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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설교] [비디오 찬양]  [비디오 경배]

오늘 우리는 성탄축하예배로 드립니다. 성탄절은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한결같이 기뻐합니다. 성도님들에게도 성탄의 기쁨을 빼앗기지 말고 가득하게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거룩한 탄생’입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죽기까지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마침내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격이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어떤 한 방향으로만 주로 생각해 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사야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닫게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탄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바르게 성탄을 맞이하는 기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은 남 유다의 왕 아하스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하스 왕은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였고, 이 시대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선지자는 이사야였습니다. 아하스는 매우 악한 왕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6장과 역대하 28장에 아하스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던 왕이었습니다. 우리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생각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민족은 본래 하나님을 섬겨온 백성이라는 점입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해도 그들의 삶 가운데는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던 습관과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 즉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해서 죽게 하기도 했습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무슨 일이든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기 민족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는 실용주의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이 아람(시리아)을 멸망시키고 그 수도였던 다메섹에 있을 때 아하스 왕은 그를 만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 때는 그는 그곳에 있는 제단의 모양을 보고는 그 모양과 구조, 제도를 그려서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여 이스라엘에도 같은 모양으로 단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을 섬기는 신앙과 이방 신앙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습니다. 무조건 자신들에게 좋으면 다 취하는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많은 면에서 그런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국제적인 정세는 앗수르가 강대국으로 이미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매우 강력한 방법으로 주변 나라들을 지배하고 있었고, 이 일에 어떤 나라들은 반기를 들기도 했었습니다. 특별히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이 아람 나라, 지금의 시리아와 동맹을 맺어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반기를 드는 첫 번째 행동으로 친 앗수르 정책을 펼치고 있던 남 유다를 침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람 나라 군대가 남 유다를 침략하기 위해 북 이스라엘에 도착했습니다. 이 소식이 남 유다에 전해졌고, 이 소식을 들은 남 유다의 왕 아하스와 그의 백성들은 두려워서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고 기록(현대인의 성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남 유다 왕 아하스에게 보냈습니다. 그 때 아하스 왕은 예루살렘 높인 지역에 있는 저수지에 있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 그곳에서 수로를 점검하고 물의 공급이 얼마나 원할한지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만약의 경우 아람과 북 이스라엘 나라가 전쟁을 해 올 때,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게 합니다.

이 때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4절입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기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찌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하나님은 아하스 왕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낙심치 말라고 하십니다. 저들은 불에 타다 남은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고 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번 휘두르면 그만 공중에서 부러져 버릴 타다 남은 나무일뿐입니다.

5-9절에서, 계속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북 이스라엘과 아람 나라가 동맹을 맺고 작전을 세우고 있는데, 저들의 작전은 이렇습니다. 동맹을 맺은 두 나라 군사들이 남 유다를 침략하여 저 백성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흩어지게 한 후에 다브엘의 아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구체적인 계획을 들을 때 남 유다는 이미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이 음모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아하스 왕 당시 그의 요청을 받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은 아람을 쳐들어와서 다메섹을 멸망하시고, 그 왕 르신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도 그로부터 불과 13년 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난 후 이사야 선지자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 말을 믿을 수 없느냐? 만일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으면 너도 굳게 서지 못할 것이다(9절하).” 여기서 아하스 왕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의 마음은 지금 앗수르에게 가 있습니다. 지금은 앗수르를 의지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앗수르 말고는 의지할 대상이 없습니다. 어떤 방법,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앗수르의 마음을 사서 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내 말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들 두 나라를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 같이 만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강대국의 힘을 빌리겠습니까?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까? 아하스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아하스는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여호와를 향한 믿음을 이어받은 유다의 왕입니다. 