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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천사에 대해 아주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사는 흔히 날개를 달고 하늘과 땅을 오고가며 하나님의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이면서 때로는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천사를 인간보다 한등급 높은 존재로 인식했었습니다. 천사는 아마도 근심이나 걱정거리 같은 것은 없어보입니다. 그래서 천사를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는 인간보다 높은 존재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에는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고 말씀했습니다. 천사는 구원받을 상속자들, 즉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또한 본문(2:5)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장차 올 세상을 천사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차 올 세상을 다스리는 자는 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성도들이 다스린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 17절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왕 노릇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왕 노릇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이 왜 영광스러운 일일까? 창세기 1장 26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들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복을 주셨고, 또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천국은 성도가 천사를 부리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왕 노릇을 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왕 노릇하는 것, 혹은 왕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왕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왕은 내가 해야할 일을 합니다. 왕은 누가 명령해서 하는 자가 아닙니다. 왕은 백성을 위해서 스스로 일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다스림의 의미입니다. 내가 나를 다스리고, 서로 함께 다스림을 받으며 다스리는 곳이 천국입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을 따라 일을 합니다. 주인이 명령하지 않는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이 주인과 오래 살면서 주인을 섬겼기 때문에 종은 주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리고 종은 자기 주인의 정직함과 바른 삶의 모습을 늘 존경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종은 더 이상 주인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는 알아서 먼저 그 일들을 합니다. 그 일은 더 이상 주인의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어차피 자기 일이고, 또 주인을 위해서 기꺼이 그 일을 합니다. 그런 종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동의합니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겨우 그 정도의 이야기야!’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역사 이래로 이런 삶의 구조를 가진 사회가 그렇게 흔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조차도 그런 섬김과 나눔을 이루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정말 왕처럼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것은 정말 그렇게 스스로 하고 싶고 감사하고, 기다려지고, 그래서 그 섬김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남들 다 하니까 체면상 알할 수 없어 하는 것입니까?

왕이 되는 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정말 깊이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왕이 되는 것을 우리는 그냥 지배개념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일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반대로 뒤집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왕처럼 사십니까? 교회에서 왕처럼 섬기십니까? 가정에 돌아가시면 왕처럼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직장과 사업을 하시면서 스스로 나는 왕이라고 외칠 수 있습니까? 자녀들 앞에서 여러분은 왕임을 말할 수 있습니까?

다윗은 그런 삶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본인이 그런 삶을 살았고, 또 함께 살던 당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그런 삶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인간이 그렇게 왕 같이 살아갈 수 있음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기 백성들에게 그런 은혜와 능력, 감격을 주시는 것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세속 군주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혼자 왕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자기 땅이라고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신하들도 그렇게 살았고, 그의 백성들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그 메시야 왕국은 바로 다윗의 왕국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장에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를 수태할 것을 알릴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32절). 다윗의 왕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 세속적인 왕권으로서의 왕 노릇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 노릇을 누렸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놀라운 삶을 살아가는 다윗은 시편 8편에서 아름다운 고백을 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얼마나 감격스러우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이관대 … 인자가 무엇이관대…’ 다윗의 감격이 묻은 고백입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인데, 도대체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인데, 이토록 놀랍고 감격스럽게 하십니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감격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7절을 봅시다.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이 말씀은 번역상 고려해야 할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잠시 동안’이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천사’입니다. 이 두 단어는 각각 ‘잠시 동안’은 ‘조금’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가능하고, ‘천사’는 ‘하나님’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이런 번역의 차이는 본문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7절은 이렇게 바꿔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를 조금 하나님보다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다윗이 왕 노릇을 하면서 감격스럽게 하나님을 향해 고백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인간을 매우 가치있게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지어진 인간의 아름다움을 직접 삶 속에서 보고 느끼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고백입니까?

인간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보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물론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부분적입니다. 그것이 전체는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 파편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체를 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조각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왕국을 경험하면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8절에서 상황은 역전됩니다. 그러나 다윗 시대 이후 세상은 여전히 죄와 악으로 인해 심음하고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다윗 시대에 부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왕국을 보았지만, 세상은 다시 타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물은 여전히 그에게 /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정치와 제도, 사회구조는 지배구조와 착취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경제는 피폐했으며, 가진 자들은 항상 배가 불렀고, 가난한 이들은 고통 가운데 살아야 했습니다.

다윗의 왕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그리워하면 기다리는 영원한 왕국의 그림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현실에서 다시 그런 왕국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죄악 가운데 살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했고, 언제나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해야 했으며, 자기 욕심과 욕망에 끌려 살아갔습니다. 그들의 삶은 날마다 피폐했고, 고난과 아픔, 빼앗김과 탈취를 당하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런 인간의 죄와 탐욕으로 인해 고난 받는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은 결국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인간으로 오셨고,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심은 사람들에게 보잘 것 없이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인간의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것은 바로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으로 하신 것이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만을 본 사람들은 그분을 보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낀 것입니다. 더욱이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은 수치스러운 죽음이었고, 패배의 죽음이었고, 죄로 인한 심판의 죽음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빌라도라는 로마 총독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고, 성경적으로는 인간의 죄를 대신한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시대에 다윗과 그의 백성들이 경험하고 누렸던 바로 그런 삶을 다시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모든 질서는 깨뜨려졌고, 세상의 질서와 제도는 모두 인간을 살리는 쪽으로 되어 있지 않고 착취와 학대, 죽음으로 몰아가는 구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구조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곧 인간을 대표하고 대신하는 자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8편의 말씀은 본래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시였지만, 본문에서 그 시가 다시 인용되면서 그 시의 주인공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고 있습니다. 만물이 인간에게 복종해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안타깝게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기 때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는데, 오히려 아직까지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에서 굳이 천사를 하나님을 고쳐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8절과 같은 이유로, 즉 마땅히 복종해야 할 만물이 복종하지 않는 그런 상황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심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천사들보다 더 낮아지신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8편에서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심을 입었다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높이신 것에 대한 찬양이었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역으로 바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잠시 동안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천사들보다 더 낮아지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의 의도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삶의 편리와 박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천사 숭배로 나가려고 하는 성도들의 배교를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더 낮은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고난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가심으로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비참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를 부끄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당시 십자가의 죽음이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부끄러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3-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또한 로마서 1:16에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명 사랑이었습니다. 그 십자가가 수치스러웠기 때문에 그 십자가는 사랑일 수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가 수치스러운 것으로 느낄수록 주님의 사랑은 점점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당시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이 사랑이었고, 능력이었고,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윗의 왕국에서 보여주었던 그 하나님의 역사를 다시 체험하게 하십니다. 진정 왕으로 사는 것, 왕 노릇하는 삶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며 오늘날 우리들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쓴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하나님이여 제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돌보십니까?” 다윗은 여러 번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할 때도 사무엘하 7장 18절에서 다윗은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주의 자녀로서 우리들도 다윗과 같은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가고, 삶의 자리에서 기쁨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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