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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흔히 병원에 비유할 때가 있습니다. 병원에는 여러 종류의 환자들이 있습니다. 좀 심하게 아픈 환자가 있는가 하면 좀 덜 아픈 환자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 환자는 환자입니다. 요즘은 예방의학이 발달해서 몸에 이상이 없어도 정기적으로 가서 진단을 받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만, 본래 병원은 아픈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병원에 들어온 사람은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도 영적인 면에서 병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다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한다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다. 물론 세상에 있는 사람들도 죄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면에서 성경이 말하는 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장이였던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비난할 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9:12-13, 막2:17, 눅5:31-32). 밖에서는 모르지만 일단 병원에 가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몸이 아프고 불편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새삼 알게 됩니다. 그런데 모두가 아프기 때문에 병원을 찾았는데, 그 안에서도 좀 더 아픈 사람이 있고, 덜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세워주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두 사람 다 환자복을 입었는데, 서로를 돕는 모습은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로마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본래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만 사역을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로마 교회는 자기가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애정을 가지고 로마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다음 시간에 나오게 됩니다. 어쨌든 그는 로마서를 거의 다 써 가는 후반부에서 매우 집착해서 반복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라는 권면입니다. 마치 병원에서 환자들끼리 서로 붙들어주고 도와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14장부터 그는 집요할 만큼 교회 안에서 약한 자에 대한 배려와 세워줌에 대해 강조합니다. 14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교회 안에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이 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합니다.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의 부족한 믿음, 부족한 판단, 부족한 삶의 스타일, 그런 것들을 비판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신도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약한 모습을 받아들이고 비판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14장 13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놓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판단하지 말되 좀 더 나아가서 그로 넘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아직 믿음이 약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그를 깊이 생각하고 사랑으로 배려하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좋은 의도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선한 마음으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렇더라도 다른 사람이, 혹 믿음이 약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상처가 된다면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주일마다 식사를 준비합니다. 약 200명 가까운 분량의 밥과 반찬을 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집에서 요리를 잘하고 주방 일에 자신이 있는 사람도 200명 규모의 밥을 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주일 식탁은 간소하게 하도록 유도합니다.밥을 포함해서 세 가지 이상 준비하지 못하도록 당부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보면 주방의 식탁이 조금씩 더 나아져갑니다. 전 주에 식사 준비한 사람이 이런 음식을 했으니 나도 그 정도는 해야지 하면서 주일 식탁이 조금씩 더 나아집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덧 주방 일이 부담이 되어갑니다. 지난 주간에도 어느 가정을 심방했는데, 요즘 주방의 음식이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고 하시면서 다소 부담을 느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4장 20절에서 바울은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나의 의가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선의의 행동이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도할 때 복음을 전하다 보면 때때로 논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 안 계신다, 네가 봤느냐 라고 혈전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 때 논쟁에서 이긴 사람은 절대로 상대방을 전도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 교회를 비판하고 그런 교회에 무슨 하나님이 계시겠느냐?’라고 말하기에 내가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왔다고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한 사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는 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세워야 합니다. 나의 의가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옳음이 하나님의 옳음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오늘 본문 1절 말씀입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권면합니다. 앞서 살펴본 두 구절과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4장 1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14장 13절,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15장 1절,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이 세 구절에서 ‘너희가’ ‘우리가’ ‘우리 강한 자가’라고 하는 표현은 누구입니까? 지금 로마교회에서 사도 바울로부터 로마서라고 하는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너희’이고, ‘우리’이고, ‘우리 강한 자’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약한 자는 누구입니까? 그들은 본문에서 있긴 있지만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 약한 자들이 있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서를 받고 읽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믿음이 강한 자라는 전제가 은연중에 깔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문맥에서 ‘우리 강한 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합니까? 본문에서 ‘강한 자’는 바로 비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비판의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14장에서부터 내려오는 강한 사람의 정의입니다. 비판하거나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을 업신여길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연약한 자는 누구입니까? 여기서 연약한 자는 바로 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비판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나에 대해서 약한 사람입니다. 