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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매우 익숙한 내용입니다. 한 여인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와서 예수님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 상황입니다. 유대인들의 모함, 간음한 여인의 윤리적 범죄,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 사이의 균형, 혹은 선후의 문제 등이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아주 특별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 안에 2천년을 내려온 유대인의 신앙과 예수님의 변혁적인 복음,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향한 바람직한 자세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유대 사회는 범죄한 사람을 재판할 때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의 증인에 의해 판결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7:6). 하지만 간음죄의 경우는 대개 직접 현장을 본 증인 두 사람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유대 사회가 재판에 증인을 두는 것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했기 때문에,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간음죄로 처형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당시 유대인들에 의해서 조작된 음모였을 가능성이 분명합니다. 간음한 여인의 상대였던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남자도 이 여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일을 했고, 지금은 이 여인을 향해 돌을 들고 있는 군중들 틈에 끼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6절을 보면,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라고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진짜 모함에 여자를 희생양으로 해서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위치
본문을 잘 보면 7장 53절부터 8장 11절을 괄호로 묶어 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고대 사본에는 본문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본에는 대부분 본문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이 있는 사본들 중에는 본문이 현재의 위치가 아닌 다른 곳에 놓여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1장 끝에 놓여 있거나, 혹은 요한복음 7장 36절 다음에 놓여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본에는 누가복음 21장 37-38절 다음에 놓여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문맥으로는 누가복음에 놓여 있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데, 하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는 표현이 요한복음에서는 여기가 유일하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누가복음 21장 37-38절이 요한복음 7장 53절과 문맥상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눅 21:37-38).”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요 7:53).”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본문이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 본문을 해석하는 방향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은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들에 초점을 두고 행하신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문이 누가복음에 있었다면 그것은 간음하다 잡힌 한 여인의 안타까움, 그런 여인조차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을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보면서 이해하는 대부분의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이 요한복음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본문을 보는 관점도 바뀌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드러내는 일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번이나 반복적으로 당신 자신을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선한 목자(10:10), 부활이요 생명(11:25),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 그리고 참 포도나무(15: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있는 본문의 사건은 주님에게 좀 더 초점을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는 본문을 용서받은 여인의 관점에서 봅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 말 자체로는 맞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오늘날 유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과 묘하게 중첩되어서 절대진리를 없애버리고, 죄에 대한 개념을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즉 이 여인보다 이 여인을 예수님께 고발하는 유대인들이 더 나쁘고 악하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 해석 속에 자신의 죄도 함께 덮어버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허약해져 가는 것도 그런 흐름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본문 마지막 11절에서 주님은 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것이 본문의 결론입니다. 용서도 물론 중요합니다. 용서가 없이 삶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용서가 먼저 있고서야 삶의 변화가 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하지만 용서 자체가 마지막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본받는 것, 즉 성화되는 것이 보다 더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즉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본론: 거룩한 삶을 위하여
본문은 전체적으로 그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삶이 변화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 말씀을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는 주님께서 평소 가장 힘쓰던 일들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가장 힘쓰시던 것을 바로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본문 2절에서도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은 수없이 가르치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은 다른 어떤 기적이나 치유사건보다 더 많습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셨고,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그 기적을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 실패합니다. 5절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유대인들은 모세와 예수님을 대립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를 거부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46절에서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고 말씀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최고의 학자들이며 최고로 경건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알긴 아는데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동일한 성경을 보고 믿는데도 사람들의 생각이 다를까요? 오늘날 교회는 이런 문제 앞에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각자에게 주신 말씀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분열과 갈등에 대해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바/요한/야고보 그리고 바울
갈라디아서 2장 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뒤늦게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는 대열에 끼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자기에게 교제의 악수를 했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합니다. 베드로(요한)는 어부 출신이고,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배우고 훈련했지만,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주님을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후에도 유대적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반면 사도 바울은 가장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는 사도 바울의 서신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그것을 서로 다른 주장을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실 표면적으로 바울 서신과 야고보의 서신은 상당한 차이를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서로 교제의 악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서로 전혀 다른 성향, 다른 전통,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밀씀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의 의지는 약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깊이 알면 알수록 서로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날의 교단분열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늘날에는 보수적인 교단일수록 더 분열을 잘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붙들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신앙의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분열을 잘 합니다. 유대인들의 확신은 얼마나 강했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를 죽일만큼 강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적용 : 패러다임 쉬프트
우리는 말씀을 잘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를 조금만 다니면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면 마치 예수님의 수제자가 된 것처럼 여깁니다. 오늘날 교회가 힘써야 할 것도 말씀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나에게 말씀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에 대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신앙생활은 하면 이렇게 된다.’ 좀 더 나아가면 ‘나는 여기까지만 나간다. 주일은 지키지만,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 패러다임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건, 처음 한 사람이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패러다임을 따라 움직이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그래서 오래 신앙생활을 함께 해 보면 누구나 그 사람의 패러다임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패러다임에 반응하고, 응답하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복음의 기쁨과 감격, 능력과 은혜를 전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께 반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반응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겠으며,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더 심하게 말하면 내가 곧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이것이 깨져야 합니다. 깨지지 않은채 성경을 들고 읽고 연구하는 것은 전혀 복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먼저 믿은 이들의 책임이 큽니다. 진정한 복음의 핵심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의 패러다임을 깨고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나누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에 감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바르게 깨닫도록 힘써야 합니다. 패러다임 쉬프트는 세상에서도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주님의 말씀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2. 자신을 보고 손에 들려진 돌을 놓아야 합니다.
말씀을 바르게 깨닫게 되면 두 번째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현상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영혼의 거울입니다. 말씀은 우리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게 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주님께서 그들 자신을 보도록 촉구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라고 언급합니다. 이 말씀 앞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돌아갔습니다(9절)”

