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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축하하는 성탄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기로 이 땅에 오셨고, 가실 때는 죄인의 모습으로 가셨습니다. 오실 때도 벌거벗고 오셨고, 가실 때도 벌거벗고 가셨습니다. 공통점은 두 번 다 예수님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장군의 모습으로 오시지도 않았고, 세상의 군왕으로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하나의 일관된 모습은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에도 기적을 행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쓸어버리거나, 자신을 잡으러 오는 병사들을 향해 칼을 들지 않으셨습니다.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죽였던 헤롯 왕을 그 자리에서 죽게 하지 않으셨고, 악한 빌라도를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연약한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성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짧은 글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당신에게 승리를 주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는 아기로 오셨지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즉 평화와 힘, 권위와 자원, 기쁨과 강함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맞긴 말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기로 오신 예수님과 모든 권세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동시에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힘센 아기”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무거운 역기를 드는 아기의 모습을 그립니다. 어른을 이기는 아기, 어른보다 힘센 아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만약 힘센 아기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면, 하나님께서 뭐하러 굳이 예수님을 아기의 모습으로 보내셨겠습니까? 그냥 장군의 모습으로, 허리에 칼을 차고 보내시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아기로 오신 것은, 그리고 그분이 마지막에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분의 연약함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철저히 인간이 되신 것이고, 인간의 모습에서도 철저히 연약한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보면서 아기의 이미지 안에 담긴 예수님의 모습을 좀 더 철저하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히브리서는 4장 14절부터 9장까지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을 그려줍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5장 1-4절에서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었던 아론과 그의 자손 대제사장을 소개합니다. 즉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아론의 후손 대제사장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대제사장의 특징 세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대제사장은 자신이 연약한 자이기 때문에 연약한 백성을 위해 제물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연약하지 않다면 연약한 백성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백성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즉 중보의 역할은 권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과 같은 마음, 즉 연약함을 경험한 자로서, 백성들의 존재와 마음을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둘째,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사역한 대제사장은 다른 사람을 위해 예물을 드리는 사람이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연약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대제사장이라는 점이 그를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은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이 그렇게 보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백성들을 위해서 예물을 드리듯이 자신들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만 하는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대제사장이 연약한 인간이었다는 점이 갖는 양면입니다. 한편으로는 그의 연약함이 백성들을 위한 중보의 사역을 가능하게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연약함으로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4절을 보면, 대제사장에 관한 또 하나의 개념을 말씀합니다. 대제사장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존귀합니다.
4절,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하지만 대제사장직이 존귀한 것은 대제사장 개인의 인간적 도덕성이나 존엄성에 근거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기 때문에 그의 직분이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제사장으로 부르셨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제사장이 거룩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에 대해 적어도 세 가지 개념을 함께, 동시에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사역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목사자의 사역은 목회자 자신의 인격이나 자질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 소명에 근거(의존)합니다. 그런 점에서 목시가 되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해서 세워져야 합니다.

목회자도 연약합니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실수하고 좌절합니다. 결코 완성된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 자신을 세우는 것만도 버거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성도를 이해하고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목사인 것은 목사의 인격적 자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고 깨어질 수 있습니다. 목사는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목사를 믿지 마십시오.

하지만 목사라는 직분은 소중하고 존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라는 직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스스로 자격이 있어서 목사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넘어집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을 의식하고 사역할 때만 목사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모든 목사는 그 인격과 자질의 면에서 철저히 연약한 인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격, 목사의 인격과 자질은 언제든 그 부끄러움이 노출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목회자가 자신의 그런 연약한 인격을 보지 못하고 목회한다면 결국 자신의 인격과 자질을 의지하고 함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맙니다.

즉 목사가 스스로 기꺼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여 복종할 때 그에게서 나타나는 인격과 믿음, 삶과 생각들이 함께 그 소명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인격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잃어버리면 인격도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국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 2장 5절과 9절에서는 성도를 거룩한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우리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존귀함이나 인격에 근거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그럴만한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루 아침에 천박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타락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본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었을 때 생길 수 있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것이 못됩니다. 누구는 믿을 수 있다고 할 말도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으면 인간이 본래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전제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제사장직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쉽게 자신의 연약함을 잊어버리고, 더 나아가서는 부정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자신의 연약함을 부정하고 더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집니다. 그래서 강한 자기 신념을 세웁니다. 그것을 확신이라고 착각합니다. 자기 신념과 확신은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신념은 자신에 대한 신뢰이고, 확신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하나님의 강함을 발견하지만, 반면에 우리 자신의 약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해서는 부정하게 되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더 강한 신뢰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확신입니다.

