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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는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싶어 다가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이 때는 무화가 나무의 열매가 맺지 않는 때였다고 마가복음 기자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때가 무화과 나무의 열매가 맺지 않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자 그 나무를 향해 저주를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이렇게 하시는 말씀을 제자들이 뒤에서 다 들었습니다.

주님은 성전으로 들어가셨다가 성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하루 밤을 성 밖에서 지내시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전날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나무는 말라 있었습니다. 뿌리로부터 말라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도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말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베드로는 마치 신기하듯이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비상하고 신비로운 힘은 여전히 닳지 않고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의 운명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지금 뿌리로부터 마른 무화과 나무처럼 그 운명이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힘과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곧 말라 시들어지고, 뿌리까지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와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였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것은 이스라엘의 운명이 다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힘은 외적으로 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권력은 매우 탄탄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이유로 어떤 일들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구약으로부터 내려오는 율법을 나름대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당시의 종교적 타락과 악함을 개혁해 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그들은 이단으로 판정되고, 얼마 안 있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세례 요한조차도 분봉왕 헤롯에 의해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이제 예수라는 한 청년이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고 있습니다. 자칫 예수라는 청년을 잘못 건드림으로 백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필요 이상의 불란을 맞게 될 것을 잘 알던 종교지도자들은 다소 조심스럽게 예수를 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도 역시 로마 정권을 등에 업은 종교 세력 앞에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들의 생각대로 예수는 그들의 손에 잡혀 십자가에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열 두 명의 핵심 제자들 중에 배신자가 생겼고, 그런 제자 그룹의 분열은 곧 바로 예수라는 청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분명하게 결론 난 사건을 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결국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예루살렘과 그 안에 있는 성전은 불과 40년 후에 로마의 Titus 장군에 의해 산산히 조각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삶의 자리로 들어가 본다면 그 상황 안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었을까요? 자신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멀리서 볼 대는 그나마 나와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시대를 분별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 자기 시대에 살면서 자기 시대를 분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는 쉬워도 자신을 판단하기는 어렵고, 다른 그룹을 판단하기는 쉬워도 내가 속한 그룹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을 계속 보면서 우리는 세 그룹의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또 한 그룹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귀족층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 그룹들 중에 어느 그룹에 속한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이 무화과 나무는 예루살렘의 종교적 귀족층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그들은 결국 40년 후에 처참하게 멸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적 귀족층만 타락하고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가룟 유다는 실패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무리들도 예수님을 향해 종려가지 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고 찬양했지만, 그들도 며칠 안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자리에 섰었습니다.

저는 본문에 무화과 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보면서 그것이 오늘날 무엇을 상징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생명 없는 나무의 모습입니다. 뿌리로부터 나오는 진액이 다하고 더 이상 어떤 생명의 힘도 공급되지 않습니다. 몸집은 커질대로 커졌는데, 이를 지탱할 진액이 공급되지 않습니다.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경고로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힘이 있습니다. 여전히 지금은 교회가 자라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교회는 미국 어느 지역을 가봐도 가장 유력한 한인 공동체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뿌리가 썩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겨우 붙들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유대 종교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27절 이하에서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걸어다니고 계실 때 성전의 대표자들이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교적 젊잖게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권세를 주었느뇨.’ 그들은 지금 재판관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그런데 그 말에 이들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습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를 몰랐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라고 하면 틀림없이 ‘그러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물을 것이고, 만일 사람에게로서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기 때문에 백성들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이 지금 예루살렘에서 평생 종교적 가르침과 제사를 집행하는 유대인 종교인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입니다.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판단하고 백성의 믿음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ㄴ느 자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에 그들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영적 무지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들은 정작 반드시 필요한 답을 가지고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성도 여러분! 당시 유대교의 종교인들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매우 헌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삶을 바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이 하나 결정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묵상입니다. 그들은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제가 성도님들께 여쭤보겠습니다. 속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갑니까? 아마도 여러 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묻습니다. 정말입니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여러분 인생의 목적입니까?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습니까?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워졌습니까? 정말입니까?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광의 기로에 서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니 고민하고 있다면 그래도 다행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내가 잘 되기 위해 그냥 달려갈 뿐입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이 하나님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달려갑니다. 어떻게 내가 잘 되는 것이 하나님 잘 되는 것일까요? 어떻게 내가 안되면 하나님 손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은 아닙니다. 대개는 인간이 영광을 구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집니다.


