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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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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으로 설교를 한 지가 3년 째 접어들었습니다. 생명의 삶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저 자신과 교회에 큰 은혜를 주고 있습니다. 비교적 빠른 속도로 본문을 보면서, 어느 한 본문에 지나치게 오래 매여있지 않게 해서 성경의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설교하기 참 힘든 본문을 만난 때는 여간 당혹스럽지 않습니다. 피해가고 싶고, 내가 원하는 본문으로 설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일들이 무엇보다도 목사 자신을 성장하게 하는 큰 동력이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생명의 삶은 두란노라는 기독교 출판사의 편집자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생명의 삶을 편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사역이지만, 그 일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들 중에는 신학 훈련을 받은 목회자들도 있고, 편집 전문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그들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편집 방향이나 편집 스타일이 제 생각과 맞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느 성도님과 이런 부분에 대해 나누기도 했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과 같은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은 앞 단락 5장의 끝부분을 짤랐고, 6장의 앞 부분을 짤라서 하나로 묶어서 주일 묵상 본문으로 편집했습니다. 사실 앞 부분은 그 앞부분과 하나로 묶이는 것이 좋고, 뒷 부분은 그 다음 부분과 묶이는 것이 문맥상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의도가 아마도 날짜를 맞추기 위한 것인가 생각하면서 때로는 제 마음으로는 지극히 ‘상업적’이라고 정죄한 적도 있었습니다. 너무 억지라는 것이죠.

그런데 생명의 삶으로 묵상을 하고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면서 제 마음에 계속 들어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의 순서를 따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순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금방 마음의 부담과 거부반응이 드는 분들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설교를 하면서 제가 생명의 삶의 본문을 따라 설교하는 동안은 가능한 그 본문에 나를 구속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 한계 안에 나를 가두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따라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실 것을 믿고, 또 그렇게 기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삶 편집자를 통해 일하시기를 기도하고, 또 그것이 순종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순종으로 저 자신을 제한하려는 마음과 의지를 갖습니다.

저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저도 판단할 능력이 있습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본문을 정해서 설교할 수 있습니다. 좀 더 합리적이고 좀 더 타당한 본문의 범위를 정해서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닌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제 토요일 새벽예배에서 앞의 본문으로 짧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본문은 오늘 본 5장 끝까지 이어지는 본문이고, 그 본문으로 전에 말씀을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본문을 중간에 딱 잘라놓으니 처음에는 설교를 준비하기가 답답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묵상하면서 그 안에서 보려고 하자, 그 안에 전에 보지 못했던 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계가 더 깊은 것을 보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당신을 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를 알고, 형제와 자매, 그리고 그가 하던 직업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5절에 말씀하기를 예수께서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고향사람들의 불신앙에 의해 제한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야 됨을 증명하기 위해 기적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유혹합니다. 이러한 시험의 전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입증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시험을 거절하셨습니다. 주님은 기꺼이 사람들의 거절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런 원리는 우리의 삶 대부분의 영역에서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한정된 한계 상황에서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 속에서 그 한계를 극복하면서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고 고백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리고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귀족들이 갇히는 감옥에서 죄수로 그들을 섬기며 30세까지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 그러한 제한된 삶의 영역에서 그는 오히려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의 배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가정의 살림을 경영하는 법을 배우고, 애굽의 정치범들을 통해 애굽 정치의 음모와 배반, 정치적 모략, 더 나아가서는 애굽의 나라 살림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면서 10년 이상의 야전생활을 통해 전쟁을 배우고 이스라엘과 주변 민족들의 지형을 익히고, 드디어 이스라엘의 가장 탁월한 왕으서의 수업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은 매일 예루살렘을 향해 문을 열고 기도했고, 정적들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기도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정적을 이기는 승리를 거뒀습니다.

오늘 교회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제한시키는데 관심이 많이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나의 목적을 이루는데 더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구속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야이로는 딸의 죽음을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리를 옆에서 같이 들으시고는 곧 바로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그에게 주는 또 하나의 option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가 선택하여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 외에 또 하나의 옵션을 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말씀으로 야이로가 우는 것도, 절망하는 것도, 장의사를 찾아가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야이로는 지금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선택 중 하나가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의 결단만이 남아있도록 그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또 하나의 선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결단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예수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경멸의 의미가 담긴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그에게 4명의 남동생들과 몇 명의 여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요셉의 뒤를 이어 목수의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오늘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개인적인 삶이 어떠했는지 매우 구체적인 정보들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 지식이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 지식으로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의 지식은 주님의 구원자 되심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주님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본문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가리켜서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을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비웃었습니다. 죽은 것도 사실이고, 다시 살아난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살아날 것을 의미해서 잠 잔다고 하셨고, 또한 종말적인 입장에서 모든 믿는 자의 죽음은 잠 자는 것과 같이 표현한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죽음은 곧 잠 자는 것과 같다는 표현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삶과 죽음에 대한 고백조차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넘어서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우리에게는 예기치 않은 위기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조건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말씀 안에 우리 자신을 구속하고 제한할 것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 좁은 공간, 좁은 선택 안에 자신을 가둘 때, 주님의 말씀의 한계 안에 자신을 순종시킬 때 주님은 그 안에서 우리를 위한 새로운 생명의 길을 보여주신다는 약속이 이 안에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참 놀라운 은혜가 무한히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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