그의 조상은 그 신실한 믿음의 왕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이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하스는 여호와를 정면으로 반대하거나 거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깊은 내면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질문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오늘날 이 나라가 이렇게 바람 앞에 촛불처럼 연약하게 흔들려야 하는가? 라고 질문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지는 못하지만, 때때로 유익하다고 하면 무엇이든지, 나라를 살리기 위해 여기 저기 다니면서 동맹도 맺고 힘센 나라에 붙어서 군대를 빌리기도 했었습니다. 이방신에게 자기 아들을 불로 태워바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는 매우 합당한 모습일 수 있었습니다. 누가 그를 뭐라고 하겠습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나라를 위해 다른 나라에 가서 고개를 숙이고 필요한 것을 얻어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다면 부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훌륭한 대통령이 아니겠습니까?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많은 이방문화를 유다 땅에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가 여전히 마음을 열지 않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 위기의 상황에서 자기 주장과 자기 마음을 따라 가고 있는 아하스를 안타까워 하신 하나님은 두 번째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한 가지 징조를 보여주겠다. 그 징조는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의 징표가 될 것이다. 내가 유다를 지킨다는 표징으로 주는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런 하나님의 다가오심에 대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구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않겠습니다. 제가 그와 같은 것으로 여호와를 괴롭혀서야 되겠습니까?’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금방 느껴지실 것입니다. 여기서 아하스 왕이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죄송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 일에 개입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도권과 의지를 내려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제의 영역, 즉 종교적 영역 속에 한정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예배의 형식을 통해 경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의 무대로 나오시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의 구체적인 영역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그는 원치 않았습니다. 아하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역사의 활동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시켜 버리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던 이사야 선지자가 분노가 치솟아 올랐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백성들을 괴롭게 하고서도 그 일을 어찌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게 하느냐?’라고 책망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구하지 않아도 주께서 친히 너희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야의 출생을 예고하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먼저 이해할 것이 있습니다. 갑자기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가 아하스 왕에게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 예언한 것은 아닙니다. 보통 예언자들이 예언을 할 때 그들은 먼 미래를 보고 예언했다기보다는 그 당시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예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그리고 다윗과 같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들은 보통 두 가지 의미를 같이 가지고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는 그 당시 시대를 향한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먼 미래, 즉 메시야와 관련된 예언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배경을 이해할 때 임마누엘에 대한 예언이 바로 당시 아하스 왕을 향해 주신 예언으로 먼저 선포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언을 이해할 때 먼저 그 당시에 어떤 의미로 선포되었는지를 이해할 때 그 예언이 먼 미래, 즉 메시야에 대해 주시는 의미를 동시에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에 대한 예언은 주께서 ‘친히’ 주신 것입니다. 즉 달라고 요청해서 주신 예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징조를 하나 보여주실 것인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좀 복잡한 내용일 수 있지만, 당시 용어로 처녀라는 말은 단순히 젊은 여인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고 합니다. 아무튼 아마도 아하스 왕 주변에 누군가가 아기를 낳을 것이란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아기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즉 그 아이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 북 이스라엘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의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한 아기가 태어나서 그가 선악을 분별할 때, 그 때가 언제쯤입니까? 어떤 사람은 3-4세 정도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보는 관점에 따라서 10살 정도 되어야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 예언이 있은지 12년 후 북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의 역사를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을 원치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가운데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마지막 17절입니다. 어떤 성경은 16절과 17절 사이에 접속사 ‘그러나’를 삽입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즉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나뉘어진 이후로 이제까지 당해보지 못한 환난이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곧 앗수르 왕의 엄청난 공격을 의미합니다. 아하스는 앗수르 왕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지만, 다윗 왕조는 바로 그 앗수르에 의해서 큰 재난을 겪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실제로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과 아람을 멸망시키고는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이로 인해 유다는 엄청난 고통과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 고통을 감당한 사람은 아하스 왕이 아니라, 그의 아들 히스기야 왕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하스의 변질된 신앙과 잘못된 정치로 인해 앗수르와의 조약을 맺은 것에 얽매여서 엄청난 고통을 견디어야만 했었습니다.


