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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네 번째 왕 여호사밧이 형제 국가인 북 이스라엘 왕 아합과 연합군을 형성해서 아람 나라와 전쟁을 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전에 아람에게 빼앗겼던 도시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한 전쟁이었는데, 그만 이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은 전사했고, 남 유다의 왕 여호사밧은 ‘평안히(1절)’ 돌아왔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의 궁으로 들어가니라(1절).” 전쟁에서 돌아온 여호사밧은 선견자 예후로부터 책망을 받습니다. 책망의 이유는 하나님을 떠난 악한 아합 왕과 함께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돌아오는 왕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수 많은 군사들을 잃고, 전쟁물자를 빼앗기고, 국가 재정은 바닥이 나고,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패배의 쓴 잔을 마시고 완전히 낙담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아직 마음을 추스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왕을 향해 선견자 예후는 날카로운 책망을 퍼부어댑니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2절).”
선견자 예후는 이런 말을 왕에게 하고는 곧 감옥으로 가거나, 심지어는 그 자리에서 참수를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특히 예후의 경우는 더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선견자 예후를 하나니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데(2절), 그의 아버지 하나니도 역시 선견자였습니다. 그는 여호사밧의 선왕이었던 아사 왕 시대에 선견자로 사역했습니다. 그는 아사 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다가 그 자리에서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나라의 군사력을 빌려서 북 이스라엘과 싸워 승리하고 돌아온 아사 왕을 책망하다가 그만 옥에 갇히고 말았었습니다.

선견자 하나니의 아들 예후는 아버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사 왕을 책망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니의 아들 예후가 아사 왕의 아들 여호사밧을 향해, 그것도 전쟁에서 패배하고 낙심 중에 돌아오는, 그래서 어떤 반응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여호사밧을 향해 날카롭게 책망합니다.

왜 그래야 했습니까? 여호와께로 돌아와야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만이 사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을 아주 미묘한 뉘앙스를 우리에게 줍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의 궁으로 들어가니라.” 여호사밧은 평안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는 살아서 평안하게 돌아왔지만, 그것으로 그의 운명이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성경은 은연 중에 드러냅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선견자 예후의 날카로운 질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니의 아들 예후는 유다 왕 여호사밧과 대립합니다. 여호사밧은 칼을 쥔 권력자입니다. 예후는 하나님의 이름(권위)으로 말씀을 외치지만, 그러나 생명을 내놓고 하는 일입니다. 서로를 돕는 관계이지만, 말씀을 떠났을 때, 혹은 나라의 위기를 맞을 때, 둘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과 긴장관계가 생겨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사밧 왕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호와께로 나아가는 것만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서 지쳐 돌아오는 여호사밧에게 위로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를 떠났기에 징계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후 선견자가 그 일을 위해 생명을 건 것은 그것이 곧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역사를 알기 때문입니다.

시대마다 선견자나 선지자, 혹은 목사나 말씀의 선포자가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깨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칠 때 시대는 위기를 이기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둠의 시대라고 해서 선지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부와 축복을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사랑한다고만 외쳤습니다. 언제나 승리를 외쳤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아합 왕은 400명의 선지자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이 전쟁이 하나님의 뜻인지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400명의 선지자들 모두가 한결같이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전쟁이라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단지 미가야라는 한 선지자만 이 전쟁에서 아합 왕이 죽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 역시 수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바벨론에서 유다의 승리를 약속했습니다. 단지 예레미야만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고백하고 외칩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 하나님이 내 편일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까지 주실만큼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이 돌아오라고 외치는 말씀이 많은지 아십니까? 이사야 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잔느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예레미야 3:12,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세아14: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예후 선견자가 여호사밧 왕에게 외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왕은 어떤 뜻으로 북 이스라엘 왕과 협력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선의로 북 이스라엘과 연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고, 이제 내가 그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 여호사밧이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여호사밧은 전쟁에 지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선견자 예후의 말을 들으면서 그는 다시 나갔습니다. 첫 번째는 전쟁터로 나갔지만, 편안한 왕궁을 떠나서 이번에는 백성들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살더니 다시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함 산지까지 민간에 두루 다니며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여호사밧은 예후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왕궁에서 다시 나가서 유다 전역을 돌면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이렇게 아름다운 일을 보셨습니까? 한 나라의 왕이 선견자의 말을 듣고 말씀 앞에 서서 순종함으로 왕궁의 편안함을 누리지 않고 백성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말씀으로 설득하고 권면하면서 주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사밧의 행차가 그렇게 권위적이었겠습니까? 그가 어디 왕으로서 큰 행렬을 만들어서 자신의 권위를 드러냈겠습니까? 전쟁에서 지고 돌아온 왕이었습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잘못된 북 이스라엘과의 동맹으로 전쟁에 나갔다가 군사를 일고, 전쟁물자를 잃고, 백성들의 세금으로 이뤄놓은 나라의 재정을 축나게 하고 난 후였습니다. 더욱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돌아오자 마자 선견자 예후의 책먕을 들었습니다. 왕의 체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선견자 예후에게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는 소문이 알만한 사람은 다 알도록 퍼져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점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없습니다. 다만 여호사밧이 백성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겸손하게 백성들에게 다가가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나를 보라고… 내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인간적인 판단으로 나갔다가, 그것도 북 이스라엘에 가서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약 400명의 선지자들이 다 이길 수 있다고 외칠 때, 왠지 뭔가 그것으로 다가 아닌 것 같아 북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다른 선지자는 없냐고 했는데, 한 선지자를 불러왔었다고, 그가 바로 미가야라는 선지자였었다고, 그는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고 분명히 말했고, 이 전쟁에서 아합 왕은 죽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알았었다고, 바로 그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을 전하고 있음을 알았다고, 그런데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고,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그 때 하나님보다 아합과의 관계를 더 염려했던 것 같아,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결국 아합 왕이 죽은 것인데, 내가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이 전쟁을 돌이키자고 했으면 아합 왕도 죽지 않았을텐데, 내가 그렇게 어리석었다고 말합니다.

