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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 솔로몬의 죄로 인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어졌습니다.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은 10개의 지파로 구성되어 더 많은 지파와 더 넓은 땅, 더 많은 백성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북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문제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남 유다 소속의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1년에 3번씩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과 북이 나뉘어져서 더 이상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여로보암은 이 문제를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임의로 남 유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왔지만 그것은 결국 북 이스라엘의 체제를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여로보암 왕은 벧엘(야곱에 하나님을 만난 도시)과 단(이스라엘의 가장 북쪽 도시로서 북방 세력들의 공격을 막아야 하는 도시)에 금 송아지 둘을 만들었습니다.

송아지는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는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고 했습니다. 금송아지를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우스광스러울 수 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늘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것보다 구체적인 형상으로 보고 느끼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설득력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형편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북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나라를 지키려고 하다보니 백성들이 예루사렘에 가는 것은 장기적으로 위험하다는 점을 파악한 것은 지도자로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섬기긴 섬기되 예루살렘은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가지 말라고 하자니 백성들이 설득되지 않을 것 같아 그 대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이것이 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한 것입니다. 레위인들도 다 남 유다로 가 버린 상황이라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을 뽑아서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잘 해 보겠다는데 이것을 꼭 잘못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꼭 나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꼭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저녁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기근을 겪기도 하고, 위험한 일과 칼의 위험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엄청난 능력으로 우리를 승리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잘못된 방향, 잘못된 목표를 향하고 있을 때입니다. 잘못된 목표를 지향하는 믿음은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화력이 좋은 대포도, 아무리 명중율이 높은 총도 잘못된 목표를 겨냥하면 무용지물입니다. 이와 같이 잘못된 믿음은 마음의 자유를 빼앗아 갑니다. 기쁨을 빼앗깁니다. 무엇보다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죄에 대한 저항력을 잃어버리고 쉽게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어야 합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 기쁨이 없다면 이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환난을 이기는 힘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믿어도 믿음으로 인해 얻는 능력이 없다면 정말 비참한 일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다시 욕심과 욕망을 따라 살게 됩니다.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소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능력을 누리지 못하고 살 때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할 수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더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뭔가 열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은혜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서 4장에 보면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침마다 희생제사를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린다’고 아모스 선지자가 비웃고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드리는 희생제사는 아침마다 드리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삼 년 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삼 일 마다 드리고 있습니다.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누룩 넣지 않은 무교병입니다. 특별히 유교병(누룩을 넣은 떡)을 하나님께 드릴 때는 그 중 하나만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유교병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낙헌제를 드리며 소리 내어 광포하려무나.’ 낙헌제는 하나님께 드리고는 다시 가져가서 가족들과 자녀들, 노예들과 레위인들을 초청해서 집에서 나누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조용히 경건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돌아봅니다. 지금의 가정예배나 구역예배와 같은 시간일 것입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지 않고 그것을 광고하는데 열심을 냈습니다. 자기들이 이렇게 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왜 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지나친 열심 때문입니다. 그들의 지나친 열심은 불안한 마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을 믿긴 믿지만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맞지 않는 삶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타협해야 했고 하나님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이상의 열심을 보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인해 얻는 내적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지 못합니다.

본문 4절에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벧엘과 길길과 브엘세바는 조상들의 신앙이 깊이 배인 곳들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입니다. 길갈은 애굽에서 나온 자기 백성들이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키며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우물을 판 곳입니다. 이곳들은 자신들에게 있어서 성지와 같은 곳입니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세 곳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종교적 기념비와 기념물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종교적 겉치레들을 행했습니다. 불안할수록 그들은 더 많은 종교 행사를 했었고, 일이 잘 안풀릴 때면 성지를 하나씩 더 찾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더 이방적인 것들로 나라는 가득차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8-9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8절에서는 하나님을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9절에서는 역사의 주관자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자기 욕망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그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면 그들을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고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성문에서 책망하는 지도자들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된 자리에 있는 것을 내면 깊은 곳에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수치와 부정직함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좀 잘못하고 문제가 있어도 그냥 모른척하면서 축복기도를 하는 지도자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분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 분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는 오늘 그 하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돌아보면 신앙 아닌 것이 신앙의 이름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런 것들을 걷어내어야 합니다. 신앙 아닌 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전통과 과거의 경험, 여로보암과 같이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도, 자신의 상처조차도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왜곡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그냥 잘해 보자는 선의로 시작한 일이라고 안 됩니다. 작은 타협이 신앙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신앙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기 시작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벧엘이 아니라 길갈이 아니라 브엘세바가 아니라 하나님 바로 그 분을 만나야 합니다. 100% 순도 있는 믿음을 가질 때 진정한 기쁨과 능력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전한 믿음으로 나아가 그 은혜를 누리며 능력있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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