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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설교] [비디오 찬양] [비디오 특송] [비디오 경배]

오늘날 반기독교 정서가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목사로서 매우 안타깝고 마음이 아픕니다. 성도님들께서도 동일한 마음이라 생각됩니다. 어떤 경우는 동일한 기독교인이면서도 교회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던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받는 비난보다는 내적인 자정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 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또한 또 하나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변질되곤 합니다. 명분은 언제나 있습니다. ‘당신은 더 책임적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는 논지입니다.

교회가 여전히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 있는가 라는 질문 앞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교회 자체가 바르게 서는 것조차 매우 힘든 현실입니다. 이런 현상의 저변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고린도전서는 초대교회들 중에 가장 문제 많은 교회였던 고린도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이 사랑하면서도 실랄하게 그들의 문제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을 책망하고 설득하는 내용입니다. 여러 가지 주제들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파당, 우상숭배, 자유, 세상 법정, 이혼, 결혼, 독신의 문제, 은사에 대한 문제, 부활에 대한 논쟁 등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문제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제 그 많은 문제들에 대한 교훈을 하고 난 후 마지막 결론을 내립니다. 13-15절의 세 절 안에서 서로 다른 표현들 속에서 바울의 일관된 마지막 당부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참으로 간절한 바울의 부탁이었고, 그 부탁 안에 하나님의 자녀가 변화를 위해 가장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오늘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13절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비슷한 의미의 말을 반복함으로 강조합니다. 특별히 ‘깨어 있으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많이 사용하셨고, 복음서에 무려 16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사용하시면서 당부하신 때는 주로 그의 사역 마지막에서 였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시기 일 주일 전에 하신 말씀들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주로 종말론적 긴장을 늦추지 말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많은 말씀들을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감동을 받기도 하고, 도전을 받기도 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라면서 말하기를 ‘그의 가르치시는 것은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동서사방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아 주님을 3년 동안 따르던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오백여 형제들이 일시에 주님을 보았다고 하니 그들도 역시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이 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셔서 심문을 받으실 때 제자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한 제자는 예수님을 팔아 버렸으며,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무기력했습니다. 도전하는 상황 속에서 전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과 자세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고, 오히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였다는 점이 부끄러웠고 세상 앞에 조롱받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점을 알게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 깨달음과 감동은 우리 믿음의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 하시는 말씀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않더라고 무릎을 치면서 감탄했지만, 그것은 주님이 기대하셨던 믿음의 마지막 단계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힘을 주지 못합니다.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우리를 무기력하게 무릎 꿇게 합니다.

오늘의 시대는 감동의 시대입니다. 이미 많이 지나간 이야기가 되었지만, 세상에 잘 나가는 회사들이 물건을 팔 때 ‘고객을 감동시키라’고 외쳐댔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가 얼마나 감동적인가에 의해서 그 영화의 수준이 평가됩니다. 아무리 영화가 좋은 의도와 메세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영화 안에 주는 감동이 없다면 그것을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들 수 없습니다.

감동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멋진 영화을 보면서 주인공이 희생과 헌신을 통해 어떤 무시무시한 악의 세력을 제압했을 때 감동받은 자신도 그런 일에 힘을 보탠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합니다. 감동으로 자신에게도 의로움이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말씀과 찬송과 기도를 통해 마음에 찡해 오는 감동을 받았을 때 그것이 곧 우리를 선하고 의롭게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감동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 같지만,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씩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킬지도 모르지만, 그 변화는 감동으로만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장부터 15장까지 각 가지 주제에 대해 신학적인 논쟁과 책망, 때로는 격려를 통해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날이 가까울수록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들은 말씀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감동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는 결단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성도를 승리로 이끌어 갑니다.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한 가정을 칭찬합니다. 그 가정은 스데바나의 집입니다. 그들은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원어로 직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성도 섬기는 일에 임명했습니다.” 성경에 따라 다소 다른 느낌을 번역했지만, 원어의 의미를 살린다면 여기서 ‘성도 섬기는 일에 임명’했다는 말은 그들의 마음에 결심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결심이란 의지적 결단을 의미합니다. 그냥 마음의 감동으로 행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은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일을 하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때로는 그 일을 하기 어려워도, 때로는 그 일을 하는 것이 그리 합당하게 여겨지지 않을 순간에도, 때로는 섬김을 받는 대상이 마음이 들지 않아도 그 일을 계속 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한다면 마음의 감동이 있어서 계속 하는 것이 아니라 결심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감성적인 움직임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의지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30년 동안 준비하시고 3년 동안 제자들을 세우고, 병든 자를 고치며, 고난 당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정말 자기 몸을 다 드렸습니다. 자기 목숨이라도 주고 싶었고, 또 그렇게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성부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은 죄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들을 보면 마음이 찢어질만큼 아팠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을 위해 십자가 앞에 섰을 때 주님은 망설였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결단하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감정만 가지고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결심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다짐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저절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6-18절을 보십시오.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한 스데바나가 바울을 돕기 위해 다른 몇 사람과 함께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 달려 갔습니다. 사도와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갔습니다. 만약 그가 감동이 올 때만 달려가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사도 바울이 그를 이렇게 칭찬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어떤 일을 부탁받을 때, 어떤 섬김이 필요할 때 매우 자주 이런 말을 사용합니다. ‘마음에 감동이 없습니다.’ ‘마음에 감동이 없네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닌가봅니다.’

