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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고, 레위 지파의 반차를 따라서 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높은 멜기세덱 - 그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 정도로 높은 분이었습니다 - 의 반차를 따라 제사장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의 신비를 다 알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런 분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계셨다고 요한복음은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히브리 성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나시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항상 우리의 지혜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해도 주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 즉 다윗과 다니엘, 사사들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 말씀의 주제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고난 중에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할 때 히브리 기자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제사장이 되신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구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첫째 믿음은 자기 기질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성품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20-21절 말씀입니다.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사람 믿음이 있다’, ‘그 사람은 믿음이 좋다’ 혹은 ‘나는 믿음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의미를 대개 어떤 신조를 지키기 위해 용기와 담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상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보고 목숨을 내려놓는 일조차 기꺼이 감수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내가 믿는 바 신조나 신념을 지키는 용기나 담력이 아닙니다. 믿음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과 같은 그분의 인격(속성)을 믿는 것입니다.

20-21절에 네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맹세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 당신의 의지적 결단을 가지고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과 결단을 결코 변개치 않으실 것이라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그렇게 신뢰할만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말씀을 하셨고, 히브리서에서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신대로 그분은 반드시 그것을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그리고 맹세까지 하시면서 당신의 말씀 하나하나, 일점일획도 변치 않고 모두 성취하실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통 ‘그 사람은 믿음이 있다’ 혹은 ‘그 사람은 믿음이 좋다’고 할 때의 믿음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저는 어릴 때 개인적으로 강한 믿음을 갖기 위해 성품상 담력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흔히 속된 표현을 사용한다면 ‘대가 쎄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주를 위해 살려면 남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어떤 고난도 능히 이길 수 있는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질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질 대 우리는 늘 자신에 대해 실망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깡패도 크게 한 사람이 주를 위해서도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천성적인 기질을 타고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도 교회에서 비슷한 말을 합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천성적인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기질적으로 좋은 성품을 타고 나야 주를 위해서도 일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기질적으로 예수를 잘 믿고 주를 위해 자기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약하고 두려움이 많아서 소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는 그릇이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치명적으로 큰 오해를 가져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처음부터 기질적으로 하나님을 잘 믿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점과 예수를 믿음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고, 그로 인해 새 사람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산다는 것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며, 허무한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의 내적 성품으로부터 나오는 끈기나 담력 혹은 용기가 아닙니다. 믿음은 인간의 성품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 신뢰이며, 확신입니다. 비록 기질적으로 소심하거나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을 때 즉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친히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하신 말씀을 절대로 변개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믿으면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위해 주신 것이며 나에게 주시는 틀림없는 약속이며 반드시 지켜질 것을 믿게 되면 누구든지 담대함을 갖게 되고, 어떤 일도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음이 두려워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두 번이나 속여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25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자기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받쳤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11:19). 자기 아들을 죽이는 일이 어떻게 담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담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어떤 기질이나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시는데,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반드시 지켜주신다고 하시는데, 내가 염려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인들에게 비록 심한 박해와 고난이 다가오고 있지만, 문제는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박해를 견딜 수 있는 끈기와 인내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반드시 맹세하신대로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는 우리로 하여금 외적인 박해와 고난을 이기게 하고, 또한 개인의 기질적인 약점과 한계도 넘어서게 합니다.



2.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히브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 속에 나온 수많은 약속들이 과연 오늘을 사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불과 한 세대, 혹은 두 세대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틴에서 사역하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가 있었음도 기억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삶 속에는 그렇게 화려한 사역의 능력은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문제는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약속들과 말씀들이 오늘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시대에 선포된 말씀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이 오늘 이 순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단지 믿음의 원리만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화석화하는 일입니다. 하나의 굳어진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화석화되면 그 말씀이 나에게 하나의 원리로서 와 닿을 수는 있어도 생명의 말씀으로, 즉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직접 주시는 말씀으로 듣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2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5절 하반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 계셔서 제사장으로서의 중보 사역을 계속 하신다는 것입니다.

23-24절을 구약 시대의 수 많은 제사장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합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은 매우 많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제사장 사역을 감당하다가 수명이 되면 죽었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그 뒤를 이을 제사장이 항상 필요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의 중보 사역은 불완전했고, 또 그들의 인간적 죄성과 한계 때문에 온전한 속죄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살아 계셔서 본문 25절 말씀의 표현대로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그분은 2000년 전에 팔레스틴에서 직접 사역하셨고, ‘지금도’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십니다.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25절하).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직접 걸어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지만, 지금은 기록된 말씀과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뜻을 전하십니다.


