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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 개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물론 성경에 십계명이라는 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흔히 십계명이라 불리는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 배경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동안 노예로 살았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노예생활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그들은 노예로 길들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예생활로 길들여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바로의 억센 손에서 구하셨고, 홍해라고 하는 죽음의 바다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란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곳으로, 얼마 후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애굽과 광야, 그리고 가나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신앙 여정을 보여주는 좋은 그림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낼 때마다 수없이 사용하는 표현은 바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1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애굽에서 나올 때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월로 삼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월 10일에 출애굽을 준비합니다. 어린 양을 준비했다가 정월 14일에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인방에 바르고, 유월절을 통해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 집을 건너가게 합니다. 그리고 무교병, 즉 누룩 없는 떡을 준비해서 애굽을 나옵니다. 이 무교병은 7일 동안, 즉 21일까지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칠일 간은 아마도 그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기간, 즉 홍해를 건너는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혹은 시내산)으로 인도를 받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본문의 말씀, 즉 십계명을 비롯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습니다. 이 때가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계산해서 세 번째 달이 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때는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불과 두 달이 조금 더 되었을 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전혀 없습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었습니다. 홍해 앞에서 애굽 군사들의 추격으로 두려워하고 ‘우리를 여기서 죽게 하느냐?’라고 모세를 향해 소리치기도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까지 오도록, 즉 애굽에서 나오도록 그들 스스로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구원은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바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습니다. 십계명은 그들이 앞으로 광야에서 그리고 가나안에서 살아갈 삶의 방향과 목적, 그리고 원리, 사명, 그리고 그 결과까지 일러주는 총체적인 명령과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은 그것 말고도 많이 있지만, 십계명은 그 많은 명령들 중에 가장 골격이 되는 것이며 원리이기도 합니다. 이제 그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광야를 살아가게 됩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광야를 살아가는 수단이 될 것이며, 그들이 가야할 목적을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들이 지금 이 광야에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불과 지난 두 달 동안 일어났던 애굽에서의 탈출, 430년 동안 머물면서 당했던 고난과 아픔들로부터 구원받은 은혜와 앞으로의 방향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이제 십계명이 놓여있는 위치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구원의 과정이 불과 두 달 안에 끝난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 그것은 사실 무교병을 먹는 칠 일 간에 끝난 사건입니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불과 일 주일, 혹은 두 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그들에게 광야와 가나안에서 살아갈 삶의 법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법칙들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구원이라는 것은 사실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부터 하나님께서 직접 구속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꼈습니다. 이것은 신분의 엄청난 변화였고, 실제적으로 그들의 삶의 상황은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것을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구원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흔히 구원을 세 가지 차원으로 이해합니다. 즉 구원은 세 가지 종류로 이해할 수 있는데, 첫째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시고 인쳐주시는 칭의가 있고, 둘째는 우리의 삶을 계속적으로 변화시켜 가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시는 성화의 단계가 있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며 살아갈 영화의 단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구원받는 것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 볼 때 칭의는 불과 일주일 혹은 두 달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애굽의 노예 신분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종교개혁 이전의 캐톨릭은 이 칭의의 구원을 위해서 삶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애굽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될 수는 없습니다. 설령 그들이 변화된다고 해도 그들의 삶의 변화로 인해 그들이 애굽의 엄청난 힘으로부터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10가지 재앙, 홍해 도하)으로 인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의 역사와 은혜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 홍해를 건너게 하시는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엄청난 구속의 은혜를 맛보고 누리고 감사할 마음의 풍요함을 누릴 기회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종교개혁을 한 기독교는 잘 출발했지만 그 후 다시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홍해를 건너게 한 그 놀라운 사건, 하지만 불과 두 달만에 이루어진 그 구원의 사건만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신속하게 그들을 애굽과 홍해에서 구원하시자 마자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바로 십계명과 하나님의 말씀들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준비시키셨는데, 오늘날 기독교는 애굽에서의 구원과 홍해를 건너게 하신 그 은혜로 우리는 이미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기억하면 마치 가나안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와 거룩함에 대한 소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변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하시면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어머어마한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셨고, 또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광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더 이상 애굽의 명령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자유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을 지키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통해서만 가나안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여전히 홍해를 가르시듯이 축지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노예의식을 가지고 수동적으로 살기를 원하시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자신을 주님께 드리며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애굽에서 구원받았을 때처럼 여전히 자기들의 적들을 향해 재앙이 내리기를 기대하고 있고, 홍해가 갈라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요단 강을 건널 때는 물이 갈라지기 전에 먼저 발을 내딛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입만 벌리고 있으면 먹을 것도 주시고, 홍해도 건너게 하시는 그런 일들을 계속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너무도 많이 오리엔테이션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은혜가 계속 임하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에 대한 총체적인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생각은 철저히 타락한 기독교로 오염된 생각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오늘 우리는 십계명의 하나하나의 내용을 살펴볼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 전에 십계명이 우리들에게 주는 자기 정체성과 자기의 위치를 알게 하고, 또 우리가 이 광야에서 왜 그리스도인으로 훈련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보여줄 뿐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일에 전혀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10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넌 사건은 너무도 완벽한 하나님의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애굽 군사들이 바다로 들어왔을 시점, 조금도 찾오없이 하나님은 다시 홍해의 물을 흐르게 하시고, 애굽 군사들을 수장시켰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따라 가는데는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습니다. 진노를 받기도 했고, 지진으로 꺼진 땅에 함몰된 사람들도 있었고, 제단에서 나온 불에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천국에 갔느냐 못갔느냐는 여기서 할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경건하게 준비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훈련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 그 구원에는 목적과 방향. 그리고 사명이 있고, 또 결과가 있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첫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이었고, 둘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거룩해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규례들을 주셨습니다. 경건한 삶을 명령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 것과 간음하지 말 것과 도적질하지 말 것, 거짓 증거하지 말 것, 탐심하지 말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기본적으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을 고귀하게 여기고 절제된 모습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도적질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얻어야 합니다. 재판 자리에서 거짓 증거로 다른 사람을 모함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모든 죄의 근원인 탐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건한 삶을 원하십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것, 거룩성을 회복하는 것, 그것은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구원받기 위해서라고요?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자가 살아가야 할 마땅한 길입니다. 그것은 광야를 살기 위함입니다. 광야에서의 삶은 정결해야 합니다. 광야는 모래 바람이 있는 곳입니다. 생명에 위협을 주는 독사가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긴장을 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합니다. 이미 구원받았으면 삶에서는 실패해도 구원은 보장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보십시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유산을 받아 집을 나갔습니다. 허랑방탕하여 다 쓰고 타락한 삶을 살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새 옷을 입혔습니다. 전과 같이 완전한 당신의 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야말로 아버지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일이 있은 후 아들이 밖에 나가서 아버지를 이렇게 소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아버지는 너무도 사랑이 많으신 분이셔서 내가 다시 나가서 죄를 짓고 허랑방탕해서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그만큼 우리 아버지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만약 이렇게 작은 아들이 생각하고 말했다면 그는 다시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실패해도 다시 사랑하시고, 죄를 지어도 다시 용서하시는 것은 세상에서 절망한 인간을 향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메세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입에서 고백될 때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거룩해야 합니다. 정결해야 합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그 계명은 그들을 광야에서 살아가게 하는 필연적인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이,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 사는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미 구원받았으니 잘못해도, 죄를 지어도 용서받고 천국까지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인간의 사악한 죄의 근성을 보지 않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며 자기 욕망과 자기 삶에 대한 확보만을 찾으려고 하는지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조차도 바꾸지 못할 구원의 보장을 받고 싶어하는 악한 인간의 심성을 보지 않습니까?

