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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나귀 새끼(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명절입니다. 매년 유월절이 되면 그들은 원근각처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30km 이내에 사는 성인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유월절 잔치에 참여해야 하고, 이집트, 바벨론 등 동서사방에 퍼져 있는 사람들도 일생에 최소한 한 번은 예루살렘에 와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가지 못할 때 서로 이렇게 인사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그러나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또한 유월절에는 약 25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유월절에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유월절은 특별한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번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실까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았었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라는 존재는 매우 성가신 존재였고, 할 수 있다면 그의 존재를 아예 기억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습니다.

예상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타나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가 왕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매우 컸습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겉옷을 벗어 예수님께서 타고 있는 나귀의 등과 길에 펴고 환영했습니다. 250만명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고 있을 그 때 이 일은 그야말로 엄청난 장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두 그룹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 메시야가 나타나서 언제라도 새 세상을 만들기를 원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미 3년 간이나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이러저러한 기회에 최소한 한 두 번 이상 예수님을 만나기도 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멀리서 온 사람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정말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바로 유대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등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매우 불편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예루살렘 입성 행렬이 민중봉기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이 명절에는 예수를 처단하는 것은 더 큰 봉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결정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5일 후에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유대인들에 의해 체포되었고, 십자가 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예수를 재판하는 빌라도를 향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던 사람들로 변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다 도망가고,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었습니다. 빌라도도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종려주일에 예수님을 향해 환호하던 이 군중들의 찬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불과 닷새 후에 배신할 그들의 찬양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놀랍게도 주님은 그들의 찬양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보여주시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적어도 세 가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왕으로서 당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입니다. 둘째는 나귀를 타시고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입니다. 셋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순종하신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을 바로 어린 나귀였습니다. 나귀 새끼와 나귀 주인, 주님께서는 제자 둘을 건너편 마을로 보내서 매여있는 나귀과 나귀 새끼를 풀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면 즉시 보낼 것이다.’

이 말씀에 많은 질문들이 따라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는 누구인지, 그렇게 주인에게 먼저 말하지 않고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와도 되는 것인지, 주님께서는 그 주인과 미리 얘기가 되어 있는 것이었는지 등등 많은 질문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점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무엇을 봅니까?

나귀는 흔히 서양에서는 천한 짐승으로 여기지만, 동양에서는 고귀한 짐승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왕들은 전쟁 땐 말을 타지만, 평화시에는 나귀를 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이 어렵고 혼란스런 세상을 한 번 뒤업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를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군중들의 소망을 담아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면 예수님께 더 어울리는 것은 말을 타고 입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지금 어미 나귀도 아니고,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십니다. 이 나귀는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였습니다. 짐승을 부려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런 경우 짐승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연습이 있어야 합니다. 한 번에 잘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타는 사람도 불편하고, 태우는 나귀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것은 다분히 누가 보아도 이것은 왕으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은 타지는 않아도, 적어도 잘 훈련된 나귀를 타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만약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가다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탄 사람도 균형을 잡지 못하고 간다면 탄 사람의 권위가 실추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타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행렬이 어떨지 조금만 상상을 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나귀 새끼는 힘겹게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예루살렘 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조금 더 잘 준비되었더라면, 전에 짐을 몇 번만이라고 날라본 경험이 있는 나귀였다면, 얼마나 잘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훈련된 나귀를 타시지 않고, 전에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원하신 나귀는 탁월한 나귀가 아니라, 정결한 나귀였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것은 능력이 아니라, 거룩함이었습니다. 민수기 19장 2절에는 제사장이 하니님께 제사를 드릴 때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드리도록 명령했습니다. 신명기 21장 3절에서도 누군가가 사람을 죽였는데, 살인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할 때 이를 정결케 하기 위해 아직 부리우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은 힘 좋고 잘 훈련된 나귀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정결하고 흠이 없는 나귀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만일 누가 왜 나귀를 풀어 가느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탁월함보다는 정결함을 원하셨고, 능력보다는 거룩함을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나귀 새끼를 잘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보면서 나귀 새끼를 사용하신 주님의 마음을 읽지 못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읽는데 실패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나귀 새끼를 자신과 identify시키지 못합니다. 나귀 새끼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탁월함과 능력 이전에 정결함, 순전함과 거룩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사용하신 이유입니다. 어린 나귀는 타기에 불편했고, 짐을 나르는데도 익숙하지 않고, 사람을 태우는 일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런 나귀를 필요로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강력한 말을 원합니다. 천하를 호령한느 장군의 말을 되기를 기대합니다. 초라하고 힘없는 어린 나귀보다는 장군을 등에 업고 자기도 한 번 멋지게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걸어보고 싶은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기도합니다. ‘전쟁터를 누비는 용감한 말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린 나귀는 전혀 그리스도인의 삶에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참된 성도의 모습은 한 번도 짐을 져 본 적이 없지만,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여전히 전쟁터를 달리는 군마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더 낮아진다는 것이 그냥 현실을 체념하면서 살라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욕심을 버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의 비전의 허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비전이 비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대로 가면 그냥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 달려가는 것은 낭 떠러지를 향해 나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다윗 이후 1,000년의 세월동안 정치적, 종교적 중심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루살렘은 그들이 섬기던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의 자리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하고, 가장 극단적인 처형 방법인 십자가 형을 집행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세우고, 그 위에 몇 날 며칠을 달려있어야 죽는 그런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와 그 도시 안에 가장 강력한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종교인들은 지금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섬기던 그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십자가에 죽여버릴 힘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이스라엘은 불과 40년 후에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만큼 성전이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로 2,000년 동안 나라 없는 유랑민족으로 세상을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과 40년 후에 일어날 그들의 미래를 모른채 예수를 처형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그 일을 자행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믿는 믿음으로 자칭 전쟁터를 달리는 군마가 되어 무수한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죽이는데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미래를 더 행복하고 더 명예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점점 더 비참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까지 전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누구를 쓰신다는 말입니까?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 미숙하고 훈련되지 않은, 그리거 정결하고 온전하며 거룩한 나귀입니다. 더렵혀지지 않은 나귀입니다. 이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아!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해서 부르셨구나 라고 무릎을 치면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뜻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야 합니다. 나로서는 서툴고 어려운 자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설 때 비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와 우리성도님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런 위대한 일들을 이루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마치 어린 나귀와 같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는 면에서 언제나 어린 나귀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등에 앉으셔서 예루살렘을 향해 겸손한 메시야로서의 길을 걸어가실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은혜의 대열에 함께 하는 기쁨이 성도가 누릴 가장 큰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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