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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가 겪은 진통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 자체가 워낙 세속적인 도시였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잘못된 복음, 잘못된 말씀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도시가 얼만큼 세속적이냐 하는 점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세상에 영향을 받기 보다는 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는 잘못된 복음으로 인해 세상을 향한 선한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 점이 교회를 어렵게 했다는 점은 곧 세속화된 세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말해 줍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눈물의 편지(준엄한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눈물로 고린도교회를 향해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사정없이 호된 말들도 편지 속에 담았던 것 같습니다. 이 편지로 바울은 너무 심한 편지를 썼다는 생각 때문에 잠시 후회하기도 했었습니다. 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나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이 편지를 보낸 바울의 마음을 무거웠습니다. 이 편지를 받아보고 마음에 근심하게 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은 잠시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근심이 잠시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 편지로 인하여 지금은 기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이 편지로 인해 회개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편지, 눈물의 편지로 인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근심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다고 말합니다.

근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Godly sorrow, 경건한 근심)이 있고, 다른 하나는 세상 근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회개를 이루고,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적으로 우리가 근심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우리의 뼈의 진액을 마르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신실하게 서려고 하는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고, 생명으로,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면서 외친 첫성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3;2).”였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 올라오신 후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첫 오순절에 복음을 전할을 때 사람들이 마음의 찔림을 받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3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회개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첫 번째 반응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성도의 신앙 여정에 건너뛸 수 없는 과정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삶의 대전환을 말합니다. 삶의 변화가 없이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은 부득이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가던 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은 다 이제까지 가던 죄의 길에서 돌아서서 새로운 길,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길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수고가 없이 가던 길을 계속 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많은 교회들은 회개 없이 가는 길들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매우 설득력 있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심리학적인 접근입니다. 심리학은 우리의 내적 자아를 발견하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과거로부터 가지고 온 부정적인 경험들이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환경으로부터, 여러 가지 삶의 조건들로부터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그리고 우리가 거부할 수 없이 받아야만 했던 상처와 아픔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아픔들이 오늘 우리의 부정적인 자아를 만들었습니다.

하다못해 사람을 죽였어도 그가 본래 정신질환을 겪고 있었다면 살인죄를 면하게 되는 시대가 바로 오늘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범죄를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는 그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의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 이면에는 바로 우리의 모든 문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상황에 기인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생각은 결국 자신의 죄를 도피하게 하고, 정면으로 직면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오늘날 동성애자들이 그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동성애란 태어나면서부터 천선적으로 그런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저는 그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범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이런 말씀들을 인용하며서 기독교인들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죄의 뿌리를 짤라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일을 유보하거나 포기합니다.

사도 바울은 삶의 변화를 위해 몸부림친 사람입니다. 앞서 언급한 말씀은 바울의 처절한 영적 싸움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바울도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국 변화를 포기합니다. 그것을 보는 세상 사람들도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살도록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변화를 위해 헌신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받은 영향일 수 있습니다.

