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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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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설교] [비디오 찬양] [비디오 특송] [비디오 경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학문의 깊이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일에 대한 열정,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던 열정 또한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과 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던 중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늘로부터 비취는 엄청난 빛과 함께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바울은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주님을 만나 자신의 전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임을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유대인이며 율법주의자였고, 핍박자였던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최고의 학부를 나온 그의 학문은 모두 덜 가치 있거나 혹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렸고, 그의 지식과 지혜, 삶의 가치관과 방향성은 모두 새롭게 세워져 갔습니다.

바울은 그 때의 상황을 마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의 상황에 비추어 이해합니다. 6절입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빛은 어두움을 가르고 세상을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단지 하늘에서 비췬 물리적인 빛만 경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존재를 전혀 새롭게 비추시는 그 빛을 경험했습니다.

이 빛은 그의 삶을 완전히 180도 바꾸게 했습니다. 그의 보는 모든 것이 바꿨고, 생각하는 것이 바꿨었습니다. 그가 보는 세계관이 바꼈고, 그의 가치관이 바꼈습니다. 그는 총제적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사도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다른 곳을 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한 분만이 자신의 길이요 생명이며 진리이셨습니다. 그 분을 위해 사는 것이 그에게 가장 큰 행복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그 안에 무한한 자유가 있음을 그는 수없이 외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무한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지금 이 놀라운 복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나 핍박을 받을 때는 그는 언제나 이 복음을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그가 처음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 고린도 지역에 교회를 세웠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거짓 선지자들이 와서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교회를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성도들 간에 갈등이 일어났고, 분당이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처음 세워졌던 복음의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에 다른 무엇인가 이물질이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불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사도성을 의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 하면서 의심하는 자들이 늘어갔습니다. 그들 중에는 의도적으로 이런 일들을 나서서 행하면서 교회의 혼란을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각가지 소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은 도대체 이해가 잘 안된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 중에는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거부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그들은 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 고린도에 다시 오려면 추천장을 받아 올 것을 요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불신이 교회 가운데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런 일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영적으로 무관심하고 게을러지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가운데 이런 불신과 불만들이 덤불처럼 교회라고 하는 화단에 가득 찰 수 있습니다. 본래 좋은 나무보다 잡초가 더 무성한 법입니다. 잡초는 끊임없이 뽑아주지 않으면 다시 나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이런 분위기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쓰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사도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도성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자신이 전한 복음이 거부되는 것이고, 자신이 전한 복음이 거부되면 곧 교회가 무너지게 됩니다.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우리가 더 깊이 들어가 볼 수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고린도교회는 지금 매우 깊은 상처와 아픔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내는 칼날은 바울에게도 날까롭게 사정없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거부 당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교회의 성도들에게 방문 거부를 당하고 있고, 설교에 대한 권한도 거부 당할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지금 1절에서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의 위대함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거부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세운 교회의 성도들조차 자신을 거부하며 추천장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일들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위대한 복음이 있습니다. 그 복음은 자신을 바꾸었습니다. 그 복음은 자신으로 하여금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보게 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지만, 복음 안에서 놀라운 자유와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생명을 걸고라도 지켜야만 하는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복음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정성이 사람들을 이끄는 것입니다. 복음이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복음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무시 당하고 있지만 그는 지금 복음 안에 서 있습니다. 그것이 그를 담대하게 서 있게 합니다.

2절입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다른 성경(현대어)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믿게 하려고 간교한 행동을 하거나 사람을 속이는 일에는 아무 흥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씌어 있지 않은 것을 성경의 가르침인 양 믿게 하려는 따위의 수치스러운 방법은 사용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였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모든 사람에게 떳떳이 내세울 수 있습니다.”

