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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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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남 유다의 요담과 아하스 왕, 그리고 히스기야 왕 때에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였고, 같은 시대에 이사야와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도 선지활동을 했었습니다. 앗수르라는 강대국이 부상하고 있었고, 작은 나라들은 강대국의 출현으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혼란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는 점점 더 죄와 악함이 넘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가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9-10절).” 라고 선포합니다.

예언자의 눈은 성전 안에 정교하게 다듬어진 나무와 정성스럽게 다듬어 만든 대리석 배후에 흐르는 백성들의 아픔과 고통을 보고 있습니다. 강제노역에 동원되고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한 채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당시 사람들의 고통을 선지자는 보고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세 부류의 지도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들은 우두머리들(공공관리)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모두 돈을 받고서 자신의 직무와 관련된 순전함을 내팽개치고 있었습니다.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해야 할 자들이 뇌물를 받고, 제사장들이 돈을 사랑해서 성전을 장사터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명이 이처럼 왜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판에 박은 듯이 경건한 말을 하였고, 자기들은 영원토록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11절하)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말을 계속 내뱉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데, 어떻게 우리에게 재앙이 임할 수 있겠느냐? 믿음을 가져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라. 용기를 가져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직장에서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무엇을 하든, 심지어 무슨 불의를 행하든지 관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너무도 자주 하나님의 축복을 남용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현대교회는 인간을 죄인으로 보지 않고, 심리적 상처를 가진 피해자로 봅니다. 죄인에게는 회개가 필요하지만, 심리적 상처를 입은 자에게는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회개를 외치지 않고 치유를 외칩니다. 모든 사람들을 죄인으로 선포하지 않고 치유 받아야 할 환자로 몰아갑니다. 이런 모습은 현대인들의 심성과 매우 잘 어우러져 갑니다.

하나님은 본래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범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의 자식이 되어버린 인간을 찾아오기 위해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 값이 바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피 값을 주고 사셨다’고 표현합니다. 거져 은헤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로서의 온전함을 요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구원하셨는데요? 무엇 때문에 값을 지불하셨는데요? 값을 지불하실만큼 우리를 끔직히 사랑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우리의 방종을 허락하는 사랑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방종했습니다. 조금 어렵다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앗수르 나라가 강성해져서 주변 나라들을 점령해 들어오자, 모두들 그 줄에 서려고 믿음을 버리고, 신의를 버려 버렸습니다. 백성을 짓밟고라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유익을 얻기 위해 언제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해 버리곤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달리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 죄를 짓는 원인을 스스로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악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에게는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약한 사람을 위한 치유는 외적인 힘에 의해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스스로 회개해야 합니다.

나라의 위기 가운데서 장래에 대한 두려움과 자녀에 대한 염려, 생계에 대한 근심 등이 마음을 짓누릅니다. 여기까지는 약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고 빼앗고 사기친다면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것은 위로 받아야 할 약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것조차도 위로 받아야할 약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그 사람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동정하는 시대가 오늘의 시대입니다. 그 논리 이면에는 스스로의 죄를 면하고 스스로를 두둔하려고 하는 심리적 위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 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12절).”
다른 성경(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시온이 갈아 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 언덕이 잡초로 뒤덮이게 되거든, 그것이 바로 너희 탓인줄 알아라.”

예루살렘과 성전이 초토화되어 버릴 것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그 아름답던 예루살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시온을 갈아 엎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너희 탓인줄 알라고 선포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자기 백성들을 향해 날카로운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갈아 엎으실 것이라고 공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으셨다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징계해서라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앗수르의 공격 앞에 얼마나 아프고 힘드냐고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두렵냐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를 공격했습니다. 그들의 악함을 지적했습니다. 앗수르의 공격과 이스라엘 사회의 혼란을 틈타 할 수만 있으면 혼자라도 살 길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향해 사정없는 책망과 징계,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언이나 신약시대의 설교는,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피차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설교는 그냥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문제가 무엇일까요? 문제는 말씀이 자신의 생각과 삶을 정당화시켜준다는 점입니다. 부족한 것은 약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족한 것은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고, 나는 본래 온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자기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주고 두둔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목사의 설교가 은혜가 된다고 느낄 때, 은혜 받는 이유들 중 하나는 바로 목사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준다고 느낄 때입니다. 그 때 목사는 하나님의 대변자가 아니라 그 사람의 대변자로 전략하고 맙니다. 모든 말씀을 자기 신앙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삼는다는데 있습니다. 성경도 잘 압니다. 구원에 대해서도 잘 압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도 잘 압니다. 감격스럽게 눈물을 흘립니다. 그래서 자신은 되었다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삶을 변화되어야 합니다. 삶의 변화가 없으면 믿음도 가짜라고 야고보서는 강하게 선포합니다.

3장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1,000년 이상 믿음의 대를 이어온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지해 주시 않느냐?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둔하지 않으시냐? 이들의 고백이 오늘날 우리들이 하는 고백과 얼마나 같은지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왜 못믿느냐? 믿음을 가지세요.

