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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설교] [비디오 찬양] [비디오 특송] [비디오 경배]

오늘날 세계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런 재난이 언제 내게는 언제 미칠까? 과연 이 위기를 빗겨 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런 위기가 닥칠 때마다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수리 이야기’입니다. 태풍이 불편 모든 동물들과 새들은 모두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아 들어갑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태풍을 뚫고 창공 위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엄청난 저항을 뚫고 창공을 향해 올라가면서 날개가 찢어지고 눈을 다치며 몸에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창공에 올라간 독수리는 태풍 아래의 엄청난 폭풍을 피해 멋진 하늘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위기를 주셔서 우리의 인생을 흔드십니다. 이럴 때 우리는 평소 내가 정말로 의지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물질일 수도 있고, 건강이나 혹은 운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정말 우리 안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본문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예수를 믿기 전, 이방인이었을 때 그들은 우상에게 이끌려 살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말 못하는 우상’이라고 표현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우상이란 삶의 원리와 방향을 주었던 존재들입니다. 그들의 우상은 곧 그들의 삶의 원리이며 삶의 안내자였습니다. 풍요를 가져다 주는 바알 신을 비롯해서 미의 여신 비너스, 전쟁의 신 아레스, 사랑의 신 에로스 등 수많은 신들이 그들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을 ‘말 못하는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참으로 말도 못하는 신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대인들의 삶은 그 말 못하는 신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과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믿은 후에도 지난 세월 그들을 끌고 다녔던 우상의 이끌림을 여전히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예수를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하면서도 삶은 여전히 우상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 근거를 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하지 못하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지금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안에는 여전히 세상의 원리들, 즉 우상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믿음은 세상의 원리를 뛰어 넘어 하늘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태풍이 불 때 모든 새들은 태풍 아래에서 숨을 곳을 찾지만 독수리는 창공을 나는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원리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능력의 창공, 은혜의 창공을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 뒤집어져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세상에 태풍으로 고난과 환난이 와도 여전히 든든히 평안을 누리며 사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온세계가 엄청난 경제 위기로 몸살을 앓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경제학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뛰어난 이론이 얼마나 많이 나왔으며, 엄청난 분량의 자료를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컴퓨터가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그런데 최근의 일은 전에 겪어보지 못한 일이므로 그런 경제이론과 컴퓨터로도 예측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 못하는 우상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흐름을 남 보다 조금 먼저 이해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들과 세계 시민들을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우리가 믿고 의지할 이는 그들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처량합니다. 불쌍합니다. 우리의 신세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경제위기의 거센 바람을 헤치고 창공을 비상하는 믿음이 실종되었습니다.

‘말 못하는 우상’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기다리며 귀를 귀울여야 하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대인이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가치를 돈과 부에 두고 물질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신의 눈과 귀를 막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온 인류가 목을 매고 살아갑니다.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이 경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작금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할 참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그곳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의지하고 살아가던 것들은 다 우상입니다. 그들은 말도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우주의 진정한 주인이시며 역사의 주관자는 바로 하나님이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것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아니하고는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의 생명과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자녀도 책임져 주십니다. 성령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고,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왜 그토록 힘들까요?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말도 못하는 우상을 따라 가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고백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인생을 주관하며 살아가려고 하고, 결국 세상의 우상을 좇아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은 말조차도 못하는 매우 어리석은 우상입니다. 그 우상들은 여러 가지 원리와 방향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만 결국 그것들은 모두 다 죽음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 길은 이전에 우리가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그것은 전혀 우리 삶의 해법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관을 작은 교회 공동체 안에 가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이 바로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라고 말씀합니다.

