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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도 부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곳은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으며,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 그리고 아픈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 하늘 나라를 소망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의 부활 신앙이 그들의 삶을 역동적이고 강력하게 했습니다. 부활신앙이란 천국에 대한 구체적이고 강렬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보다 그곳에 더 큰 무게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국에 무게 중심을 두고 살면 이 땅에서의 삶을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활력과 생명력을 가지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절) 예수님 당시 사두개인들도 부활을 부인한 대표적인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친 로마적이었고, 대제사장직은 대부분 사두개파 사람들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유대교의 종교적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부유했으며 종교적 귀족층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실 부활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그들에게는 부활이 있어서는 안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부활이 있다는 말은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말이고, 심판이 있다는 말은 그들의 현재의 삶에 대해 주님 앞에서 평가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과 그 후의 심판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 이면에는 바르지 못한 삶의 모습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부활에 대해 여러 가지로 논증합니다. 첫 번째로 13절에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논리적으로 다시 이상합니다. 오히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죽은 자의 부활도 없을 것이다.’고 말해야 옳았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사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도 반드시 부활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되고, 너희의 믿음도 헛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알기 전에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사람이며(선민이라는 뜻), 베냐민 지파이고(왕족),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전통 유대인)이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이었고, 열심이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부활의 소망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는 그것을 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동안 누렸던 모든 것들보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훨씬 더 큰 소망임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부활이 없다면 자신이 전파하던 모든 것이 다 헛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 되지 않겠느냐?’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며 당신들의 믿음도 헛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이 헛된 것이 됩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부활이 없어도 상관 없습니까? 그냥 이렇게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함께 예배드리고 서로 교제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만족하십니까? 부활 때문에 내려 놓은 것이 너무 많아서, 만일 부활이 없으면 억울하고 헛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세 번째, 마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모두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우리는 거짓말 한 것이 되고, 위증죄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사기친 사람들입니다. 집단적인 사기죄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했으니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교회는 교회가 선포하는 것에 대해 세상 앞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믿으면 믿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전하고 그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해 전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처럼 그렇게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 땅의 모든 것을 내려놓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더더욱 책임적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전했습니까? 우리가 전하는 부활은 무엇입니까? 삶의 무게 중심을 이 땅이 아니라 천국에 두고 살아갑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의 체중을 줄이고, 천국에서의 삶의 무게 중심을 둠으로 훨씬 더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무엇을 주시려나 생각하고 기대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에 더 많은 무게를 싣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부활이 없어도 책임질 일이 별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교회는 세상 앞에 책임질만한 일을 별로 한 것이 없습니다. 헌신도 없었고, 수고도 없습니다. 사랑도 식었습니다. 오늘 교회는 헌신할 가치를 세상에 주지 못합니다. 목사인 저 자신도 그런 헌신을 요구하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목사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많은 면에서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부활의 소망과는 별로 상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네 번째로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17절)’고 하고, 또한 ‘만일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없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이 말은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여전히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고, 바돌로매는 피부를 다 벗겨진채 십자가에서 순교했고, 마태는 도끼로 참수를 당했으며, 빌립은 물매를 맞고 기둥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면 참으로 억울한 인생들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고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모진 고통과 어려움, 순교의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혹시 부활 없어도 상관 없는 삶을 살지 않습니까? 부활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내가 내어놓은 것도 별로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현주소가 아닌가요? 부활과 무관한 삶입니다. 부활이 굳이 필요 없는 삶입니다. 우리도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까? 부활은 곧 삶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인생이었고, 또 오늘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부활이 삶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삶의 이유이자, 삶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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