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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가나안 진입을 보면서 두려움을 갖던 모압은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해서라도 자기 나라에 대한 위협을 이겨보려고 발람이라는 사람을 초청해서 저주를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난데없이 오늘 본문으로 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로 인해 음행의 죄를 짓습니다. 모압 여자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꼬드겨서 모압의 신들에게 제사하는 자리에 초청했고, 그들에게 맛난 음식을 대접하면서 자기 신들에게 절하여 제사하도록 유혹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방에는 대부분 이방신을 섬기는데는 성적인 문란이 함께 따라왔습니다. 이런 모습은 대부분의 지방 어디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의 고대 민속신아을 보면 그 안에 성적인 상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가나안 주변 지방에는 이런 일들이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강했고 문란했었던 것 같습니다.

모압은 여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합니다. 그들을 자기들의 성전으로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하고 제사에 참여시켰으며, 성적인 문란한 행위를 했습니다. 그것이 모압 민족에게는 종교적 행위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치명적인 죄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죄 가운데 빠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거룩함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고, 민수기는 광야의 힘든 삶의 자리에서 그들이 지켜야 하는 것이 곧 거룩함이라는 사실을 실제의 삶 가운데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에게 유혹을 받아 너도 나도 그곳으로 달려가서 그들의 제의에 참여하고 그들의 대접을 받으면서 신상들에게 절하고 음행을 함으로 그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죄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치명적인 함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압이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해집니다. 여기서 발람의 역할이 있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발람이라는 사람은 모압의 초청을 받아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요청받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발람이 마지막으로 모압 지방을 떠나면서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있는 한 가지 비방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그들을 저주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큰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2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2:14)

그래서 민수기 3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영적으로 재정비하게 하신 후 미디안을 치라고 하시면서 발람도 함께 죽게 했습니다. 발람이라는 사람은 본래 사술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야웨 종교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음행과 우상숭배로 끌어들여 멸망시키려고 도모한 것입니다.

그래서 발람의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여자들의 꾀임이 빠져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육체적 쾌락을 즐기고 영적인 타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이스라엘 진영 전체를 다시 한 번 완전히 혼란의 도가리로 만들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고, 이스라엘 진영에는 무려 24,000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내리신 염병으로 죽어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적어도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 일이 발람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면 왜 본장에서 발람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일이 모압 여자들의 유혹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들을 먼저 심판하셨어야 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신체로 먼저 자기 백성들을 향해 수 많은 사람들을 염병으로 쓸어가시는 것입니다. 마치 옛날 어른들이 자기 자식이 남의 자식과 싸우면 분명 잘못은 남의 자식이 했어도 내 자식을 먼저 혼내시던 모습과 흡사합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은 사실 하나의 초점에서 만납니다. 즉 하나님은 이 문제의 원인 제공자가 발람이었다는 사실을 민수기 31장에서 슬쩍 비추시고, 요한계시록, 즉 성경 제일 끝에 가서 그 정체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먼저 안타까워하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타락입니다. 죄로 인해 어이없이 무너지는 자기 백성의 모습을 주님을 치유하셔야만 했었습니다. 모압 백성들이 나빴든, 그들의 술책이 교활했든,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거룩함을 지켰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유혹하고 타락하게 하는 영적, 육적 공격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쩌면 오늘날은 더 많은 것들이 성도들의 몸과 정신, 영적인 삶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세상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인터넷을 들어가면 수많은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과 혼을 빼앗아가는 일들이 나타납니다. 물질과 신앙을 혼란으로 빠트립니다. 수많은 곤경으로 빠져가게 합니다. 수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서서히 이런 세상적인 일들에 빠져들어 간다고 많은 사람들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압 여자들에게 빠져서 죄를 범하는 이스라엘에게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 중에 죄에 빠진 자들을 태양을 향해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라고 말씀합니다. 모세는 이 명령을 받아 각 사사들, 즉 천부장과 백부장, 오십부장과 같이 군대 장군들로 하여금 바알에게 매수된 사람들을 모두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죽이는 것을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처음 대하게 되면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전쟁 기록에 대해 놀라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범죄한 일로 인해 자기 백성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란한 일을 행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픈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십니다. 그들을 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을 매어 달라고 하십니다. 아픈 현실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더욱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십자군 전쟁과 같이  바르지 못하게 피를 흘린 역사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성경을 바르게 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정직하게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들을 죽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악을 끊어야 했습니다. 생명을 위해 몸의 죽은 부분을 도려내야 합니다.