4-6절 말씀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여기서 은사와 직임과 역사는 무엇입니까? 은사와 직임과 역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 가운데 주시는 것들입니다. 은사는 ‘선물’이라는 뜻인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자녀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재능과 같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인간에게 각자의 사명을 위해서 직임을 주시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시도록 역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에게 있는 기본적인 삶의 재능부터 시작해서 삶의 자리, 사명을 쥐고, 그 일들을 가능하게 하시는 모든 영역을 주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은사와 직임을 주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신데, 그 은사와 직임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즉 동일한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다양하게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A라는 사람을 인도하시는 방법과 B라는 사람을 인도하시는 방법이 결코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물질적으로 부요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도 하시지만,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면서도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함으로 일하게 하시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body worship으로, 몸으로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통해 나타난 고린도 사람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상은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몰아갑니다. 하나밖에 모르게 합니다. 그것 아니면 못사는 줄 알게 합니다. 꼭 그것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그러므로 그것 없으면 절망하게 합니다. 이런 절망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날 세계의 상황을 보십시오. 온 세계가 하나의 문제로 온통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금방 어떻게 끝장이라도 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정말 끝장 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끝장 낼 수 있는 일들은 경제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 문제로 인해 일어날 일들이 물론 결코 적지 않겠지만, 그것 말고도 오늘날 세계는 수많은 문제들로 생명을 잃어가고 있고, 비참함을 경험하고 있으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교통사고와 질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고, 전쟁으로 생명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가진 자가 갖는 고민입니다. 이미 확보하고 있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지지대가 무너질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아둔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성령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성도들의 삶에 개입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8-10절에는 성령께서 주시는 다양한 은사에 대해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아홉 가지의 은사를 언급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과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과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과 방언들 통역에 대해 말씀합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성령께서 각 사람들에게 다르게 역사하시고 나타나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방법으로 인도하신다면 저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함께 하십니다.

다 같은 은사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본문에는 아홉 가지 은사를 제시하지만, 그 외에도 로마서 12장과 에베소서 4장을 보면 다양한 은사가 더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러한 은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는 유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누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0장 24절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는 남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은사를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명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을 결코 죽지 않습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세계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도 결코 그냥 죽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7-28장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바다로 가고 있었는데, 유라굴로라는 엄청난 광풍을 만났습니다. 그 광풍으로 인해 사도 바울과 함께 승선하고 있는 선원들과 군인들, 죄수들은 무려 14일 동안이나 먹지 못하고 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뭐라 하셨는지 아십니까?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사도행전 27:24).”

이 말씀이 무슨 의미라고 느껴지십니까? 바울의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무려 14일 동안이나 먹지 못하고 자지 못했습니다. 거의 비몽사몽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나아가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첫 말씀이 무엇입니까?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너는 가이사 앞에 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4일 간이나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함으로 완전히 기력이 상실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사명을 일깨워 주십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너는 가이사 앞에 서야 돼.’

바꿔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런 위기 가운데서 살려 두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바울이 감당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이 그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주변 바다의 풍랑이 그를 죽이거나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엄청난 풍랑은 두 주 간이나 겪으면서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풍랑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랑은 조금도 바울의 생명을 상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생명의 주관자는 바로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의 사명을 잊지 않고 감당할 바울은 그 사명으로 인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사를 잘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잘 된다 못 된다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하늘을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기근이 들었을 때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간 사르밧 과부에게 하나님은 그의 기름병이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게 하셨습니다(왕상17장). 주를 위해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 주십니다. 사명을 따라 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오늘날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으십시오.


마지막으로 11절을 봅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 뜻대로 주신다’는 말을 다른 성경은 ‘성령님은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이런 은혜의 선물을 나누어 주신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은사를 주시는 것은 성령님의 전적인 권한입니다. 누구에게 무슨 은사를 주시느냐 하는 것은 성령께서 전적으로 그 분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 결정하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의 요구나 간청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섬기는 은사를 주시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의 은사를 주시기도 합니다. 본문 11절을 잘 보십시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은사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해서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인 권한으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은사를 발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은사를 잘 개발할 책임과 감당할 사명이 있습니다. 은사는 사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라고 주셨습니다. 남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도, 우리가 여전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경제적 위기의식으로 두려움에 움츠러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내 인생을 다시 주님 앞에 드리는 헌신입니다. 무려 열 나흘이나 유라굴로 풍랑 속에 고난을 겪고 있더라도 결코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으면 그 일을 다할 때까지 죽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입니다. 위기 가운데서도 건지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 못하는 우상’은 우리를 모두 한 웅덩이에 빠지게 합니다. 경제적 위기의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 거리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고, 결국 삶을 포기하게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 확신을 가지십시오.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가고, 절망하게 하지만,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기억할 때 주님은 우리를 놀라운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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