 당연히 세상의 번영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번영을 보고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일하고, 섬기게 합니다. 그 은혜가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은 세상과 정말 다른 가치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성경은 히브리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능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도 그의 고난의 자리로 나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를 위해 영문 밖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주님처럼, 우리도 그 주님께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은혜의 주님을 위해 살자는 것입니다. 그분의 고난이 참여하자고 말씀합니다. 마치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하듯이 그렇게 우리도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약하게 하는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를 약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환경도 아니고, 마음의 상처도 아니고, 일이 잘 안풀리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를 약하게 하는 것은 은혜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저절로 되는게 은혜라는 오해입니다. 참된 은혜는 우리의 의지를 강하게 하고,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게 합니다. 은혜는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게 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고 달려가게 합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이미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유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주님을 좇아가는 성도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그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27절에서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시는 이를 바라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결론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받아 누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충분히 적실 때까지 그분 앞에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엎드리십시다. 그분의 은혜가 내 마음에 강 같이 흐를 때까지 그분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은혜가 나를 움직이고, 그분의 은혜가 나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십시다. 그분의 은혜가 나를 작은 아들처럼 섬기는 마음과 자세를 갖도록 그분 앞에 나아갑시다. 상 주시는 이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영광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며 고된 인생에서 기쁨과 감사로 승리하는 인생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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