당시 화려한 말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설교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샀던 이들이 있었음을 알게 해 주는 부분입니다. 바울의 설교는 때로는 딱딱하고, 지루했을지 모릅니다. 그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격려하는 일보다는 하나님의 엄한 심판을 외쳤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예 작정하고 그렇게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사람들을 믿게 하려고 간교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혼잡하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불순물을 섞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념이나 전통들을 복음에 혼합시켜 본질을 희석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입맛에 들게 요리하고, 귀에 솔깃하게 전하고, 눈에 잘 띄게 포장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환심을 사고 교회를 가득차게 합니다.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을 배척하며 자기 편을 만들어 갑니다. 이런 일들은 그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에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본질적으로 복음은 세상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복음은 세상의 길을 거부합니다. 복음은 세상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게 더 적절하게 어울릴 수 있는 복음을 찾아다닙니다. 그 복음에 포장을 하고 입맛을 새롭게 합니다. 좀 더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해 갑니다. 이런 방법들이 그 자체로 모두 거부할 일들은 아니지만, 우리는 사실 그런 일들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그에 비해 복음의 본질을 추구하는 일에는 너무 멀어져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실 복음을 잘 모릅니다. 이미 우리는 복음에 너무 많은 조미료가 들어가서 진짜 복음의 맛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복음의 진정한 능력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복음을 잘 모르면서도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전파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주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신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의 도구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산 아래에 있던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섬깁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그들을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야웨, 즉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모세가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 쓸어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여기에 매우 중요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으로 인해 진노하시고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가나안에 인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단순히 우상을 섬긴 수준이 아닙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는 이것이 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 여호와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여행가이드로 생각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광야여행을 인도하는 가이드일뿐 입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고, 가나안으로 인도할 신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한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나의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잠잠해야 합니다. 누가 그 분의 뜻을 거스리겠습니까? 누가 그 분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복음은 바울 시대와 조금도 다름없이, 아니 더 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게 복음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찾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진실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결단이 없이 우리의 인생이 변화되기를 진정으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겪은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고,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그가 겪은 많은 고난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보여줍니다. 8-9절을 보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했으며, 핍박을 받고, 거꾸러 뜨림을 당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 안에 귀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7절에서는 보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그의 비밀이었습니다. 그 안에 보배가 있었습니다. 복음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의 가치과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비밀을 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난 당하고 아픔을 겪는 삶을 산다면 그 자체가 이미 절망스럽고 실패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그런 것들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실패한 자들의 대표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결코 복 받은 자의 표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좀 더 잘 살아보기 위하고 행복하고, 광야의 안전을 확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되돌려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고난과 핍박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지켜나갈만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런 것이 과연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라도 지키고 찾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세상적인 가치보다 더 귀하고 높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여호와를 우리의 여행가이드로 생각합니다.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할 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가나안까지 무사히 인도할 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찾은 사람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고, 놀라운 기적을 주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분을 가이드로, 우리 인생의 수단으로 삼았다면, 주님은 마지막에 우리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7:32).’

7절을 다시 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계속해서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여전히 지금도 가이드를 구하고 있습니까?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인도할 가이드가 필요하십니까?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으십니까? 복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굳이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 인생을 안전하게 이끌 수 있는 것이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역에 대해, 십자가의 죽음에 부활에 대해, 우리의 죄 용서와 성화, 부활과 영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 생명과 사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관심은 그냥 단지 내 앞에 있는 삶의 안전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보이지 않으면 금송아지라도 만들어서 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 하고는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음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자신의 사도권을 들고 씨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 고린도교회를 세운 전도자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주장하며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살리는 복음입니다. 다른 것과 섞이지 않은 복음, 간교한 행동으로 교회의 믿음의 멤버가 되도록 교묘한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복음입니다. 복음이 불순물이 들어가면 복음은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불순물이 들어간 복음은 엄밀한 의미에서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금송아지일 뿐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우리는 질그룻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는 넘어집니다. 우리는 쓰러집니다. 자주 실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보배가 있습니다. 그 보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질그릇을 특별히 보호하시고 관리하십니다. 보배 때문에 깨어진 질그릇도 다시 붙이시고 이으시고 싸매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배가 지켜져야 질그릇이 보호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관심은 주님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께 영광을 돌리고 그 분을 찬양하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그 분께 존귀를 돌릴 때 그 분은 질그릇인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절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아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 보배 되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 삶의 푯대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음은 우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단순한 수단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가이드가 아닙니다. 애굽에서 구출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푯대를 잃지 마십시오. 이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로 고백한다는 사영리 고백을 했다고 거기서 구원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주님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주님 부르실 그 날까지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잃지 않고 달려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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