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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예루살렘에 온 후 유대인들에 의해 체포된 후 세 번째 심문을 받습니다. 유대인을 대표해서 나온 더둘로라는 변사는 바울의 죄 세 가지를 벨릭스 총독 앞에서 고소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을 소동한 죄, 둘째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점,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혔다는 죄입니다. 바울은 이 고소에 대해 하나씩 대답을 했습니다. 자신은 예루살렘에 올라온 지 이제 겨우 12일밖에 안되었으므로 소동을 일으킬만한 시간도 없었고, 또 결례를 행하는 중이기 때문에 성전을 더럽힌 적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저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도를 좇아 복음을 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저들의 신앙과 동일합니다. 무엇보다도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나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점을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 깃발을 들고 나왔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결국 더둘로라는 변사를 앞세웠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부활이라는 문제입니다.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조차도 바울의 부활의 믿음 앞에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전 바울은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이 심문을 받는 이유는 단 하나 죽은 자의 부활을 말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로 인해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 사이에 논쟁과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 결과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모르지만, 본문 21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책임질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부활의 문제와 이로 인한 논쟁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이야말로 내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만약 이 부활의 문제로 인해 나를 심문하려면 하라고 그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바울은 심문의 주제를 부활의 문제로 몰아갔고, 그것은 그들이 가장 꺼리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부활을 믿습니까? 부활신앙은 무엇입니까? 부활신앙에는 몇 가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부활을 믿으면 죽음의 문제가 가벼워집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고 하니까 싫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져서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나는 죽어도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분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이나라, 믿고 싶은데 더 확실한 증거를 주면 좋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두 번째 부활신앙을 가지면 생명의 초점이 죽음 이전에서 죽음 이후로 상당히 옮겨진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을 때 우리의 삶을 이 땅에서의 일들보다 죽음 이후의 삶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무게 중심을 두게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주님의 말씀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6:20)는 말씀 등이 다 그런 의미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부활신앙은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을 연속선상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도들은 천국에 대한 믿음, 부활신앙을 갖는 것이 아무래도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부활에 무관심합니다. 영생은 죽은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고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부활과 영생의 중요한 한 면을 무시하거나 외면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늘 자신이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심문을 받는다고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고소할 죄목이 있다면 내가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한 것밖에는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부활을 전함으로 심문을 받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전하는데, 오늘 우리들은 그 일을 외면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그런 면에서 과연 성경적인 교회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생각한 부활신앙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의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항해 가진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다는 점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활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도 악인도 같이 부활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과 삶에 대해 심판을 받습니다.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조차 바울을 대면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바로 이점입니다. 부활이 심판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인정하고 믿긴 믿었지만, 여기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현재의 삶으로도 돌아봐야 할 것이 매우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에는 심판이 있고, 심판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바울을 심문하던 벨릭스 총독이 바울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불러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 때 바울이 전한 말씀의 주제는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이 바로 부활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이 말을 듣고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두려워하다는 헬라어와 영어는 동일하게 경외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필연적입니다.

장 지글러라는 사람이 자기 책에서 말하기를 이 세상에는 120억 인구가 먹고도 남을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는데, 현재 세계인구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에 10만 명이,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이 책임을 누가 누구에게 물을 수 있습니까? 현대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대개 가지고 있는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구조가 그렇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그런 일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죄가 없어졌습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심판이 없어졌고, 심판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도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증거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심문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엔가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서 지금보다 더 두려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다만 형벌의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믿음으로 반응하며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림으로 온전한 삶을 사는 자에게 상급을 주시는 심판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지금 그 은혜로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을 열지 않고 바울을 향해 오히려 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주님의 심판대는 우리에게 엄청난 상급을 주시는 은혜의 자리가 됩니다. 부활신앙은 우리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경외하게 하는 삶을 갖게 합니다. 부활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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