A. W. Tozer(토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실한 복음주의적 교회들 가운데 이단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보통 이렇게 생각하고 믿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해서 그리스도를 자진하여 영접할 수는 있으나, 그분을 자신의 주님으로 삼아 순종하는 일은 우리가 원할 때까지 미룰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우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변화되기를 처음부터 포기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순종과 변화의 시기를 내가 결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 바로 의지적인 순종입니다. 회개란 감정적인 반응이나 지적인 동의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느낌과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그것이 회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의지적인 순종이 반드시 함께 와야 합니다. 회개는 생각과 행동, 삶의 방향과 지향성에 있어서의 변화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열매로 맺어졌을 때 분명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3장 8절에서 세례 요한은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7장 20절에서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가 없는 회개는 온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회개는 온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변할 수 없는 많은 이유들을 내놓습니다. 우리의 삶의 상황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모릅니다. 오늘의 세상이 예수 믿기가 얼마나 어려운 시대인지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적인 이유를 들어서 말하고, 심리학적인 논리로 말하고, 자신의 형편을 들어 아직은 변화되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그럴 듯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여전히 변화되지 못하고 현재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용납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여기면서, 그것이 마치 구원의 복음을 잘 이해하는 양 그렇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달라스 윌라드라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죽기 직전에 내 삶은 무엇이 될까?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몇 날 몇 시간밖에 안 되는 이 땅의 실존 중에도 그 분과 동행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는데, 영원히 그분의 임재 안에 사는 것이 나에게 정말로 편하게 느껴질까?’ 천국에 들어갈 것이 끔찍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그 분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그 분의 임재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진지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변화없이, 회개없이 예수를 믿는 것이 진정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변화는 죽어서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연장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까지는 하지만, 그 후로 이어지는 진정한 회개와 삶의 변화, 헌신, 말씀에의 순종, 세상과 구별된 삶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일, 주님을 닮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아니 굳이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어찌 성도 본인의 선택사항이겠습니까? 그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전적으로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 없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근심함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회개가 그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11절에서 말씀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였는가?’ 라고 먼저 말합니다. 그들의 회개는 먼저 그들을 간절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간절함을 갖게 했습니다. 회개의 증거는 간절함을 갖는 것입니다. 무관심은 회개한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될 대로 돼라지!’ ‘어떻게 되겠지!’ ‘죽기야 하겠는가!’ 이런 생각은 회개의 표시가 아닙니다. 저는 고린도전후서를 묵상하면서 제 마음에 이런 질문을 여러 번 던저 보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도 고린도교회를 포기하지 않았는가?’ 그의 마음에 진정 교회를 향한 간절함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는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변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동안 바울의 적대자들이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러는 중에 그들은 그냥 중립적인 자리에 서서 ‘난 아무 일도 안했어!’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리만 지켰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바울을 위해 열심히 변호합니다. 교회가 이래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라도 말합니다. 누구를 험담하고 비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진심으로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얼마나 분하게 하며’는 교회를 더럽힌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분노이며, 또한 자신들이 그동안 주의 말씀 가운데 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의분입니다. 악한 사단이 교회와 성도들을 어둠 가운데로 몰고 갔습니다. 지나온 날 어리석게도 주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신실한 사역자를 모함하고 악에 동조한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이 일을 분해하면서 돌아오는, 즉 회개하는 그들의 모습니다.

네 번째, ‘얼마나 두렵게 하며’는 같은 죄에 다시 빠질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열매로 그를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반복된 죄 가운데 거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거나, 여전히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졌거나, 혹은 죄의 극복은 죽을 때 가서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회개 없는 증거입니다. 정말로 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십니까? 진실로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삶의 자세와 의지와 방향을 돌아서기 원하십니까? 이 질문 앞에 먼저 서야 합니다.

다섯 번째,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는 그들의 태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순결함과 거룩함을 향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한 자의 모습입니다. 기도와 말씀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는 하나님과 그의 공의로우심을 향한 열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자체가 늘 어렵고 힘든 일처럼 느껴졌었습니다. 경건이나 거룩함이라는 것은 늘 자신들과는 먼 이야기처럼 느꼈었습니다. 그런데 회개한 후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과 그의 공의로움을 향해 날마다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열심이 생깁니다. 죄를 멀리하고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갖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는 죄를 용납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전에는 대충 눈치보고 살았습니다. 힘 있는 편에 섰었습니다. 굳이 미움 받을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죄를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낮아지고, 내가 희생해서라도 불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죄를 보시고 멸망하는 인간의 사악한 모습을 주님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이 땅에 입고 오셨습니다. 그 인간들이 자기들의 죄를 보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핍박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집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죄를 용납하지 못하시는 주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죄를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은 꼭 남의 죄를 지적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짐을 친히 담당하려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잘못했다고 그 사람을 질책하고만 있다면 남의 눈에 있는 티만 보고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진정한 회개한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회개한 자들입니까?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인입니까? 우리교회는 정말 진실로 성경에서 말하는 그 의미로서의 참된 교회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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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 질그릇에 담은 보배(고후4:1-12) 2008. 12. 7 주일예배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7:8-16) 2008. 12. 1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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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 새 노래로 노래하자(사42:10-17) 2009. 3. 8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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