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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신비로운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천문학자들이 말하는 우주 이야기입니다. 들을 때는 좀 이해할 것 같은데, 돌아서면 이해가 안 됩니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우리 자신이 우주 안에 있으면서 우주의 크기, 우주의 모양을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마치 우주 밖에 있는 것처럼 우주를 보고 관측하는 기술과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은 매우 발달된 첨단 과학으로만 가능합니다.

옛날에는 지구가 편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튼날이 되면 태양은 다시 동쪽에서 뜹니다. 그것을 굳이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지구라고 하는 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태양의 뜨고 짐을 따라 사람들은 하루씩 살아갑니다. 이렇게 태양이 매일 동일한 방법으로 뜨고 짐으로 인간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패턴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우주 공간에 인공위성을 쏴 올리려고 할 때는 이렇게 단순한 우주이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더 깊은 과학지식의 바탕 위에 서 있을 때 인공위성을 쏴 올릴 수 있습니다.

이런 원리는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안식일을 잘 지키고, 정결례를 잘 준수하며, 일 주일에 이틀씩은 금식을 하는 것과 같은 일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도와 성경공부, 주일성수와 헌금생활, 주방봉사와 구역에의 참여 등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일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특별한 상황이 되면 이런 믿음과 삶의 패턴, 그리고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신앙적 가치체계로는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상황들을 맞게 됩니다. 특별한 고난이 온다든지,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겪을 때 이러한 신앙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답답해하고 어려워합니다. 정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라고 의아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그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바벨론 포로민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자이십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바로 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특별한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가지고 오랜 세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방 나라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와서 고난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자기들의 고난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외쳐보지만 하나님은 시원한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전능한 하나님 대 고난받은 하나님의 백성’,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등식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바벨론에만 포로로 살아간 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430년을 노예로 있었고, 에수님께서 오실 당시에도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주후 70년 이후에는 거의 2,000년 가까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방황하는 유랑민으로 살아야만 했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첫 번재 질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잊지 않았다. 내가 너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이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킬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한 사람을 기름 부어 세우시는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라는 사람을 세우신다고 말씀합니다. 더욱이 고레스가 그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 그가 가는 길, 즉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강대한 나라를 이루는 길에 하나님께서 먼저 가셔서 고레스의 길을 닦아놓겠다고 하십니다. 고레스가 가면 열국이 그 앞에서 항복하고, 무장을 해제하게 만들고, 성문을 열게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역사 속에서 말씀 그대로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큰 전쟁의 피를 흘리지 않고 많은 나라들을 정복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은 고레스를 위하여 보화와 재물을 줄 것이고, 그에게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을 것인데, 그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바벨론의 포로로 살아야만 하는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 바벨론 포로민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이 못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부르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면 이스라엘을 강국으로 만드셔서 이방 민족을 이기고, 쳐부수고 스스로 독립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해방입니다. 만약 또 다른 이방 민족이 와서 바벨론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해방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무슨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과 능력이라고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이스라엘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봐도 이런 일은 약육 강식의 원리에 의해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는 역사 이야기입니다.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역사적으로 본래 유화정책을 사용한 왕입니다. 그의 유화정책은 이스라엘에게만 사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각 나라의 문화를 존중했습니다. 각 나라로 하여금 자기 문화를 발전시키고 부흥케 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이것은 고도의 통치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의 흐름을 타고 해방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실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해방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라면 왜 이스라엘을 먼저 세우지 않으시는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역사입니다.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통한 이스라엘의 해방은 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궁색한 변명이 불과합니다. 여기서 포로민으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역사의 방법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에게 능력과 힘을 주셔서 바벨론을 당당히 쳐 부수고 예루살렘으로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도 빛이 나실테고, 이스라엘 민족들도 기분 좋게 해방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고민합니다. 하나님께 질문하고 항의하며 도전했습니다. 왜 폐르시아여야 하느냐고요. 이런 고민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왜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잘 사는데 나에게는 이런 고난이 있어야 하느냐고요?

이런 불만에 대해 주님께서는 9-13절에 대답하십니다. 이 대답은 토기장이와 진흙, 그리고 부모와 자식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데, 오늘은 지나가려고 합니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불평에 대해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라’고 대답하십니다.


