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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무시 당히는 주제가 있다면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여겨집니다. 주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실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 없어 오시기를 주저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본문 26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마치 동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본문에서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에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올 것인데, 사람들이 그 분의 오심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약속의 말씀은 이곳에만 있지 않습니다. 다니엘 7:13-14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사도행전 1장 9, 11절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8절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성도 여러분! 성도님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까? 주님께서 오실 것을 믿는 것 뿐만 아니라 오시기를 기다리십니까? 사모하십니까?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면서 사는 것을 종말신앙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종말신앙은 교회에서 언급하기 어려운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거짓 예언의 영향이었습니다. 사실 주님의 재림은 계속 지연되고 있는 느낌을 줍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면 주님은 이렇게 2,000년이 넘도록 재림을 지체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게끔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언제나 다급하게 느끼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은 오늘까지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성도들은 고난의 때마다 주님의 재림을 잘 견디며 기다려왔습니다. 언젠가 오실 그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주님의 긴박한 종말 약속으로 인해 그들은 믿음으르 지켰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20C 말엽에 갑자기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한국와 세계교회를 휩쓸었습니다. 그들은 2,000년이 넘기 전에 예수께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그들의 재산을 취하였고, 곤경과 어려움에 빠뜨렸습니다. 하지만 2,000년이 넘어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고, 여전히 오늘까지도 세상은 조금 위험해 보이긴 해도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더 이상 종말에 대한 외침이 너무도 어리석은 말씀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수준 낮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인양 취급되어 버렸습니다. 주님의 재림보다는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더 성숙해져야 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삶의 성숙과 주님 오심에 대한 소망과 기대는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종말신앙에 대해 쉽게 언급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오늘의 시대가 정말 종말이 올 것 같은 느낌 때문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오늘날 세상을 보면 언제 이 세상이 끝날지 모르는 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언제 생명의 위협을 주는 곤경이 우리에게 다가올지 두려움에 싸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갑니다. 911 사태에서 남편을 잃은 부인이 이번에는 버팔로로 향하던 비행기의 추락사고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종말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마치 그런 뜻하지 않은 운명이 언제 나 자신에게 닥쳐올지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겉으로 애써 외면할 뿐입니다. 온 세계가 핵무기 경쟁의 장으로 변해하고 있고, 더 이상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경찰국가로서의 위상이 약해져 가면서 세계는 언제 어떤 상황을 맞게 될지 모르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모르게 듣고 보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은 단지 특별한 질병이 없는 한 어느 정도의 수명을 보장받고 살아가던 옛날과는 확연히 다른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류의 종말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말 종말이 올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가능한 삶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살아갑니다. 어떤 어려움과 곤경을 만나도 극복할 수 있는 안전책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어려울수록 더 열심히 살려고 하고 있고, 언젠가는 나에게도 좋은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경제한파로 직장을 잃고 깊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가족들과 함께 목숨을 포기하는 상황을 보면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합니다. ‘잘 될 거야.’ ‘지금은 어렵지만, 곧 희망이 보일거야.’ ‘조금만 참아. 그러면 곧 회복의 날이 있을거야.’ 교회도 동일하게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합니다. 하지만 성경도 그렇게 말씀할까요?


마가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오는 상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매우 매우 호화로운 모습으로 지어졌습니다. 당시 로마로부터 위임받아 팔레스틴을 통치하던 헤롯대왕이 유대인들을 잘 다스리려는 목적으로 그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 성전을 짓기 시작했었습니다. 무려 82년 동안이나 계속 지어진 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황금과 흰대리석으로 외관이 치장되어 있었습니다. 황금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멀만큼 눈부셨고, 흰대리석은 멀리서 볼 때 마치 눈이 쌓인 것으로 착각할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제자들은 그 성전의 모습에 완전히 심취되었습니다. 성전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그들의 마음을 압도했습니다. 바로 그 성전 안에서 자기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 성전의 권세자들과의 논쟁에서 번번이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놀라운 능력을 발하시면 예루살렘 성전을 접수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말합니다. ‘선생님, 저것 좀 보세요. 저 돌이며 건물이며 얼마나 웅장하고 볼만합니까(1)?’