비판 받는 사람은 어쨌든 비판하는 사람 앞에서 약한 면을 보인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그는 지금 비난받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옳고 그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절을 다시 봅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강한 자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이 드러나면 그를 비판하지 말고 그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말씀하신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들이라는 말씀보다 더 깊은 차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나의 의가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말라는 말씀보다도 한 차원 더 높은 말씀입니다. 지난 두 번의 말씀이 수동적인 자세에서 약한 사람을 대하는 것이라면 이 말씀은 적극적인 자세로 약한 사람을 잡아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성도님의 눈에 목사의 단점이 보였습니다. 그 단점이 무엇이든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옷과 넥타이가 어울리지 않았든지, 아니면 목사가 말을 실수하는 것을 들었다든지, 혹은 목사의 치명적인 실수의 상황을 보았든지 그 성도에게 있어서 목사는 연약한 자입니다. 목사는 그 성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성도가 목사에게 은혜를 베풀면 목사는 감사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성도가 목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그리고 비판하고 비난하면 목사는 그 앞에 약한 자입니다. 사실이 어떠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어느 주일 한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오셔서 다른 집사님의 출타소식을 전합니다. ‘목사님! 오늘 어느 집사님이 놀러가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평소에게 그 집사님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는지 그만 한다는 말이 ‘다리나 부러져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야 있었겠습니까 만은 어쨌든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님이 그렇게 말해놓고 나니 금방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욱이 목사님에게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은 여행간 그 집사님과 매우 친한 사이였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에 근심이 컸습니다. 한 주간 내내 마음을 졸이면서 그 집사님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다음 주 그 집사님이 오셨습니다. 목사님을 보자마자 달려오더니 목사님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목사님은 가슴이 털렁 주저앉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제가 여행 갔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목사님께서 여행 중 다치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는 말을 아무개 집사로부터 들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강한 자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 성도가 목사의 약한 점을 감당함으로 또 다른 집사님도 기쁨을 얻고, 목사님도 회개하고, 결과적으로 그 집사님은 정말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회에서 먼저 믿은 이들의 허물을 볼 때가 있습니다. 집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권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장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교회도, 어떤 사람도 그런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완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우리는 그의 약점을 담당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참 좋은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참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여성 지도자가 두 사람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불화가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이 빌립보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빌4:2-3).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 같은 마음을 품으라.” 그리고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여기서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이란  바로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말합니다. 그들을 도우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허물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세워주는 바울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연약한 인간의 약점을 담당하시기 위해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약한 점을 감당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할례 받는 사람의 종, 즉 유대인의 종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유대인의 법(율법)에 의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7절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다른 성경(현대어)에 보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따뜻하게 영접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따뜻하게 교회 안으로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한 점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인 됨을 보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 고소하는 자로 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의 연약함(죄 짐)을 감당하셨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져야 할 짐을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셨습니다. 당신은 낮아지시고, 당신은 스스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로 인해 우리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너희도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우리 주변에 연약한 자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 남편(아내)이 연약한 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자녀의 약함이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우리구역의 구역장이, 혹은 구역교사가 약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또 회사 상관의 약점이 보일 수 있고, 함께 일하는 사람의 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약점이 보일 때 우리는 그 약점을 담당할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눈에 그의 약점을 보게 하신 것을 그를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것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발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보시고, 주님께서 우리가 죄로 인해 형벌 아래 있는 사람이 되었음을 보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운명을 보셨습니다. 죽을 운명, 아니 이미 죽은 운명을 우리 안에서 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인간의 몸을 입고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저가 죄가 있어서 매를 맞고 십자가에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위해 묵묵히 우리의 죄 짐을 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부탁하십니다. 그것이 얼마나 멋진 삶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보게 하시고 그 십자가의 의미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보게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약점을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사건을 성만찬을 통해 기념하고 기억하려고 합니다. 이 은혜에 함께 참여하면서 참으로 참으로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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