임마누엘 예언이 당시로서의 의미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또한 당시로서는 잘 이해하기 힘들었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마치 산을 바라볼 때 앞에 있는 산과 뒤에 있는 산이 중첩되어 보이듯이 그런 효과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시 아하스에게 예언을 통해 경고하셨고, 그 예언은 동시에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예언이 바로 메시야에 대한 것이었음을 마태복음은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메시야가 오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분이 세상을 다시리십니다. 그 분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분은 역사의 주인이 되시고, 그 분은 교회의 주인이시며,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아하스 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징조를 거부하듯이 오늘 사람들도 그 분의 징조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메시야의 오심을 거부합니다. 그 분은 나와 상관 없다고 말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하고, 내 의지를 따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분의 오심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삶의 자리로 임재하십니다. 우리 교회 가운데 오시고, 우리의 가정 가운데 오시고, 우리 개인의 삶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가 초청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친히 스스로 오셨습니다. 그 분이 친히 스스로 오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높고 높은 천국의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내려오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의 사건이며 은총의 사건이지만, 또 한편으로 이 사건은 우리가 그 분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결단해야 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또 하나의 의미는 심판입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냐 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하나는 약속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아하스 왕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징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것은 원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역사 밖으로 퇴출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아하스 왕에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친히 징조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냐는 아하스 왕 자신에게 달린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은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총의 사건입니다. 마치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져가고 있는 남 유다를 붙들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임마누엘로 오셨으나, 결국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거부한 것처럼 오늘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인 임마누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 분을 받아들이는 것은 구원의 사건이요. 그 분을 거부하는 것은 멸망의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교묘하게 자신의 입지를 찾으려는 아하스 왕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징조를 구하라고 하실 때 ‘나는 구하지 않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면서 마치 겸손한 것처럼 자신을 위장했습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높여 드리는 것처럼 하면서 사실은 하나님을 역사의 현장에서, 삶의 현장에서 퇴출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거룩한 예배의 의식 속에 가둬 놓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제의적인 고백, 예배의 형식으로서만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매우 동일하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탄 추리와 온갖 화려한 예식과 행사, 그리고 선물로 그 분의 오심을 축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멋진 빵빠레를 울리면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할지도 모르니다. 그러나 우리도 여전히 아하스 왕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주님을 거부합니다. 종교적으로는 그 분을 여전히 섬깁니다. 종교적 행위는 너무도 근사하게 행합니다. 멋진 찬양과 적지 않은 헌금과 시간과 정성을 들인 수고와 헌신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참으로 그럴 듯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갑니까?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 그 분이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까? 난관에 처한 자기 민족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겨 드립니까? 그 분이 곤난에 빠진 이 민족, 이 교회, 우리 가정과 내 삶의 영역을 맡겨 드립니까? 진실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내가 주님의 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 편입니까? 주님을 우리 삶의 한 구석에 앉아계시게 하다가 일주일에 한 번 저도 찾아 뵙고 있습니까? 진실로 그 분이 다스리는 나라. 진실로 그 분이 통치하는 삶의 현장,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멋진 예배당과 예배의 형식과 찬양이 있어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한낮 새로운 형태의 우상일 뿐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친히” 오셨습니다. 누가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친히 임마누엘의 징조를 보여주신 것처럼, 친히 주님은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오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의 삶과 역사를 주관하시도록 열어드릴 때 진정으로 그것이 참된 성탄이 될 것입니다. 그 분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십시다. 그 분께 우리 삶의 주도권을 드리십시다. 그리고 아기 예수로 오신 주님의 구원의 놀라운 은총이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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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 우리의 신실하신 주님(빌1:6) 2008. 10. 26 주일예배(김익준전도사)
667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2-20) 2008. 11. 2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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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5 말 못하는 우상(고전 12:1-11) 2008. 11. 16 주일예배
664 감사를 표현하자(살전5:18) 2008. 11. 23 주일예배(박진석목사)
663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3-24) 2008. 11. 30 주일예배
662 질그릇에 담은 보배(고후4:1-12) 2008. 12. 7 주일예배
66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7:8-16) 2008. 12. 14 주일예배
» 친히 주신 징조 - 임마누엘(사7:1-17) 2008. 12. 21 성탄주일예배
659 그리스도의 일꾼(고후11:22-33) 2008. 12. 28 주일예배
658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출20:1-17) 2009. 1. 4 주일예배
657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님(막3:7-19) 2009. 1. 11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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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막7:31-8:10) 2009. 1. 25 주일예배
654 태초부터 주신 규범(막10:1-16) 2009. 2. 1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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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2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막13:14-27) 2009. 2. 1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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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 너희 하나님을 보라(사40:1-11) 2009. 3. 1 주일예배
649 새 노래로 노래하자(사42:10-17) 2009. 3. 8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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