히브리 성도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말씀에 대한 간접성입니다. 직접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훨씬 더 분명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팔레스틴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를 더 잘 알았겠습니까? 아니면 오늘날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들고 읽고 묵상하는 사람이 더 잘 알겠습니까? 그것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도 성경을 평생 연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항상 혼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예수님께 ‘당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혀 달라’고 요구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그의 말씀을 들었고, 그의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지만, 그를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완전하게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눈으로 보느냐의 문제도 아니고,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읽고 안다는 데 있지도 않습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이제 주님께서 더 이상 지상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분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이 되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미 오래 전에 선포된 말씀으로 생각하고 읽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와는 너무 멀리 계신 분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말씀하셨지만, 지금도 여전히 직접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지금도 여전히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극복하기 힘든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인식하고 경험하고 고백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인격적으로 듣기보다는 자꾸 원리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기보다는 삶의 원리,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율법이 되어서 나에게 사랑과 격려로서가 아니라 무거운 짐이 되곤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를 향해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의 가슴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들어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경험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들고 나갈 때 얻는 것은 온전한 구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들을 때 얻는 열매는 온전한 구원입니다. 25절 상반절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완전하게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부분적으로 이해합니다. 구원은 흔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한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은 그런 의미만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5장 34절을 보면,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이 옷을 만짐으로 병이 나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병의 치유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시자, 자기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줄 것이며,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이 집에 구원에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구원은 관계에 대한 구원일 것입니다. 그동안 세리로 살아오면서 단절되었던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모든 면에서의 회복과 치유, 죄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은혜 등 모든 것을 구원이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원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단지 천국에 가는 것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좋긴 하겠지만, 천국에 가는 것은 나중에 더 이상 이 땅에서 살 수 없을 때 할 수 없이 가는 곳쯤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천국에 갈 것에 대해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안 갈 수는 없고, 가긴 가야 하는데, 거기 가서 무엇을 할까 하는 점에 대한 막연한 염려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일단 이곳에서 힘들게 일하며 사는 분들은 천국에 가면 일을 하지 않을테니 편하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아니 영원히 놀고 먹는다고 생각하니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천국에 가도 일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에도 그런 근거가 될만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근거는 하나님도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주 분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일을 하든 안 하든 천국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천국에 간다고 하면 ‘조금 있다 간다’고 말합니다. 천국에 대한 사모함이 없습니다. 잘못 말하면 자살 충동처럼 이해합니다. 자신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는 것입니까? 정말 우리가 천국에 가고 싶은 것입니까? 우리가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은 죽을 때 지옥보다는 천국이 낫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지, 이 땅에서 사는 것보다 천국에 더 낫다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만약 우리가 천국을 가고 싶지 않고, 구원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라면, 그래서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진짜 믿음이 아니라면 그 책임을 다 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확실히 구원을 믿지 않거나 혹 구원에 대해 온전한 이해가 없습니다. 구원을 모르는데 어떻게 구원을 소망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예수님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바로 그 예수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귀하고 감사하고 기대할만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간혹 목사에게 ‘목사님은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질문의 의도를 아실 것입니다. 목사를 보고도 그런 질문을 한다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과연 천국에 가서 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천국이라는 곳이 경건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서 너무도 긴장되고 숨막히는 곳으로 인식된다면 그곳이 어떻게 천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구원에 대한 두 가지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구원은 전인격적인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한 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영혼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해당하는 구원사건을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고, 우리의 육신도 건강을 구원을 얻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몸을 이룹니다. 몸이 불편하던 분들은 그곳에서 온전해질 것입니다. 정신적, 관계적, 내적, 외적 모든 영역에서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구원의 사건은 이곳에서보다 훨씬 더 기쁘고 감격스럽고 만족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구원의 사건은, 그리고 천국의 삶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지루하고 경건함으로 오는 긴장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마음껏 웃고 즐겁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의 부분이라도 체험해 보지 못하면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곳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히브리서는 고난 받는 히브리 성도들, 아니 고난 중에 그냥 과거 유대교로 돌아가 버릴까 하고 생각하는 그들을 향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고난 중에도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성격, 성향, 기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맹세까지 하심으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담대할 수 있고,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지금도 중보하시는 분이십니다. 영원하신 제사장이십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 선포된 말씀을 지금 우려 먹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원을 소망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우리가 현재 사는 삶보다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놀라운 기쁨과 행복, 즐거움과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을 소망하며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난도 이길 수 있고, 어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니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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