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로 시작합니다. 복음은 구원에 관한 복된 소식을 말합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주님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하여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진짜 사람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선포는 참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놀라운 선포입니다. 천둥 번개가 치고 옆에 있던 큰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며 신적 존재를 경험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동일한 모습으로 오신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예수님에 대해 두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로서 더 크고 더 많은 증거들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늘 너무 적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인간적인 한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한정시켰습니다.
제자들은 얼마 전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먹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동일한 상황에서 그들은 주님을 향해 이전과 같은 더 큰 기대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어떻게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하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또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신은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논리적 모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말씀(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신비이며 기적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그 분이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사실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무리들이 사흘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굶주리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던 제일 첫 번째 요인은 바로 그 분의 사랑이었습니다. 즉 사랑이 기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기적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다른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두 번 기도하셨다는 점입니다. 한 번은 떡 7개를 위해서, 또 한 번은 물고기 두 어 마리를 위해서였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고기는 감췄을런지도 모릅니다. 굳이 그것까지 내놓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 번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내 놓지 않은 떡과 고기를 무리들을 먹일 수 있도록 기적이 행해질 수 없습니다. 무리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먹을 것을 주님께 내놓을 수 없었고, 또한 기적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능성과 당위성에 있어서 늘 고민을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마땅한 당위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라고 질문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당위성이 가능성의 벽을 뚫고 넘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메세지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가능성의 벽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고 그 안에서 우리 삶의 목적을 찾고, 부르심의 목적을 확인할 때 우리는 가능성이 없는 한계 상황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무리를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 그 분의 사랑은 그들을 위해 먹을 것을 줘야겠다고 생각하게 하셨고, 그 주님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일하실까요? 그 분은 바로 오늘도 동일하게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교회의 건축을 하면서, 혹은 학생이 진로를 고민하면서, 혹은 교회를 섬기면서 우리는 자주 ‘내가 저 일을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저 일 하는 것을 원하시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 일 하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가능성의 장벽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사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 선포는 참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놀라운 선포입니다. 천둥 번개가 치고 옆에 있던 큰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며 신적 존재를 경험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동일한 모습으로 오신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예수님에 대해 두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로서 더 크고 더 많은 증거들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늘 너무 적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인간적인 한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한정시켰습니다.
제자들은 얼마 전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먹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동일한 상황에서 그들은 주님을 향해 이전과 같은 더 큰 기대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어떻게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하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또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신은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논리적 모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말씀(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신비이며 기적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그 분이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사실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무리들이 사흘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굶주리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던 제일 첫 번째 요인은 바로 그 분의 사랑이었습니다. 즉 사랑이 기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기적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다른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두 번 기도하셨다는 점입니다. 한 번은 떡 7개를 위해서, 또 한 번은 물고기 두 어 마리를 위해서였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고기는 감췄을런지도 모릅니다. 굳이 그것까지 내놓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 번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내 놓지 않은 떡과 고기를 무리들을 먹일 수 있도록 기적이 행해질 수 없습니다. 무리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먹을 것을 주님께 내놓을 수 없었고, 또한 기적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능성과 당위성에 있어서 늘 고민을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마땅한 당위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라고 질문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당위성이 가능성의 벽을 뚫고 넘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메세지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가능성의 벽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고 그 안에서 우리 삶의 목적을 찾고, 부르심의 목적을 확인할 때 우리는 가능성이 없는 한계 상황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무리를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 그 분의 사랑은 그들을 위해 먹을 것을 줘야겠다고 생각하게 하셨고, 그 주님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일하실까요? 그 분은 바로 오늘도 동일하게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교회의 건축을 하면서, 혹은 학생이 진로를 고민하면서, 혹은 교회를 섬기면서 우리는 자주 ‘내가 저 일을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저 일 하는 것을 원하시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 일 하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가능성의 장벽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사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