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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태복음 6장 1-18절의 세 가지 주제 – 구제, 기도, 금식 – 중 세 번째 금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금식에 대해 관심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저도 몇 번 금식을 해 보고, 또 금식의 유익을 얻기도 했지만,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금식에 대한 부담을 갖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간혹 합니다. “꼭 금식을 해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나?” 이런 말은 대개 그 자체를 부인하지도 않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자체를 부정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적 유산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는금식할 때에(16절)”  예수님은 “너희가 만약 금식한다면”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너희가 금식할 때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을 권면하지 않으셨지만, 또 금식이 나쁘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금식은 믿음의 사람들에겐 아주 자연스런 신앙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간 금식하셨고, 안나라고 하는 여 선지자도 84세가 될 때까지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함께 금식하며 기도한 후에 안수하여 파송하였고(사도행전 13장), 바울이 소아시아 여러 교회에 장로를 세울 때에도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금식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또한 교회의 역사 속에서 신앙적으로 부흥하던 시기에는 이런 금식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주님께서는 금식에 대해 지극히 단순하고 짧게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이미 전제되어 있는 많은 교훈과 전통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금식의 목적과 유익은 무엇입니까? 이사야 58장은 금식의 목적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 번째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것입니다(6절).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를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두 번째 금식의 목적은(7절)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입니다.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세 번째 금식의 목적은(8절) 사실 금식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금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치유의 능력입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오늘 우리는 그 첫 번째 목적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 1월부터 5월 말까지 매주 하루씩 금식을 했습니다. 수요일 저녁부터 목요일 점심까지 금식했습니다.

제가 커피를 하루에 네 잔 이상 마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커피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줄이지 못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마시던 술도 끊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예수를 믿는데, 목사도 뭔가 주를 위해 절제하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커피를 그만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날부터 커피를 더 이상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 날이 5월 15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3달 반이 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제가 스스로 며칠이나 견딜까? 또 생각나면 먹고 싶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아무튼 마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그렇게 하고 싶어도 잘 하지 못했던 운동도 하고 있으며, 시간 관리가 전보다 훨씬 더 잘 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식을 하면서 정말 깊이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 안에 탐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탐식은 그냥 맛있는 것을 좀 더 먹고 싶다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금식을 하기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엄청난 욕구가 저를 사로잡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 어떤 것을 나를 붙들고 나로 하여금 먹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내가 목의 욕구에 순응할 때는 깨닫지 못합니다. 함께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스릴 때, 그 욕구의 반대 방향으로 갈 때 그 욕구는 자기 정체를 드러냅니다. 조금만 참고 힘쓰면 절제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문제들이 실은 그보다 훨씬 더 큰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금식은 내 몸의 요구를 더 민감하게 느끼게 해 줍니다. 그리고 금식이란  내 몸의 욕구를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이 원하는대로 우리를 끌고 가고, 우리 안에 있는 내적 욕망이 우리를 몰아갑니다. 보통 우리는 이 자체를 깨닫거나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나 자신과 나의 욕망은 다른 것입니다. 내 욕구가 나는 아닙니다. 때때로 내 욕구는 나를 멸망으로 이끌어 갑니다. 죄로부터 나온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과격한 성품, 억울한 일을 당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 인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 이런 것들은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젊은 남여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다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존심 문제로 분노를 느끼고, 결국 더 나아가서는 가정을 깹니다. 누구를 위해서 깨는가? 자신을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나를 병들게 합니다. 관계를 파괴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그 때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 안에 나 아닌 다른 것이 우리를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그런 자기 욕구에 순종하며 그것이 자기인줄 착각합니다. 금식은 이런 자기 모습, 자신을 몰아가는 어떤 실체를 보게 한다. 금식은 우리의 몸에 숨어서 마치 우리 자신인 것처럼 행세하는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을 찾아내고,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해지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결박을 끊는 능력이 바로 금식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금식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는 것입니다. 슬픈 기색을 보이고, 얼굴을 흉하게 하면서 온갖 아픈 시늉을 다 내는 것입니다.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인정받고 싶어하고, 끊임없이 드러나고 싶어하는 인간적 욕망에 자신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그 욕망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금식의 본래 목적인 흉악의 결박을 풀는 일과는 전혀 반대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망은 죄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의 사슬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던 관성에 의해 그게 내 모습인줄 알고 그 욕구와 관성에 순종하며 산다. 이제 우리는 삶의 방향을 끊임없이 주님께 고정하고 그분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습관적으로 남아 있는 죄성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금식이라는 수단을 통해 오히려 자기 안에 있는 죄성을 그대로 용납하고 오히려 더 그 죄와 타협한다면 그것은 금식의 본래 목적과는 정말 정반대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헛된 금식은 그런 면에서 자신을 더 불행하게 합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용서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죄의 습성과 타성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변화되지 않은 우리의 욕적 습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심성, 식욕과 탐욕에 붙들려 가는 노예와 같은 삶의 모습, 이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는 관계 없는 삶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인생을 노예화하며 비참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모든 것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절제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훈련의 상황에 집어 넣을 때 비로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그런 죄의 습관에 얽매어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서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본래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대로 산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하고 풍성할까 상상해 봅니다. 사실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욕구가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피곤해서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커피/카페인을 찾습니다. 그럴 때 나의 행복, 나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우리는 커피, 혹은 카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금식, 하나님의 훈련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행복과 능력,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에 있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커피를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귀한 것을 주셨고, 또 더 귀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헛된 욕망에 끌려다니면서 자신의 인기순위에 따라 기쁨과 슬픔의 쌍곡선을 타는 것은 너무도 불행한 인생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야 한다.

이번 주일은 특별새벽기도를 합니다. 성도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 아닌 그 어떤 것이 마치 나 자신인 것처럼 행세하며 나를 속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만이 그 분앞에 바르게 설 때만이 분별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유익의 수단들을 선하게 사용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를 더욱 풍성하고 부요하게 누리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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