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샬롯츠빌한인교회

주일설교

조회 수 5318 추천 수 46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애굽의 왕자였던 모세가 나이 40세가 되어 자기 민족을 구원하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 혹은 르우엘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드로는 아마도 미디안 족속의 족장이며 제사장이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게 40년을 산 모세는 나이 80세의 늦은 나이에 시내산에서 장인의 양을 치면서 광야 서쪽으로 가다가 시내산까지 갔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미 나이 80세나 되어 힘이 빠져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애굽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어려운 결단의 과정을 거쳐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여 다시 광야로 옵니다. 약 3개월에 걸쳐 행군한 결과 그들은 시내산까지 왔습니다. 그곳은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난 곳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매우 익숙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약 1년 정도 머물면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고,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통해 군대조직으로 이스라엘을 조직하고, 또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다시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의 가나안 행군을 철저히 준비시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광야를 지나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을 것입니다. 두 번째 유월절을 지킨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가는데 있어 지켜야 할 규칙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 위에 항상 구름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떠날 채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구름이 한 곳에 머무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같이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은 광야를 가는 동안 매우 중요한 규칙이었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잠시 머물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오래 머물기도 합니다. 때로는 낮에만 머물거나 혹은 하루 24시간 정도만 머물기도 하고, 때로는 한 달, 혹은 일 년 동안 머물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을 좇아’ 따라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팔에 대한 규정인데, 제사장이 나팔을 울려서 불면 첫 번째는 동편 진(유다지파 팀)이 출발하고, 두 번째 나팔을 울려서 불면 남편 진(르우벤 지파 팀)이 출발합니다. 이런 식으로 행진을 하게 됩니다. 제사장들은 성막 위의 구름을 보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팔을 불게 됩니다.

또한 세 번째 규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 어떤 순서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한 방향에 세 지파씩 진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땐 맨 먼저 동쪽에 머물고 있던 세 지파가 제일 먼저 출발하고, 그 다음 남쪽 지파들이 따라갑니다. 성막 안에 있던 언약궤를 비롯해서 하나님의 성막에 있던 성물들은 고핫 자손들이 이스라엘 한 가운데서 행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행진 수칙을 철저히 가르치고 훈련시켰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뜻하지 않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은 두 가지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하나는 모세가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자신들과 함께 가자고 제안하는 내용입니다. 르우엘은 모세의 장인이고, 호밥은 모세의 처남입니다. ‘우리와 동행하자. 이 광야에서 우리의 눈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은 미디안의 지도자입니다. 미디안 광야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고, 특히 광야의 지형과 특징을 매우 잘 아는 사람입니다. 모세도 40년을 그곳에서 함께 살았지만, 본래 어려서부터 광야를 살아온 처남과는 달랐을 수도 있고, 또 이미 마음의 상심이 큰 상태에서 시작된 광야의 삶이 그리 의욕적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나이 80세가 되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도 장인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이제 감당하기 힘든 사명을 맡은 모세는 자기 처남 호박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우리의 눈이 되어 달라.’ 처남 호밥은 모세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시 한 번 요청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호밥의 다음 반응에 대해 답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다시 3일 간 계속 행군하다가 바란 광야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33절을 보면, 그들이 바란 광야까지 갔을 때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내내 앞서 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쉴만한 곳을 찾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3절).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낮에 행진할 때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여서 서늘하게 했음도 언급합니다(34절).


이 본문은 우리에게 이해의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앞서 나오는 9장 이하의 말씀에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행군 대형에 대해 말씀하시고, 구름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실 것, 머물 때 때로는 한나절만 머물수도 있고, 길면 일 년 이상 머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는대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나팔 신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사명을 맡은 모세가 자기의 처남 호밥으로 자기 백성과 동행해 달라고, 그래서 우리의 눈이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호밥은 모세의 요청을 거절하고, 모세는 같이 갈 것을 거듭 요청한 후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 성경은 언급하지 않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인도하셨는지에 대해 보여주십니다.