예수님의 가르침의 주된 반응은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자신, 자기를 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여자만 보고 그 여자의 죄만 보면서 그 여자를 향해 흥분하고 분노하던 그들이 이제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본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과 감출 수 없는, 손에 들고 있는 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꺽이고, 자신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변화는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
이런 변화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려질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돌아갔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돌아갔습니다. 무리들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공동체가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성경의 예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듣고 있던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데, 지진이 나면서 옥문을 열리고 간수들은 죄수를 놓쳤다고 생각하여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이 그들을 만류하자, 그들이 바로 질문합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16:30)?”

그들은 한결같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방법이 잘못되었고,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것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내 생각에는…
다른 사람을 볼 때는 흥분하게 되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볼 때는 겸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자신을 보기 시작할 때 공동체가 변화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자기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고 자기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사과합니다.’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가 보여야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래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해야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되고, 자기 손에 돌이 쥐어져 있는 것도 모르고 자기 의로 살아갑니다.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기쁨도 없고, 감사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지금 손에 쥐어져 있는 돌을 놓으십시오. 그 돌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향해서도 돌을 던질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아십니까? 누가 누구를 향해 돌을 던진단 말입니까? 우리는 다만 섬길 뿐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면 기도할 뿐입니다. 물론 교회는 공식적으로 치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개인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만 있습니다. 이 하나를 꼭 기억하셔야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주님과의 개인적인(인격적인) 관계를 경험해야 합니다(9하-11)
세 번째는 주님과의 개인적인, 인격적인 관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9절 하반절을 보면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이 여인만 남았습니다. 둘만 남아서 대화를 합니다. 시끄럽던 소리들,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려고 소리를 지르던 군중들은 어디론가 다 가 버리고, 예수님 앞에 선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던 자가 없느냐?” 여자가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주님은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자리에 있으셨던 것처럼, 그렇게 오늘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모든 주변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준비가 충분히 될 때까지 우리 곁에서 함께 서 계십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은 내 곁에 계셨습니다. 내가 두려움 가운데 있을 때에도, 내가 죽음의 공포 가운데 있을 때에도, 죄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을 때조차도 내 곁에 서 계시면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단 둘이 되었을 때 조용히 내게 다가와 물으십니다. ‘너를 정죄하던 자가 없느냐?’

성도는 주님과 일대일로 대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 둘이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주님과 대면하면 우리는 진솔해집니다. 정직해집니다. 주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 없고, 숨길 이유도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발견합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우리는 보통 변명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간음죄를 잡혀 온 것이 사실이었든지, 아니면 저들의 누명이었든지 그것은 상관 없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더 이상 묻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십시오. 주님과 개인적으로 깊이 교통하십시오. 주님과 한 번 깊이 대화해 보십시오. 주님께 말을 걸어보십시오. 주변이 조용해질 때까지 주님 앞에 서 계십시오. 내 마음을 충분히 주님께 내려놓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교통할 때,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날 때, 우리의 패러다임이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돌을 쥐고 있는 우리의 손에 힘이 빠질 것입니다. 혈기와 분노, 다른 사람을 향한 원망의 감정들입니다. 그리고 정말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평안입니다. 그 평안이 성도님들 안에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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