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샬롯츠빌한인교회

주일설교

조회 수 4549 추천 수 39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70년 동안 포로민으로 살아갔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다니엘처럼 바벨론의 총리가 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 포로민들의 애환을 담은 시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울었다’고 고백합니다. 또 8절을 보면, ‘침략자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저지른 그대로 네게 앙갚음하는 자 복되도다.’(현대어 성경)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70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에 하나님의 응답이 얼마나 지체되었었는지 보여줍니다. ‘내가 오래 동안 고요히 하며 잠잠하여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은 그 오랜 세월을 아픔 중에 보냈는데, 하나님께서는 오래 동안 고요히 하며 잠잠하여 참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오랜 세월 포로민으로 살게 하셨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인들이 구원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사랑의 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를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그냥 구원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그 때를 기다리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기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이 빗나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믿긴 믿지만, 왠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기회가 되면 하나님을 설득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리 친하지 않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살아갑니다. 어떤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면 하나님께 한 발 더 가까이 나아가기보다는 알아채지 못할만큼 슬쩍 한 발 물러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간을 끄는데 명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왜 70년씩 이스라엘 민족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살게 하십니까?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60년이나 50년 혹은 40년이나 30년만 포로로 살게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이라면 왜 그들에게 이렇게 큰 고난이 있어야 합니까?

고난의 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를 생각해 봅니다.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맞고, 모든 죄인들이 구원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사랑의 동기도 맞지만, 본문의 맥락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입니다. 인간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합니다. 고난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더 겸손하게 합니다. 더 낮아지게 합니다. 심지어 인간은 고난 중에 더 평안을 누리기도 합니다.

낮아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낮아지고 나면 그 안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낮아지고 보면 그 속에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은혜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낮아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은연중에, 아주 지혜롭게 아닌 것처럼 하면서 그런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안은 그런 것조차 내려놓을 때 은혜를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복을 주시고 풍요하게 하시면 하나님을 더 잘 믿을 것 같고, 더 충성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적 풍요로움은 믿음의 위기를 가져올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들 중에 풍성한 삶을 살면서도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요셉도 그랬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그런 삶을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풍성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조차도 실은 상당한 고난의 과정을 거쳐 갔습니다. 이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풍성할 때 믿음을 지키기 어려웠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의 그 순수한 열정과 능력, 복음의 역사가 변질되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 때였다고 말합니다. 기독교가 카타콤과 같은 지하에서 지켜졌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기 삶이라는 것 자체를 어떤 면에서는 포기하고 살아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것은 기독교가 고난을 이기고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한 승리의 시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입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 사람들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진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었습니다. 죽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점점 더 확산되면서 교회가 조직화되고, 기구화되면서 외적인 힘이 생기고, 때로는 정치적인 영향력도 가지게 되지만, 그럴수록 복음을 위해 죽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그 때는 조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현상이 생깁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문제가 우상의 문제입니다. 17절에서 우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조각한 우상을 의뢰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가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를 싫어하고 우상을 섬깁니다. 본문은 우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말씀합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나무나 돌을 조각하여 만들고, 혹은 철을 부어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이사야에는 우상의 허상에 대해 계속해서 지적합니다. 이사야 40장 20절에는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는 모습을 비웃듯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그런데 사람들은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보다는 우상에게로 나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깁니다. 왜 그럴까요? 그 사람들이 머리가 나쁜 사람들일까요? 그들이 우상에게 아무런 힘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우상에게로 갈까요?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아무리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자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면서 여호와의 절기를 지킵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왜 그들이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요? 그들이 정말 무식한 사람들이었을까요?

우상을 섬기는 것과 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상은 내가 콘트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괜히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더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총명한 머리로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컨트롤하고 싶은 것입니다. 믿긴 믿지만 내 맘대로 믿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스타일, 내가 가진 목적을 성취하는 쪽으로 믿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믿긴 믿지만,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합니다. 시내산으로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그들이 원하는 때에 나타나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춤을 추며 경배합니다. 금송아지는 힘의 상징입니다. ‘꼭 송아지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려는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럴 정도로 어리석은 자들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송아지를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송아지를 보면 아마도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송아지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니 좋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송아지냐? 아니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을 스스로 컨트롤하고 싶은 욕망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이겠습니까? 그들이 원치 않으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금송아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이런 유혹을 받습니다. 우리의 삶의 도처에서,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우리는 내가 조정자 역할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들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우리교회는 누가 움직이냐? 누가 가장 힘을 발휘하느냐? 라는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누가 파워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입니다. 교회를 그렇게 보려고 하는 사람이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서면 반드시 그렇게 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그 아이디어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교회,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가정,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직장과 사업, 그것이 무엇인지 사실 모르거든요!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신앙의 역사가 오래 될수록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시도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다른 것을 조금씩 조금씩 섞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할 수 없을 것 같은 면에서는 다른 신을 수입해 와서 이방 신상을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산 위에 산당에 세웠지만, 점점 예루살렘 한 복판까지 내려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이방신을 함께 섬깁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가기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상의 극치에 다다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조정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했고, 콘트롤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70년을 포로민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만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다윗이 어릴 때 기름부음을 받고 사울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삼으시겠다는 사인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것을 몰랐겠지만, 다윗이 점점 더 백성들의 신임을 받는 것을 보면서 사울이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시기하고 죽이려고 시도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 왕궁을 나와서 도망을 다닙니다. 사울 왕은 끝까지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끝내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다윗은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 왕도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것은 당연한 노력입니다. 다윗은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대결을 봅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 다윗과 사울의 입장 속으로 들어가 보면 사울과 다윗은 다 나름대로 정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결은 의로움과 불의함의 대결이 아니라 의로움과 의로움의 대결입니다. 어떤 면에서 사울 왕도 피해자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사울 왕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무척이나 아파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아들 압살롬에게 아버지 다윗의 왕권에 도전을 합니다. 군사를 일으켜서 다윗의 군사와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도망을 갑니다. 이 부분에서 다윗이 왜 도망을 갔는지 성경은 상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도망을 가셔도 결국 다윗의 군사가 압살롬의 군사와 싸워서 이겼습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다윗의 군사력이 월등하게 컸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전략에 뛰어난 군사들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압살롬 정도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왕궁을 아들 압살롬에게 내어주고 그냥 도망자로 나갑니다.