22-26절을 보면, 무화과 나무가 말랐다고 말하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몇 가지 매우 중요한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는 무책임하고 생명을 잃어버린 유대 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생명이 무엇인지,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는, 믿음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22절에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습니다. 그냥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누구를 믿든지, 아니면 무엇인가를 믿는 것입니다. 그냥 믿는 것은 자기 확신입니다. 자기 확신은 스스로 ‘잘 될 수 있다. 잘 될꺼야.’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며, 믿음의 근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의 원리나 철학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하시는 인격자로서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고,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무리들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기 때문에 백성을 무서워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디 있습니까?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의 삶과 고백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이용한 것이고, 도구였을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십니까?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모든 구석구석에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이유가 되시고 목적이 되십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믿음은 단지 입으로의 고백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 믿음이 있는지 다시 살펴볼 일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주님은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구체적인 삶의 표현입니다. ‘받을 줄로 믿으라’는 것은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말은 어떤 상황에서 던져진 말씀일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은 이제 며칠 안 있어 십자가의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 한 가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죽은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님은 다시 살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죽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고통스럽게 죽지만, 다시 살 것을 아셨고, 또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무기력하게 자신을 성부 하나님께 위탁하고 십자가에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셨다고 해서 십자가의 죽음이 안락사를 하듯이 쉽게 죽은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당시 가장 참혹한 죽음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산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예수께서 그 길을 갈 수 있기 위해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이요 의지였습니다. 그가 의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난다고 한 성부 하나님의 약속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4절).’ 또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23).’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믿고 구한 것은 그대로 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전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직 안받았어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고 가라는 것입니다. 눈에 당장 드러나지 않아도 그대로 믿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의 기도를 그대로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왜 기복적으로 빠질까요? 왜 이 땅에 번영신학이라는 것이 나옵니까? 왜 십자가 없는 영광을 외치고 있나요? 이 모든 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신뢰, 즉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네가 믿고 구한 것은 다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을 믿고 고난을 향해 나갈 믿음이 없기 때문에 당장의 축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고난 없는 영광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쉽게 가는 영광의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주를 위해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8:34-35).’

예루살렘의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심을,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지 이미 3년이나 된 세례 요한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실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믿습니까? 믿는데 왜 두려워하나요? 믿는데 왜 당장 주지 않으면 불안해 합니까? 당장 내 손에 쥐어져야 안심한다는 것은 신뢰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믿으면 상대방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고난의 발걸음을 옮기지만 다시 살 것을 믿으며 당당히 그 길을 걷습니다. 비록 고통으로 신음하며 처절하게 울부짖을지는 몰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거나 뒤돌아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발걸음을 계속하여 나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용서에 대해 말씀합니다. 용서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기를 즐겨하십니다. 용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매우 중요한 전제 조건입니다. 25절을 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문제가 있다면 먼저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라고 말씀합니다. 기도의 장애물은 믿음의 부족이 아니라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기도의 장애물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임금에게 용서를 빌면서 탕감해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임금이 그의 간청이 하도 간절해서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탕감받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서 그것을 갚으라고 요구하면서, 갚지 못하는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그를 다시 잡아 와서 빚을 다 갚도록 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용서에 대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 모든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이기 이전에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빚을 용서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당시 제사장 그룹들은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종교적 굴레로 사정없이 그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들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고도 일백 데나리온을 받기 위해 그야말로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온갖 사슬로 얽어매는 일들을 자행했습니다.

성도는 용서의 삶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는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는 용서 안 할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할 자유와 의무만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진정으로 용서할 때만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그 은혜가 유효합니다. 주기도문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말씀은 조금도 애누리 없이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를 용서받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입니다. 우리는 용서 안 할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뿌리까지 썩어진 무화과 나무를 보면서 이스라엘의 운명을 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성경 속의 무화과 나무는 2,000년 전의 이스라엘의 운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바로 우리들의 영적 운명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그 때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영적 상태와 결코 멀지 않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적어도 세 가지의 권면을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과 믿음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까? 우리 인생의 답은 하나님 바로 그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현세적인 삶의 축복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 기복신앙으로 빠지는 길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용서에 대한 교훈입니다. 기도의 장애물은 믿음의 부족이기 전에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용서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용서받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입니다. 뿌리채 말라버린 유대인들의 삶이 아닌, 진정한 교회의 회복과 생명력을 회복하는 교회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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