어느 성도님을 보면서 참 많은 도전을 받은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직분을 사모하면서 감당합니다. 그 일을 맡은 것이 너무 귀하게 여겨져서 감사함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그렇게 늘 좋고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심한 갈등과 낙심 가운데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어 합니다. 때로는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하소연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그 자리를 지킵니다. 참고 인내합니다. 그 자리에 항상 기쁨이 있었을까요? 그 자리에 감동이 있었을까요? 그것를 계속하게 하는 힘은 넘치는 감사와 감동이었을까요? 그를 계속적으로 움직이고 섬길 수 있게 했던 힘은 감동이나 감격이 아니라, 결단이었습니다. 일단 섬기기로 결단한 것을 신실하게 지키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자주 은혜를 받는다고 할 때 그 말의 의미를 ‘어떤 일을 자동으로 하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힘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힘, 스데반이 돌에 맞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었다고 한 것처럼, 자동적으로 우리의 얼굴에 웃음과 기쁨이 보여지는 것이 바로 은혜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제가 이번에 고린도전서를 큐티하면서 제 마음에 크게 깨닫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13절입니다. 그 말씀을 앞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사건들이 나옵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홍해를 주님의 은혜로 건넜다는 말입니다. ‘다 같이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이 말은 만나를 먹었다는 뜻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 말은 반석에서 물이 나와 광야에서 물 없어 죽을 상황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사건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많은 은혜를 그들은 누렸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연속된 은혜의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그들은 적어도 네 가지의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간음과 주를 시험하는 것과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 받은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가 없어서 주님을 배반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은혜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은혜가 그들의 광야 40년 내내 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오늘 교회가 넘어야 할 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은혜만을 구하는 반복된 유아기적 자세입니다. 감동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더 많은 은혜를 달라고, 더 많은 감동을 달라고 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많은 감동으로 인해 더 큰 감동을 구하고 있고, 왠만한 감동에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무뎌진 심장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반응하지 않는 우리의 심장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심장이 다시 뛰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멈추어가고 있는 이 심장을 어떻게 다시 뛰게 할 수 있겠습니까?

14절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원어의 문법적 구조를 있는 그대로 살려서 번역한다면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감동도 필요하고, 눈물도 필요합니다. 깨달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마치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섭취하면서도 운동하지 않아 모두 배설물로 나가고, 또한 몸을 더욱 비대하게 함으로 오히려 질병의 원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마지막을 사랑으로 요약합니다. ‘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3장은 고린도교회의 은사문제에 있어서 사랑으로 해결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은사 문제를 해결하는 ‘제일 좋은 길’로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상 제물에 대해서도 사랑을 제일 좋은 처방으로 제시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고 말씀했습니다.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원리도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그 사랑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은 감성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며, 온유한 것이고,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입니다. 성내지 아니하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감성적인 느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감성적인 느낌이 의지적인 결단과 행동으로까지 가는 순종의 행위입니다. 중간에서 멈추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19-20절에 보면,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엑 문안한다고 말씀합니다. 당시 아시아라고 하는 지역은 사도 바울이 머물고 있는 에베소를 비롯해서 지금의 터키지역으로,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그리고 라오디게아 등입니다. 이 지역의 교회들이 고린도교회에게 문안을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사도 바울과 함께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함께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집에 있는 교회, 즉 아굴라와 브리스가 집에서 세운 교회의 성도들이 고린도교회에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다고 하니 자기들의 안부도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모일 때 고린도교회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들을 사모하고 보고싶어 하고, 가족처럼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바울로부터 고린도교회의 형편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기도를 많이 해서 은사를 많이 받은 성도들이라고 하면, 부러워하며 자기들도 더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들이 갈라져서 서로 하나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 안타까워하고, 그들을 위해 더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안부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그들의 안부를 전하면서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흐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상상이 잘 안 가지만 그들은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를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이런 인사가 일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당부합니다. 파당과 분열로 더 이상 깊은 골을 만들지 말고, 이제는 서로 화목할 것을 당부합니다. 멀리 떨어진 아시아에 사는 성도들까지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이곳 성도들까지 당신들을 향해 문안을 하고 있는데, 왜 한 교회 안에서 그렇게 분열이 되어야되겠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21절 이하를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무엇이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이어 나오는 말을 통해 그 의미를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이 말은 당시 아람어 방언, ‘마라나타’라는 말을 번역한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말을 습관처럼 교회에서 사용했습니다. 그 의미는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라고 번역했지만, 더 많은 번역은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번역합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주님께서 정말 조만간 오신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화될까요? 종말적 긴장감이 없이 그리스도인들이 벼화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늘 긴장감 없이 하나님 앞에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곧 오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주님의 오심을 믿는 자만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진 자만이 진실로 교회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감정적인 느낌 이상입니다. 사랑은 결단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사랑으로 행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결단이 없이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조차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단하셔야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감동을 따라 섬긴다는 말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감동은 우리의 신앙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우리를 계속 주님께로 나아가게 하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삶의 변화는 은혜 받은 성도의 삶의 결단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사랑하기를 더 이상 미루지 마십시오. 더 많은 감동이 있으면 할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결단하십시오. 주를 위해 살겠다고 결단하면 주님께서 새롭게 더 많은 감동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감동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 순종함의 결단으로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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