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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4-5월에 이사야서 1-39장까지 말씀을 나눴습니다. 올 해 3-4월에는 40장부터 66장까지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이사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39장과 40-66장입니다. 이사야서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내용적으로,  문학적 스타일 그리고 시대적 배경 등에서 서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사람을 통해 이사야서가 쓰여졌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서의 앞부분(1-39장)과 뒷부분(40-66장)을 하나로 연결짓는 고리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앞부분의 마지막 장인 39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39장에는 히스기야 왕의 실수(혹은 죄)로 인해 남 유다가 멸망하리라는 예언으로 끝을 맺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강대국 앗수르의 공격에서 나라를 구해낸 매우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앗수르에 의해 수많은 나라가 공격을 받고 점령을 당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남 유다의 형제국가인 북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 위기 가운데서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믿음으로 하나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끝내 지켰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당시 신흥국가로 한참 일어서고 있는 바벨론 나라의 왕 므로닥발라단의 방문을 받고, 그에게 남 유다의 모든 문화, 정치, 군사적 기밀들을 다 공개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아마도 그 때까지 크게 번성하지 않았던 바벨론을 쉽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그런 모습을 원치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의 이 일로 인해 남 유다가 바벨론 나라에 의해 멸망할 것임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했습니다. 결국 이 예언은 그로부터 약 150년 후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에 대해 혹 운명론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해 놓으셨으면 인간이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언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면이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언이란 꼭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의미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들로 하여금 근신하도록 경고하기 위함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40일이 지나면 니느웨 성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게 된 것은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여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지,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회개하라고 외쳤을 때 니느웨 백성들은 삼일 간 왕으로부터 온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 재를 머리에 쓰고 회개하였고, 하나님은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하지만 남 유다 백성들은 히스기야 왕을 통해 자기 민족의 멸망을 경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바벨론의 공격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결국 그렇게 멸망하게 될 이스라엘의 운명을 보았습니다. 남 유다 민족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후에 70년 후에 다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잘 묵상해 보면 그것이 곧 오늘 우리의 믿음의 자리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처럼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죄의 포로가 된 운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에게 먼저 전령(선지자, 명령을 전하는 사람)를 보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절).” 그리고 이어서 이번에는 전령(선지자)을 예루살렘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게 합니다.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이 말씀은 원어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면 ‘너희는 예루살렘의 심장을 향하여 말하라’는 뜻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에 남아서 황폐해진 땅에서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유다 민족들에게 이렇게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여기서 복역은 전란을 의미합니다. 이제 전란의 때는 끝이 났고, 전란의 원인이 되었던 죄악도 사함을 입었습니다. 유다 민족의 모든 죄를 여호와께서 두 배로 갚으셨음을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놀라운 선포입니다.


이번에 전령은 다시 광야로 보내집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 예루살렘으로 오기 위해 광야를 지나야 합니다. 광야를 지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광야에는 길도 없고, 물도 없습니다. 위험한 곳입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광야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준비합니다. 그것이 3-4절의 말씀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 말씀은 유다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는 여호와께서 그 길, 즉 광야의 길을 평탄하게 준비하라고 하는 명령입니다. 광야는 분명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본문 3-4절에는 그 길로 유다 백성들이 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오시는 길로 소개합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광야 길로 유다 백성들에게 다가오신다고 선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그렇게 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나타나셔야 합니다. 그 분은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천둥과 번개 가운데 위엄스럽게 나타나시는 분이십니다(출19장). 백성들은 여호와의 강림하심을 보면서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신을 성결케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하나님은 광야를 걸어 오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해 걸어오시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였던 유다 백성들이 걸어오기로 되어 있는 그 광야에 백성들이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걸어오고 계십니다. 이 점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나아오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먼저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이 다시 본토로 돌아올 때 그곳에 함께 걷고 있던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걸어야만 하는 고난의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더욱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기 위해 인간이 스스로 광야의 길을 걸어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길을 친히 걸어오고 계십니다. 포로 생활에 지친 유다 민족과 함께 그 고된 광야의 길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의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복역의 때를 끝내고, 그들의 죄 값을 두 배로 지불하신 후, 유다 백성들의 죄를 사하고 광야를 통과하여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꿈과 환상을 유다 백성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전령(선지자)을 통해 이 놀라운 꿈을 꾸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도록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평탄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시는 그 광야의 길을 닦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는 길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에게서 성취됩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살던 불의한 길에서 돌아서도록 촉구함으로 주님 오심의 길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죄 값을 갚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분의 오심을 위해 길을 닦는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며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데리고 오십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먼지만 일어나는 광야에서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데리고 오시는 그 모습을 그려줍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이끌고 품위도 당당하게 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 그 분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동일하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것이 바로 그 영광,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모든 육체가 함께 볼 것입니다. 모든 인간과 동물들까지 그 영광을 보며 부러워하고 찬양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길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갚으시고 그들을 당신의 품에 품고 친히 광야를 건너서 당신이 예비하신 은혜의 장소,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가도록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 분은 광야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친히 다가오셔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십니다. 광야에서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추위 속에서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구름 가둥으로 쉬게 하십니다. 광야는 여전히 광야이지만, 그 길을 당신의 백성과 함께 가나안까지 걸어가신 여호와께서 친히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심을 약속하십니다. 이사야 40장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는 서론입니다. 이 장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 어마어마한 구원 역사의 서곡입니다. 하나님의 장엄한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지 보여줍니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예언할 때로서는 아직 미래의 사건이지만, 그렇더라도 결국 남 유다를 포로로 잡아갈 나라는 바벨론이라는 당시 가장 강한 나라입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으로부터 구출받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어서 거대한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6-8절입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이 말씀은 세상 권력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끝날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제국이라도 마치 들의 풀, 꽃과 같이 마르고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약속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만이 영원하며 성취됩니다.