그러나 주님은 그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영화롭고 찬란하고 아름다운 성전, 그 안에서 권세를 누리는 종교인들의 허세, 누구도 감히 넘어뜨리지 못하고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그들의 권력, 바로 그 성전의 멸망에 대해 말씀합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리라(2).’ 주전 19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63년까지 계속 지어졌고, 그로부터 불과 7년 후인, 주후 70년에 로마의 Titus 장군에 의해 군인들이 금을 캐기 위해 성전을 모두 산산조각내는 일로 성전은 지금 통곡의 벽으로 알려진 한 모퉁이만 남겨놓은채 모든 자취를 와전히 없애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인류의 종말에 대해 나란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경계선을 뚜렷이 구분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2,000년 전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두 가지 사건 모두 미래에 있을 사건이기 때문에 동일한 관점에서 제자들로 하여금 준비하도록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본 우리들은 이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14절부터 20절까지는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 대해 말씀합니다. 14절을 보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일은 이미 주전 168년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수리아를 통치할 때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그곳에 돼지를 제물로 바친 사건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일로 유대인들은 마카비 혁명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상당기간 유대인은 자기 나라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예루살렘 성전에 서지 못할 것이 선 것을 보거든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씀합니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 말 것이며,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 말고,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들에게 미칠 예루살렘 멸망이 얼마나 위급하게 닥칠 것인지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보통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고대 시대에 성이란 본래 백성들을 지켜주고, 군인들이 싸우는 진지역할을 했습니다. 다른 땅을 다 빼앗겨도 성을 잃지 않으면 잃은 것이 아니고, 공격하는 나라도 성을 빼앗지 않으면 땅을 빼앗은 것이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예루살렘에 닥칠 환란을 대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라 하시지 않고 오히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더욱이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예루살렘은 이제 운명을 다했다는 징조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거하던 사람들 중에 예수를 믿던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언을 말씀을 믿고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시점에서 모두가 데가볼리 지역의 펠라(Pella)라는 지역으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지켜주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다시 선포됩니다. 본문의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종말에 대해 말씀합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기가 죽어 압도되는 상황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권세와 화려함을 부러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선포했고, 그 말씀을 전파하고 들은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말씀대로 그 위기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 시대에 이 말씀은 다시 선포됩니다. 종말에 대해 본문은 다시 말씀합니다. 그 때가 되면 나타날 징조로 적어도 본문에서는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가 나타날 것과 천재지변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부요캐 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줄지도 모릅니다. 산을 옮기고 죽은 자를 살리며 병든 자를 살립니다.

그들은 아마도 물질적인 축복과 영광스런 미래를 약속할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잘 될 거야. 조금만 기다려봐’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종말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들의 메세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이 갈 것 같습니다. 모두가 불안한 세대를 살아갑니다. 모두가 어렵게 살아갑니다. 모두가 불투명한 미래를 살아갑니다.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사실 아닙니다. 그렇게 잘 될 거라고 하는 말만 한다고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래도 그것만이라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사로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로 발걸음을 하면서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옵니다. 주님은 우리의 위로자되십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허황된 것으로 위로하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분명 주님께서 위로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입이 벌어지고,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어찌할바를 모르는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곧 저런 영광을 누리게 될거야. 걱정하지마. 너희들은 저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영광을 누릴 거야.’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광은 예루살렘 성전보다도 훨씬 더 화려하고 찬란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영광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왜 예수를 믿겠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1절부터 봐야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제 새벽에 보았던 앞의 구절들을 보면 주님은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고난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 고난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 때 나타나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생명을 주는 고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히려 우리들에게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6-18).”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누리는 화려함은 곧 멸망하고 사라질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놀라운 상급이 있을 것을 약속합니다. 여기서부터 기독교 윤리도 나오고, 헌신도 가능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우리에게 종말이 있을 것에 대한 매우 중요한 예표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그 화려함, 도무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그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것이란 주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이어지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를 말씀해 줍니다.

주님은 또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면서 또한 당신이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감에 있어서 무엇에 힘써야 할까요? 우리 인생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초토화되고 멸망한 것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도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줍니다. 믿고 안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이제까지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세계가 겪는 경제적 위기도 전문가들은 예측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이런 류의 경제 위기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의 종말을 어떻게 세상이 알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인류의 종말을 믿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곧 오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어 있어 기도함으로 경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언제나 나에게 저런 영광을 주려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광은 천국에서 주어집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주님 안에서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너무도 쉽게 너무도 빨리 그 영광을 얻으려고 급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유로와지십시오. 조금 더 기다림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충분히 고난을 받을 자세를 가지십시오. 많은 믿음의 선조들도 이미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종말에 대한 말씀이 없을 때조차도 종말적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종말적 신앙, 주님 오심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천국에서 누릴 그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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