이것이 출애굽을 통해 보여주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야 할 방향입니다. 그것은 곧 거룩의 회복이며 경건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이루어가고 가나안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삶의 풍요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갈 때 그 결과로 영적으로 육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아가도록 의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이룸으로 우리는 영적인 부요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안식일, 오늘날의 주일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경배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무한한 복을 주십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들까지도 안식일에 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쉬면서 육체적인 휴식을 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삶의 방향은 늘 주님을 향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의 방향을 찾아가게 되고, 그런 일들은 결국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바르게 찾고 잃어버리지 않게 합니다.

또한 다섯 번째 이하의 계명을 보십시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할 때 네 생명이 장수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 외에도 주시는 계명들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은혜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때 주시는 은혜요 결과요 열매입니다.

그런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목적으로 삼아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삶의 풍요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찾기 위해 하나님께 나갑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매우 비참한 결과를 맞습니다. 다른 신을 찾습니다. 이것으로 안되면 우리는 언제든지 다른 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풍요가 바로 우리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론 이 어려운 경제위기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들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오늘의 말씀을 통해 결론적으로 기억해야 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훈련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훈련하고 다듬고 경건을 연습하며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악한 것을 멀리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는 성품을 길러야 합니다. 불평과 험담을 입에서 멀리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불평과 험담은 바로 재난으로 이어졌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이제 우리의 구원의 문제는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기쁘고 설레는 일입니다 .그 일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2009년 한 해 동안 우리의 삶 가운데 놀라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에 참여햐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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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668 우리의 신실하신 주님(빌1:6) 2008. 10. 26 주일예배(김익준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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