실제로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은 바벨론이 멸망할 당시 신년 축제 중이었습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벨사살 왕은 귀인 1,000명을 초대해 놓고 신년 축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주전 4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바벨론 도성이 얼마나 잘 지어졌는지, 바벨론 도성의 성벽은 마차 여섯 대가 동시에 지나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벨론 성을 포위했을 때조차도 바벨론 왕 벨사살은 신년 축제를 계속 진행하도록 선포했습니다. 성은 결코 무너질 수 없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서 5장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그 날 밤 연회가 열린 자리에 갑자기 손가락 하나가 나타나서 벨사살 왕 앞에서 이런 글을 기록하고 사라졌습니다. 그 글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누구도 그것을 해석할 수 없었는데, 다니엘이 그 글을 해석했습니다. 그 글은 이런 의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나라를 저울에 달아 보았는데, 부족함이 뵈어서 왕의 나라를 메대와 바사에게 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날 밤 바벨론 성은 함락되었고,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유대 민족을 해방시켜서 예루살렘으로 보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도 계속적으로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우리는 모두 세상의 물질과 권세 앞에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마치 거대한 제국 바벨론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모든 세상의 힘은 결국 풀과 같이, 들의 꽃과 같이 마르고 시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말씀만이 우리에게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의 말씀에 우리의 인생을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비롯 바벨론과 같은 거대한 제국이 나를 포로로 잡고 있더라도 이제는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구하여서 광야의 길을 함께 걸어가실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혼자 광야를 걷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환란이 와도, 어떤 풍파가 와도 결코 낙심치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9-11절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전령을 보내어서 당신의 백성들, 즉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첫 번째 독자들인 바벨론 포로민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하십니다. 누구를 보라고요?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말씀합니다. 거대한 제국 바벨론을 볼 것도 아니고, 이미 사라져버린 앗수르를 볼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고백하면서 주님 앞에 나왔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강한 왕으로 묘사합니다. 그 분은 강한 자로 임하실 것입니다.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 분은 상급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그 분은 자기 백성들에게 큰 보응(보상)을 가지고 오십니다. 포로생활에 찌들려 살던 당신의 백성들을 그냥 몸만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급과 보상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그런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와 40년 동안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물론 만나를 먹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로부터 많은 은금패물과 의복들을 구하는대로 받게 하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애굽 백성들은 당시 모두 장자의 죽음을 겪었습니다. 엄청난 고통으로 아파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또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로부터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올 때도 역시 고레스 왕의 명령을 따라 페르시야 백성들로부터 수많은 금은 보석과 짐승, 그리고 여호와의 전을 위한 예물들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말씀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당할 백성들이 이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역시 동일한 말씀으로 선포됩니다. 우리도 노예적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도 노예입니다. 물질의 노예로, 명예의 노예로, 근심의 노예로, 장래에 대한 두려움의 노예로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 분은 강한 분이십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키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해방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 분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목자는 양 무리를 먹이시고, 어린 양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십니다. 그 분은 광야에서도 자기 양들을 먹이시고 팔로 그 품에 안으십니다. 약한 양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인도하십니다. 그 분은 당신의 백성들을 이렇게 인도하십니다. 그 분은 당신의 백성들을 이렇게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댜윗은 이 고백으로 수많은 세월들을 고난 중에도 주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들의 목자이십니다. 양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버리는 참 목자.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 분은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오셔서 친히 광야의 거친 길을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분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 이것이 오늘 저와 성도님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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