이 말씀은 모세의 요청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초자연적인 일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의 결론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사사기에 가서야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 1장 16절에 가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자손들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 즉 여리고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들 중에 거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사기 4장 11절 이하에 보면, 그렇게 올라간 자손들 중에 헤벨이라는 사람은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 부근에 갔었는데, 그의 부인 야엘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죽이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볼 때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아들 호밥은 아마도 이 때 모세의 요청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갔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본문을 이해하는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호밥에게 가나안 정복에 동참해 달라는 것이 긍정적이고 좋은 결과를 가져왔음을 보여주지만, 그렇다면 왜 본문에서는 모세의 두 번이나 간곡한 요청에 대해 호밥의 답변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진영의 한 가운데서 고핫 자손에 의해 메고 가야 할 언약궤가 이스라엘 행진 대형의 맨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쉴 곳, 즉 야영을 할 곳을 친히 찾아보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고, 또한 행진 시 구름 기둥이 이스라엘 민족들의 광야 행진을 적극적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굳이 다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의도적으로 두 사건을 비교해서 보도록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또한 35-36절의 말씀에서 모세가 행진 때와 머출 때마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행진 때는 하나님께서 친히 앞에서 이스라엘의 대적을 막아달라고 기도하고 있고, 멈출 때는 이스라엘 진영 한 가운데 함께 임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밥의 동행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동행했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뒤늦게 가나안으로 갔을 가능성을 배제하면 분명 같이 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같이 갔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애써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성경이 호밥의 동행 여부를 말씀하지 않는 것이 의도적이라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왜 의도적으로 호밥의 동행 여부를 말씀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고민’보다 좀 더 고상한 단어를 사용한다면 ‘묵상’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성도로 하여금 묵상으로 인도하십니다. 답을 주지 않고 좀 더 깊이 생각하게 하십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묵상입니다. 어느 한 문제를 가지고 오래 생각하지 못합니다. 금방 결론이 나와야 합니다. 컴퓨터에 클릭하면 치는 순간 바로 답이 떠야 직성이 풀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는 묵상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중국 올림픽 메달이 따자마다 바로 인터넷에 그 결과가 올라와야 하는 시대입니다. 인터넷 신문이 다른 인터넷 사이트보다 이런 정보에 있어 조금만 늦어도 다음부터는 접속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고, 그것은 그들의 수입과 직결되는 시대적 환경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의 말씀 안에서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보도록 인도합니다. 사람들은 급한 마음으로 답을 제시합니다. ‘사사기를 봐. 거기에 보면 이드로, 호밥의 자손들이 가나안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것을 보여주잖아!’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이 말씀의 결론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왜 오늘의 본문에는 그 답을 주지 않으셨을까요? 다른 모든 결론은 몰라도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아니 이 말씀이 가장 먼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바로 묵상의 필요성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봐! 한 번 묵상해 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급하게 서두르지 말아. 하나님의 뜻은 깊이 생각하고 묵상할 때 깨달아지는 거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서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지식의 체계로 그 때마다 다 정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보는 것 자체가 매우 잘못된 이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자주 한계에 부딪힙니다. 어떤 때는 배경을 몰라서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기도 하고, 때로는 문맥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한계를 느낄 때 우리는 말씀 앞에 우리의 부족한 지식과 지혜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 한계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묵상이 필요합니다. 묵상은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묵상은 그야말로 생각하고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는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이지만, 묵상은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보는 과정입니다. 묵상은 우리 자신을 보게 합니다. 묵상을 깊이 하다보면 (묵상을 깊이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그냥 말씀을 가지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나 자신을 보게 합니다. 여기에 이르면 묵상의 맛을 느끼고, 묵상의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묵상하십시오. 묵상의 훈련을 하십시요. 