여기서 다윗이 했을 수 있는 고민, 성경에 자세히 설명해 주지는 않지만, 다윗이 왕궁을 아들 압살롬에게 내어놓고 도망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윗은 이런 고민을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왕으로서의 다윗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이점을 그는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선왕이었던 사울도 자신이 끝까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사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버림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을 놓고 볼 때, 지금 자신과 아들을 보면 분명 자신이 옳은 것 같지만, 혹시 하나님이 왕으로서의 나의 권한을 여기서 멈추게 하셨다면, 내가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니 이 자리를 지키려고 해도 결국 내어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매우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불의함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다윗 왕은 왕궁을 비워 아들에게 주고 도망을 갑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갑니다. 하나님께서 혹시 자신에게 긍휼을 베푸시면 다시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도망가다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 상황의 심판자로 모십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그 심판대 앞에 서고 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는 길은 왕궁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왕궁을 떠나서 다시 젊었을 때 광야를 헤매던 때처럼 내려 앉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믿음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쉬울 때만 찾아가서 우리의 필요만을 요구하는 신상(우상)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시며, 주인이시니다. 영원히 경배받으실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영원히 평안과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약속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관계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을 오용합니다. 하나님을 한낮 나무로 만들어 들판에 세워놓은 우상쯤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본문 10-12절을 보십시오. 천지 만물을 부르면서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고 명령합니다. 주변에 있는 족속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고 선포합니다. 찬양이 무엇입니까? 찬양은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고백입니다. 마치 우상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내 의지대로, 내 맘대로 섬기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주권 앞에 무릎 꿇고 온전히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보다 크신 하나님, 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나의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조정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비신앙적인 행위입니다. 부부 간에 서로를 조정하려는 태도, 성도 간에 서로를 조정하려는 의도, 직장과 비즈니스 현장에서 서로를 자기의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조정하려는 의도는 모두 잘못된 것이며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런 의도로 이용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다윗 자신을 구하실 때까지 자신을 광야에 던져버리는 다윗의 모습이 바로 참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거기에 다윗의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 믿음으로 살 결단이 없이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것이 곧 생명의 길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668 우리의 신실하신 주님(빌1:6) 2008. 10. 26 주일예배(김익준전도사)
667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2-20) 2008. 11. 2 주일예배
666 부득불 할 일(고전9:13-18) 2008. 11. 9 주일예배
665 말 못하는 우상(고전 12:1-11) 2008. 11. 16 주일예배
664 감사를 표현하자(살전5:18) 2008. 11. 23 주일예배(박진석목사)
663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3-24) 2008. 11. 30 주일예배
662 질그릇에 담은 보배(고후4:1-12) 2008. 12. 7 주일예배
66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7:8-16) 2008. 12. 14 주일예배
660 친히 주신 징조 - 임마누엘(사7:1-17) 2008. 12. 21 성탄주일예배
659 그리스도의 일꾼(고후11:22-33) 2008. 12. 28 주일예배
658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출20:1-17) 2009. 1. 4 주일예배
657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님(막3:7-19) 2009. 1. 11 주일예배
656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5:35-6:6) 2009. 1. 18 주일예배
655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막7:31-8:10) 2009. 1. 25 주일예배
654 태초부터 주신 규범(막10:1-16) 2009. 2. 1 주일예배
653 하나님을 믿으라(막11:20-33) 2009. 2. 8 주일예배
652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막13:14-27) 2009. 2. 15 주일예배
651 베드로의 고백(막14:66-72) 2009. 2. 22 주일예배
650 너희 하나님을 보라(사40:1-11) 2009. 3. 1 주일예배
» 새 노래로 노래하자(사42:10-17) 2009. 3. 8 주일예배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41 Next
/ 4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