오늘 강조해서 보려고 하는 본문은 5-8절입니다. 하나님은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게 하나님 자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5-6절).’ 하나님은 당신 자신만 신이라고 말씀합니다.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선포인지 아십니까?

이 말씀은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에 고대 근동 메소보다미아 지역에 둥지를 틀고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을 이끄는 고레스 왕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시 시대는 다신론적 신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 신들이 여러 시대와 상황, 지역에서 활동한다고 믿던 시대입니다. 농사를 위해서는 농사의 신이 필요했습니다. 비를 내리는 신이 있었고, 태양 신이 있었고, 달을 주관하는 신이 있었습니다. 비와 구름의 신이 있었고, 가뭄과 홍수를 주관하는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유일신의 개념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오직 한 분밖에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당시 세계 제국을 다스리는 고레스 왕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부터 그렇게 듣고 또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신개념으로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단호하게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해가 뜨는 곳에서든지 해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신이 없다(6절)’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7절).’ 이것은 당시 시대를 뒤흔들 수 있는 선언이었습니다.

만약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주관하고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시라면 그 신은 당시 다른 지역의 모든 신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지역시이나 혹은 부족신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바벨론을 이기고 페르시아를 넘어서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페르시아의 신과 싸우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다른 신을 대립 개념으로 놓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당신이 그 모든 세계의 통치자임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지역신으로, 부족신으로 끌고 내려 왔습니다. 그래서 저들과 대립개념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동일한 현상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내 원수를 갚아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원수는 지금 바로 자기 옆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족신이나 지역신이 아니라 아예 자신만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추락시켜 버립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그런 점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의 시대야말로 2,500년 전 바벨론, 페르시아의 신개념처럼 다신론적 배경을 가진 시대입니다. 오늘 시대를 흔히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라고 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이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해 주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신앙에 대해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그들이 믿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존중합니다. 그들이 그들의 신을 절대자라고 믿는다면 얼마든지 믿으라고 권면합니다. ‘참 좋은 신앙을 가졌군요! 축하합니다. 좋은 믿음을 계속 유지하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 위에 기쁘고 즐거운 인생을 사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을 권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사회와 시대를 이분화하고, 갈등을 야기시키는 매우 야만적이고 비평화적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의 시대는 다분히 2,500년 전의 다신론적 신개념의 문화와 정말 동일합니다.

과연 이점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점은 오늘 우리들과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은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과 흡사한 상황입니다. 교회는 더 이상 세상에 영향력을 주기 힘든 상황에 살아갑니다. 세상의 문화와 흐름 앞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들은 세상을 선과 악의 대립개념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본문에서 악의 대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도 일하시지만, 고레스를 통해서도 역사하셨습니다.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옆에 앉아 예배하는 그를 통해서도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개인적인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만을 알고 당신 한 사람만을 대하시듯이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씀입니다. 100% 맞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만 가지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긴 힘듭니다. 그것은 다신론적인 현대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그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의 신앙을 인정한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그렇게 열심히 믿어라. 그리고 복도 받어라. 잘 살길 바란다. 그러나 교회 밖으로 나와서 말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의 말에 수긍합니다. ‘그래! 이것은 우리들의 믿음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을께.’라고 합니다. 그리고 난 후 전혀 일관성있게 잡혀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선교를 위해 나간다고 할 때 우리는 준비되지 못한 채 충돌을 경험합니다.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의 양태는 이 시대의 가치체계에 맞춰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개인주의적인 믿음은 이 시대의 상황에 너무도 적절하게 맞는 스타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형편에 따라 그에게 합당한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는 면에서 개인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 개인에게 맞춘 하나님은 곧 우상에 가장 가까이 간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상이란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필요를 채우시기에 충분하신 분이시지만, 또한 그분은 원대한 그분 자신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우주를 통치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개인에게 맞춘 메시지들이 결국 시대의 필요를 따라 맞춘 메시지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당신 자신을 우주 창조자로, 우주적 통치자로 소개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으십니다. 우리만 잘 되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축복하지 못하는 모습에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은 나 개인의 하나님, 나 개인의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통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니님은 이스라엘이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임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안에 평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민하고 하나님을 향해 반항하는 마음의 깊은 곳에는 자기 중심성과 욕심, 탐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으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지역을 관장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지역신 혹은 수호신으로 끌어내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하나님 그분 자체로 만나십시오. 그분은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임하는 것을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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