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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0편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 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에 그들의 슬픔을 탄식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본 시는 그들의 슬픔이 얼마나 크고 아팠는지 보여줍니다. 눈물 양식(5절)을 먹으며 원수들의 조롱 거리(6절)가 된 것으로 인해 절규합니다. 고통 속에서 과거를 회상합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8절).” 하나님은 애굽에 있던 야생 포도나무(왕하4:39에는 같은 히브리어 단어가 ‘야등 넝쿨’로 번역되었다.)를 가져다가 가나안의 열방을 쫓아내고, 그곳에 심으셨습니다. 애굽에서의 노예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견고하고 강력한 국가로 탄생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다윗 왕과 그 시대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나뉘어졌고, 북 이스라엘은 먼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타락은 정도를 넘어섰고, 벧엘과 단에 별도의 단을 세워서 하나님 경배하는 일을 제한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신앙적 탈선은 나라의 멸망을 가져왔습니다. 멸망한 민족을 붙들고 그들은 안타깝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14절).’ 이 나라는 주께서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심으신 주님의 포도나무입니다(8절). 이 민족은 주의 오른손 즉 주님의 능력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원어로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고통 중에 하나님을 향해 절규합니다.


본 시는 아삽의 후손이 쓴 시입니다. 이 시는 하나님을 섬기던 예루살렘 성전에서 불려지던 노래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던 노래였지만, 이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노래하던 남 유다 백성들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지만, 북 이스라엘 사람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 유다 예루살렘으로 내려왔습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으 멸망시킨 직후 예루살렘과 주변 지역에 급격한 인구 증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북 이스라엘의 피난민들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을 세울 때부터 열 지파가 합세했지만,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에 내려가서 경배하려는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을 막기 위해 벧엘과 단에 제단을 세웠습니다. 레위인이 아닌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남 유다와 잦은 전쟁을 치뤘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남 유다보다 우세할 때가 많았지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결국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멸망했지만, 너무나 안타깝고 슬펐습니다. 북에서 내려온 동족들을 보면서 저들의 출발은 잘못됐지만, 저들이 하나님을 떠났지만, 저희들은 우리와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으시고 가나안에 심으신 (야생) 포도나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들 포도나무(노예국민)를 가져다가 이곳에 심어 참으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 참 포도나무를 삼으신 것입니다. 망해도 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없어져도 되는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주의 오른손, 즉 권능의 손으로 심으신 줄기였고,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 즉 아들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과 남 유다 백성들은 당시 남 유다로 내려온 북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예배드리면서 이 시를 지어 함께 노래하고 기도했습니다. 지난 세월 서로 갈등도 있고, 어려움도 있었고, 전쟁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 고난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역사서에 잘 드러나지 않는 모습을 본 시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의 공격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형제 국가의 아픔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간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나라를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민족이 하나가 되어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오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얼마나 도전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라고 하면서도,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정치적이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우리교회 안에는 남 왕국과 북 왕국이 나눠져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을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향해 손을 내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를 너무도 안타깝게 합니다. 사랑은 순종으로 이뤄집니다.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4-35).”


마지막 16-19절을 보면,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소망을 발견합니다.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17절).” 북 이스라엘 백성들과 남 유다 사람들은 나라의 멸망과 남 유다의 위기 가운데서 함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 중에 그들은 소망을 발견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지만, 그들이 받은 응답은 하나님의 나라가 주의 우편에 있는 자, 즉 ‘인자’로 인하여 다시 세워지는 것을 봅니다. 본문의 ‘주의 우편에 있는 자’와 ‘인자’가 누구를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이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진실로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응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깊이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지나온 시대를 곰곰히 돌아보았습니다. ‘그 가지가 바다(지중해)까지 뻗고 넝쿨이 강(유프라테스)까지 미쳤던(11절)’ 이스라엘, 그러나 늘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혹독한 시련과 훈련을 통해 다윗과 같은 시대를 맞았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고난 중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회복하실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자, 곧 메시야를 통해 이루실 놀라운 비전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 그 포도나무는 깨어지고 뽑혀지고 상처받은 후 다시 치유되고 회복되어 갔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인간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깨어지지 않으면 회복될 수 없습니다. 아픔이 없이 성숙될 수 없스비다. 고난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고통은 말씀 앞에 더 가까이 나가게 했고, 그런 과정들은 오늘날 말할 수 없을만큼 넓은 세상에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야생 포도나무는 하나님이 심으신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도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 사랑을 붙잡고 나갈 때 우리는 고난을 통해 변화됩니다. 원수가 서로 손을 잡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깨어짐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고난이 더 궁극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더라도 결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 앞에 나아갑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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