그러므로 말씀이 나의 생각을 지지해 주고 두둔해 줄 때는 일단 의심해 봐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괴로워하고 아파한 적이 없다면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바르게 서 있을 가능성보다 바르게 서 있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다. 아니요. 사실은 모두 잘못 서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보다 약 150년 정도 늦게 선지자로 활동한 예레미야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가 활동할 때는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26장에 보면, 예레미야가 여호야김 왕 때 남 유다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예레미야26:5-6).”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참으로 독설과 같은 말을 퍼붓고 있습니다. 이 말을 예레미야가 하자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붙잡고 말합니다.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공동번역 성경은 “이 죽일 놈아!”라고 번역했고, 현대어 성경은 “네가 그따위 소리를 하였으니 너는 이제 죽어 마땅하다.”고 번역했습니다.

예언(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흔들었습니다. 그들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빌어 이 성전이 실로처럼 되고, 이 성읍이 허물어져 사람이 못 살게 된다고 하느냐?”
몇 절 넘어가면(11절)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죽는 것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이 망한다고 예언하였음이라.” 이것이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갈등입니다. 어려움입니다. 피차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살고 죽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17절 이하에 내려가면 여기에 150년 전에 있었던 미가 선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지방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있었는데, 그가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인용하는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미가서 3장 12절 말씀입니다. “시온은 발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예레미야와 동일한 예언을 150년 전 미가 선지자가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미가 선지자를 죽였느냐?”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미가 선지자의 말씀을 들은 남 유다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말씀 앞에 섰습니다. 미가가 그 말씀을 선포했을 때 당시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함으로 여호와 앞에 나왔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해 뜻을 바꾸셨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듣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다를 때 우리는 눈을 감습니다. 귀를 닫습니다. 조용히 머리를 숙입니다. 그리고 불편한 마음을 감추고 교회의 문턱을 나갑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말씀을 선포하는 이에게도 문제가 적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말씀이란 백성을 살리든지 아니면 본인이 죽든지 가부 간에 결단을 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설교가 적당한 타협주의에 빠져들어가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 모습에는 저에게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의 성취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미가 선지자의 선포를 유다 백성들이 듣고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그들의 생각을 바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의 침략의 엄청난 고통을 이겨내고 기어이 살아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히스기야와 그 백성이 말씀 앞에 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 자체의 성취여부보다 그 말씀을 통해 일어나는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반응하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어떤 식으로든 정의를 내리고 그 의미를 규정하고 해석하는데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4장에는 이런 말씀에 응답하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회복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증거한 대로 하나님의 강한 책망 앞에 회개함으로 반응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의 메시지입니다.
첫째는, 말씀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2절).”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서 그의 도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길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치관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시편 119편 1-2절입니다.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시편 1편 1-2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우리의 갈 길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살 길은 오직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 말씀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그 말씀을 힘써 따라야 합니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그것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말씀을 좇는 자에게 평강의 은혜가 있습니다. 3절은 무리가 칼을 쳐서 보습(평화의 농기구)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더 이상 전쟁을 연습하지 않습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무기고에 있는 철을 다시 농기구로 만들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갑니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백성에게 나타나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항상 전쟁 중입니다. 나라만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칼을 갈고 창을 준비합니다. 상대방이 나의 마음을 찌르며 들어오면 나도 최소한 방어를 하든지, 아니면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처럼 상대방을 향해 비수를 꽂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자신을 힘들고 어렵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그런 무장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칼을 만들 필요도 없고, 칼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칼을 만들던 그 힘과 에너지를 이제는 보습(평화의 농기구)을 만들고 낫을 만들어 곡식을 풍성하게 하는, 삶을 풍성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전쟁을 그치십시오. 이제 칼을 보습으로 만드는 일에 참여하십시요. 더 이상 우리에게 무기는 필요없습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논리를 증명할 수고는 필요 없습니다. 그런 교회, 그런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는, 풍성한 삶의 약속입니다. 4절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릴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모습을 그려줌으로 그들에게 복을 약속하십니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 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이 말씀은 위협이나 불안이 배제된 상태, 즉 완전한 평화를 뜻하는 관용구절입니다.
열왕기상 4장 25절입니다.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앗수르의 군대 장관 랍사게가 예루살렘 성벽을 향해 항복을 권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열왕기하 18:31).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스가랴 3장 10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도를 배우면 그 길로 행하는 자에게 포도나무 아래에서 위협이나 불안이 배제된 상태에서 완전한 평강을 누릴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가 정말 기억할 것은 우리 마음의 평강은 외적인 환경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정말 사실이지만, 사실 이를 정말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삶의 상황이 요동치고 좌우를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삶을 진정으로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려움이 없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나요? 우리의 마음이 있는 두려움이 우리를 움츠러 들게 하고, 하루하루의 삶을 힘들고 고단하게 합니다.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질병의 두려움, 물질에 대한 두려움, 장래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케 하시는 은혜는 바로 주님 앞에 바르게 서는 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말씀에 반응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약한 존재이기 이전에 악한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치유가 아니라 회개입니다. 말씀을 자기 신앙과 삶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을 삼으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입니다. 말씀 앞에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살아있는 성도입니다. 이런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서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맞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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