매일 하는 큐티가 쉽게 답을 얻지 못함으로 흥미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접근하는 자세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묵상을 자꾸 하다보면 그런 자세 자체가 바꿔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묵상은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하루 혹은 일 주일의 시간을 주면서 이 말씀을 묵상하라고 한다면 묵상의 결과가 나름대로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크게 빗나가지 말아야겠지만, 지나치게 빗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성경공부가 필요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람과 함께 하는 것과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계시하실 때 직접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간접적으로 사람을 통해서도 하십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직접 계시하시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경우 사람들을 통해, 혹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오면서도부터 수많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늘 그들의 갈등과 다툼의 문제를 듣고 재판을 해 줘야 할 상황이 생겼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백성들의 문제를 중재하고 심판하는 일로 하루 종일 시간을 사용하자, 이것을 보던 그의 장인 이드로가 그에게 중간 지도자들을 세울 것을 제안합니다.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들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뼈대를 이루는 조직이 되어 모세의 일을 덜어주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매우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방인인 이드로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지혜를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고 나타납니다. 9월 초에 발행될 뉴스레터를 준비하면서 지난 4개월 동안 건축헌금을 외부에서 보내온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하는데, 그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놀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덕목(자질)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잘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준 사람인데도 나와 좀 맞지 않는다고 싸우고 다투고 갈라서면 이것은 정말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과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모세는 자기 처남 호밥과 좋은 동역의 관계를 맺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를 의지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의지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정말로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둘 사이를 매우 자주 혼동합니다. 실제로 우리 자신 안에서 혼란으로 다가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올 여름에 한국으로 혹은 다른 곳으로 가시는 분들이 무려 26가정이나 됩니다. 성인 수로는 39명이나 됩니다. 그에 비해 다른 곳에서 오셔서 등록을 하신 분의 수는 그에 절반도 미치지 못합니다. 여름 내내 매주 송별인사를 하면서 헤어지는 아쉬움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저에게 이렇게 말하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가서 어떻게 해요?’ 별로 도움 안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할 뿐이지, 의지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감사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마음을 맞춰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바로 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5절과 36절에서 모세는 당당하게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인을 받고 행진을 시작할 때 모세는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모든 대적들을 물리쳐 달라고,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다고 선언하며 기도합니다. 또 한 곳에 머물러 진을 칠 때는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서서.’ 라고 주님의 임재와 지키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처남 호밥의 동행을 요청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모세의 믿음이었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실망하기도 하고,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주변의 상황들, 더욱이 사랑하던 사람들이 떠나는 경우도 있고, 이러저러한 상황들로 인해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308 2021-04-18 주병열 목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시다 file 출애굽기 3:1-10
307 2022-10-23 주병열 목사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녹화 방송) 창세기 39:1-6
306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11:1-10) 2011. 12. 18 대강절 네 번째 주일
305 2022-06-26 주병열 목사 여호와를 찬양하라 (녹화 방송) 시편 22:21-31
304 2022-07-03 주병열 목사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2) (녹화 방송) 시편 29:1-11
303 여호와만 섬기라(수24:14-18) 2007. 5. 27 주일예배
302 여호와여 구원하소서(시20:1-9) 2007. 7. 22 주일예배
» 여호와여 돌아오소서(민10:29-36) 2008. 8. 24 주일예배
300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합시다(롬15:1-13) 2006. 11. 12 주일예배
299 열 두 돌의 기념비(수4:1-9) 2007. 4. 15 주일예배
298 2022-03-06 주병열 목사 열 므나 비유 (온라인 실시간 예배) file 누가복음 19:11-27
297 2020-10-18 주병열 목사 열방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file 예레미야 46:1-12
296 열방을 향하여 나아가라(사11:1-16) 2008. 4. 27 주일예배
295 열방의 선지자 (렘1:1-10) 2010. 4. 11 주일예배
294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 (히2:5-9) 2010. 10. 3 주일예배
293 2015-07-26 한희선 목사 영광의 삶 사명의 삶 (Life of glory, life of calling) 열왕기상 3:4-12 (1 King 3:4-12)
292 영문 밖의 길 (히13:7-16) 2011. 8. 7 주일예배
291 2023-07-09 주병열 목사 영생의 소망 (녹화 방송) 디도서 1:1-3
290 영생의 소망(시49:12-20) 2007. 11. 11 주일예배
289 2022-10-02 임준섭 목사 영원한 사귐에로의 초대 (녹화 방송) 요한일서 1:1-4
Board Pagination Prev 1 ...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41 Next
/ 4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