하지만 많은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과정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진흙으로 지어진 인간임을 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신념(신뢰)을 가지로고 애씁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신념을 가지고 자신을 무장합니다. 어떤 이론에도 넘어가지 않을 견고한 진을 구축합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음성조차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상황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순종의 관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순종과 의존은 나의 약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죄와 악함을 발견하고, 나 스스로는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 난 후에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 후반부인 5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 새로운 조명을 해 줍니다. 5-1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연약하셨는지에 대해서와 그 연약함 중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절대적 순종으로 나아가셨는지를 보여줍니다. 5절과 6절은 예수께서 어떻게 대제사장이 되셨는지를 말씀합니다. 5절에서는 시편 2편 7절을 인용한 말씀으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낳으셨다고 말씀합니다. 6절에서는 시편 110편 4절 말씀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는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제사장이 되셨다는 말은 아론의 반차를 따라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는, 즉 예수님께서 스스로 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철저하게 성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제사장이 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철저히 순종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성부 하나님도 하나님이시고, 성자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자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는 것부터 그런 철저한 순종으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8절과 9절상을 보십시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연약함 중에, 그리고 고난 중에 어떻게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아들이시면서도 고난을 받음으로 순종함을 배웠고, 그 순종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여러 개가 보입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도 순종이 자동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자동적으로 순종하도록 되어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셔야 하니까 그냥 담담하게 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순종하는 분이 아니라 명령하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심을 배웠다는 것은 그분에게 순종이 엄청나게 힘들고 어려웠다는 점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철저한, 완전한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7절을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의 사명 앞에 얼마나 힘들어 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고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마치 여유롭게 담담하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죽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직접 목격한 베드로는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되었다(벧후3:15)”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고난 당하심을 친히 본 자들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기로 오셔서 범죄자의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예수님의 처음과 끝은 매우 연약하고 비참한 모습, 그래서 성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지나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꾸 이런 사실을 직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꾸 힘을 구합니다. 능력을 구합니다. 무엇이든지 자동으로 되는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기로 오셨지만, 어머어마한 힘으로 오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자동으로 일을 이루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도 연약한 인간들 중에 택함을 입어 되었고, 그 연약함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중보자 역할을 감당하여 백성들을 위한 제물을 드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만큼 연약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연약함을 이런 양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연약함이 중보를 가능하게 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 연약함 때문에 늘 넘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직이 존귀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인격이 귀한 것이 아니라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제사장으로서의 그런 면에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즉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실제적으로 연약한 인간의 짐을 감당하셨고,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모든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연약함 중에서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여기에 연약함과 고난, 이 두 가지 개념이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순종은 온전함으로, 그리고 인간을 위한 구원의 완성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 우리는 순종의 개념, 구원의 방법, 결과 등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종은 연약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순종은 억센 힘으로 어떤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자기 확신으로 행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순종은 자기 의지의 결과가 아닙니다. 손종은 자기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으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그분을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순종은 아직 여전히 부족한 존재인 인간이 자기 방법으로는 살 길이 없어서 절대적으로,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성육신하셔서 인간으로 오셔서 철저한 연약함을 경험하셨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했으며, 그 순종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러한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끌어내려서 우리의 삶 가운데 체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외적인 힘, 즉 완력으로 성취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군사를 동원하신 것도 아니었으며 세상의 권력을 통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멸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일은 온전히 주님의 연약함 중에서 성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심으로 이루신 결과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런 순종의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십자군 군병들이 총과 칼을 들고 세상을 복음화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약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이 아내를 힘으로 정복할 수 있습니까? 목사가 교회를 힘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요? 교사가 학생을 매로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정치자가 백성을 힘으로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힘은 일시적으로 통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 힘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약해져야 합니다. 약함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약함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겸손이 곧 하나님의 능력을 얻는 길입니다. 순종할 때 주님께서 일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갑니다. 그리고 순종함으로 주님께 나아갑시다. 힘을 과시하지 마십시오. 힘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가 바로 주님께서 역사하시고 도우실 자리입니다. 약함 중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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