우리의 다리가 썩어가면 의사는 그 다리를 자릅니다. 다리를 살리려다는 몸 전체가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살기 위해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하면 아프지만,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누구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영적으로 병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잘라 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잘라내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교회만은 세상의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에 누룩같이 번지는 죄의 영향을 보면서도 그것을 도려내지 못합니다.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긍휼히 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졌습니다. 죄에 대해 저항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무조건 달래고 무조건 위로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도려내야 하는 상처를 그냥 가지고 있습니다. 상처좀 보자고 하면 아프다고, 건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죄와 더러움은 계속 공동체 안에 번져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몸과 영혼 깊은 곳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인줄 압니다. 결국 오늘날 교회는 굶주리고 상처받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져서 고통 당하고 있고, 더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곧 교회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세상에서 받지 못한 대접을 교회에 와서 받으려고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결국 교회는 점차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더 감싸야 하지 않겠냐고… 속에 무슨 상처가 곪아터져도 무조건 감싸야 한다고만 말합니다. 상처좀 보자고 하면 너무 아프다고, 건들이지 말라고,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고 하면서 진총제만을 원합니다. 한 두 마디의 격려성 메세지로 한 주간의 통증을 잊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잘 될거야. 잘 될거야. 하면서 살아갑니다.


더 안타까운 일이 이어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기들의 죄로 인해 곪아터지고 상처입은 자들이 있는데,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그 일을 자행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온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 죄로 인해 징계를 받고 있습디다. 수많은 사람들이 염병으로 죽어갑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여서 울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시므온 지파의 한 족장이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본래 미디안 족속은 모세의 장인이 속한 족속입니다. 그들은 시내산 동편에 살고 있는데, 아마도 그들 중 일부가 북쪽으로 올라와서 모압과 통합된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그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지금 죄로 인해 염병으로 죽어가고 있고, 이런 슬픔으로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족장이라는 자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사람이 한 번 죄에 빠지면 좌우를 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무감각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무뎌집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어집니다.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멈춰야 할 때도 멈출 수 없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 수 없습니다.


비느하스가 이 일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따라 들어가 두 남여를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죄에 대한 분노가 비느하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민수기 2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사건이 정리된 후 다시 한 번 인구조사를 합니다. 40년 전에 했던 조사를 다시 하는데, 어느 지파는 인구가 조금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든 지파도 있습니다. 일곱 지파가 늘어났고, 다섯 지파가 줄었습니다. 그런데 치명적으로 줄어든 지파가 있습니다. 그 지파가 바로 시므온 지파입니다.

시므온 지파가 40년 전 애굽에서 처음 나왔을 때는 59,300명이었는데, 40년이 거의 지난 지금 다시 조사한 바로는 22,200명이었습니다. 거의 3분의 1로 줄어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큰 재앙으로 인해 울고 있을 때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자기 형제의 장막으로 들어가던 사람이 바로 시므온 지파였습니다. 그런 것으로 보아 아마도 모압 여인들에게 유혹을 받아 죄를 지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므온 지파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들은 이 일로 거의 지파 전체가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이 일 이후로 스므온 지파는 거의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받을 때도 자기 땅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땅을 찾아갈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득이 유다 지파가 이미 확보해 놓은 땅을 얻었습니다. 자기 지파의 경계가 없습니다. 유다 지파의 보호를 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지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죄에 대한 경각심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분노가 없습니다. 죄에 자꾸 빠져드는 자신을 용납하고 용서하라고만 합니다. 그리고 정말 결단하고 주님 앞에서 서려는 몸부림을 없어졌습니다.

본문에서 비느하스는 이 두 사람의 범죄의 모습을 보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따라 들어가 그 두 남녀을 죽입니다. 죄에 대한 분노가 비느하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이 마음이 필요합니다. 비느하스의 분노가 필요합니다. 죄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창세기 4장 7절에서 하나님은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의 문앞에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노리고 우리가 문을 열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성도는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로마서 6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마태복음 5장 29-3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오늘날 교회에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죄를 멀리하는 결단입니다. 죄와 단절되는 결단입니다. 11-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죄로 인해 혼탁해진 이스라엘 진영에 여호와의 열심으로 죄를 처단하는 것을 보시고는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와 그의 자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연약을 주겠노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비느하스는 아론의 장손자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은 당연한 일이 될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로 하여금 영원한 제사장 가문으로 세우신다는 약속을 확실하게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세우셨음을 믿습니다. 이미 31년 전에 샬롯츠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말씀을 공부하면서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런 결단으로 주님 앞에 다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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