여호사밧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말도 안하면서 어떻게 백성들을 권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호사밧 왕이 얼마나 겸손히 낮아지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낮아졌고, 선견자 예후 앞에 낮아졌고, 백성들 앞에 낮아져서 자신의 부족했던 면을 고백하면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권면합니다. 3절 하반절에 선견자 예후가 여호사밧에 대해 말하듯이 그는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진실로 온맘으로 다하여 하나님을 찾고 또 찾는 것입니다.

저는 여호사밧이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얼마나 가슴이 벅차 올랐을까를 상상해 봅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상상할 수 있습니까? 비로소 제 자리로 돌아온 마음, 비로소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와서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일들, 전쟁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 앞에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고, 진정으로 낮아졌을 때 백성들이 마음을 열고 왕의 중심을 보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이 놀라운 광경들, 이런 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얼마나 감격스런 은혜겠습니까?

오늘 교회에 필요한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왕도 아닌 존재에 작은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해서 가슴에 응어리지는 것도 모르고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있습니다. (물론 왕이 아니기 때문에 내려놓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왕과 같은 신분이 되면 더 내려놓기 어렵다고 한다. 많이 배울수록 더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은 심리학자들이 이미 발견해 놓은 것이다. 남 부러운 자리까지 가면 갈수록 그 자리에서 떨어지는 것이 두려운 법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삶을 포기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작은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자멸의 길인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면서 계속 그 길을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잘못 했다고 하는 이 말 한 마디가 어려워서, 자존심이 자신을 지켜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계속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조금만 깊이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감격스런 은혜였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자존심 싸움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우리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고백하면서도, 조금도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이 없이 날카롭게 세운 입술의 힘으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상대방을 패배의 늪으로 빠지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지위가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입지가 넓어진다고 착각하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인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학교와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은연 중에 이런 일들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결국 자신과 공동체를 슬픔과 좌절 가운데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을 기대하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습니까? 그분이 주시는 은혜의 샘물을 맛보셨습니까? 수가 성에 사는 한 여인이 우물물을 얻기 위해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자기가 만난 예수를 전하게 위해 뛰어가는 사마리아 여인의 감격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런 기쁨이, 그런 감격이 성도님들 가운데도 있습니까? 그런 하나님을 목말라 기대하고 사모하십니까?

더욱이 사람은 본대로 합니다. 배운대로 살아갑니다. 특히 보고 배운 것은 마음과 정신에 깊이 박혀 있어서 위기의 때마다 그런 방법을 사용하기를 잘 합니다.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 왕이 예후의 아버지 하나니를 감옥에 가두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자신을 거스리는 말을 선포했을 때 가차 없이 그를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평소에는 잘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다가도 마음이 불편하고 어려우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자기의 성격대로 일합니다.

여호사밧도 동일한 상황, 동일한 모습을 표출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전쟁에 패배하고, 실패감 속에서 낙심 가운데 돌아왔는데, 예후라는 선견자가 자신의 실정을 책망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도 역시 아버지를 따라 예후를 당장 감옥에 가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습관을 따라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여호사밧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 뜨기 위해 가지고 온 모든 그릇을 놔두고라도 자신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마을로 뛰어갔던 사마리아 여인처럼, 물고기 잡은 것을 다 놔 두고 예수님을 좇아갔던 베드로와 어부들처럼, 왕으로서의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라도 기꺼이 자신이 발견한 소중한 보화를 나누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님들에게도 이런 감격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보화를 빼앗기지 마십시오.. 내려놓으십시오. 내려 놓아야 할 것을 내려 놓으십시오. 전혀 도움 안되는 것을 붙들고 인생을 더 이상 불행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갈 곳은 오직 여호와 그분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인생을 만족하게 하고, 은혜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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