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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조상들을 통해 약속하셨던 그 땅을 얻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말 엄청나게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함께 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는 말은 그냥 그들의 요구를 있는 그대로 100% 들으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엄마 아빠가 자기의 요구를 잘 들어줄 때만 자기를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장성하게 되면 때로는 꾸중과 매를 맞을 때조차도 부모님이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도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우리의 응석을 받아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때로는 꾸중을 하시기도 하고, 마음이 상하는 적도 있고,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매를 대실 때도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이 있기도 하고, 막다른 골목으로 우리를 몰아가시기도 합니다.

그 목적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의 소원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민수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부터 시작해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 과정 중에 결정적으로 몇 가지 큰 사건, 아주 큰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가나안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그 중에 10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서 ‘가나안으로 갈 수 없다’. ‘가지 말자,’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극에 달했습니다. 모세는 돌아갈 수 없으니 새로운 지도자를 뽑자는 여론까지 확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10명의 부정적인 보고자들이 죽고, 이 사건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져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는 급하게 가나안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지만, 이로 인해 다시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 후 고라를 중심으로 한 레위지파와 르우벤 지파의 수장들이 250명의 족장들을 모아서 모세와 아론을 배반했습니다. 이 일로 250명의 족장들과 주모자들이 지진과 여호와의 불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어서 250명의 지도자(족장)들을 잃은 백성들은 그 책임을 다시 모세와 아론에게 돌리고, 책임을 묻자 하나님은 다시 백성들에게 염병(전염병)이 돌게 하셔서 14,700명을 죽게 하셨습니다. 이런 사건들이 민수기 13장 이하 16장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절망하기 시작합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한 철학자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있고, 그 절망은 그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죽음의 엄청난 힘에 눌리게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가 덮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가나안에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비록 나이가 들었어도 가나안 땅을 한 번 밟아보고 죽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힘들어도 참았고, 그런 소망과 비전은 그들에게 더 강한 생명력을 주기에 충분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해 가나안 입성을 40년이나 늦춘다는 선언을 하십니다. 이것은 상당수 사람들에게, 아니 성경에 있는 그대로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 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바라볼 것이 없어졌습니다. 갑자기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지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근본적인 이유는 광야 생활 40년을 선언하시고, 20세 이상 된 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언은 실제의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큰 절망을 가져오게 했고, 더 이상 삶과 생명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면서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이 때부터 알 수 없는 일들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 죽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러가지 질병과 재난으로 죽는 사람들도 꾸준히 생겨났습니다.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의 남자들 605,330명이 나왔습니다. 물론 여자들도 죽었겠지만, 이들 수만 본다고 해도 이 많은 수의 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죽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60만명이 40년 동안 죽는다면 1년에 15,000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하루에 약 40명이 죽었습니다. 한 달에 1,200명이 죽었습니다. 거기에 여자들의 수를 합하면 단순하게 계산해도 두 배의 수가 됩니다.

그들은 매일 죽음을 보고 경험합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의 이유가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변의 죽음을 볼 때마다 결국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소망은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매일 해야할 일은 단지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뿐이었습니다. 죽음을 보면서 절망하지만, 사실은 절망하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이유가 더 컸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딜레마를 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모양 이대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사사기를 보면 알지만, 출애굽 1세는 다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광야세대들만 모여서 가나안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이방인들로부터 영향을 지나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자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렸었습니다.

그런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직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신뢰하지도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대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흔적도 없이 가나안 족속들에게 동화되어 버리고 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프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한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오도록 기다리셨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광야 죽음의 영향이 너무도 컸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죽음과 절망, 패배감의 기운이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매일 시체를 보고 처리해야 하는 그들의 일상은 모든 사람이 어차피 다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선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변에 죽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눈으로 보고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더 큰 절망으로 빠지게 했습니다.


죽음을 자주 접하다 보면 죽은 자를 보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보는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목사입니다. 장례를 집례할 때마다 매번 죽은 이와 죽은 이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다 보면 그런 죽음이 담담하게 와 닿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집니다.

여기에 두 가지 현상이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는 죽음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를 만지거나 대하는 것이 그렇게 무섭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아마도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게 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자를 대하는 일에 익숙해지게 되었고, 그래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그렇게 멀게 느끼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당시 광야에서 매우 위험한 일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위생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죽은 자로부터 오는 질병의 문제는 매우 심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여성들의 출산 후 오는 산욕열이 처음 시작한 것은 죽은 자를 다루던 의사가 바로 출산을 도왔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패를 위한 특별한 대책을 가지고 있지 않던 고대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수 없이 나오는 시신을 처리하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죽은 자에 대한 익숙함이 오히려 그들의 생명을 또 다시 위협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현상은 죽은 자를 장례지낼 때마다 느끼는 죽음에 대한 절망입니다. 목사가 되어 장례를 자주 집례할 때조차도 장례를 지낼 때 느끼는 아주 깊은 절망, 허망함을 경험합니다. 그 중에 첫 번째가 바로 죽자 마자 입니다. 심방이나 다른 일로 바쁘다가도 성도의 죽음의 소식은 목회자에게 제일 일순위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중단하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먼저 간단히 말씀을 보고 위로합니다. 그런 후 장례에 대한 진행을 의논하고 필요한 도움을 줍니다. 때때로 집에서 돌아가셨을 때는 병원과 경찰에 알리고, 또 간단한 염도 합니다. 이 때 우선 죽음에 대한 허무함을 경험합니다.

두 번째 느끼는 절망은 입관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요즘은 한국 같은 경우는 병원에서 워낙 잘 하기 때문에 아주 깨끗하게 하고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게 합니다. 유족들이 보는 가운데 수의를 입히는데,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매우 전문적인 사람들이라서 보는 이로 하여금 위로를 받게 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얼굴에 간단한 화장까지 하고, 머리에 빗질을 한 후 유족들로 하여금 한 마디씩 하게 합니다. 그렇게 모든 유족들이 한 마디씩 하고 나면 병원의 수의를 입히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수의로 얼굴을 가립니다. 얼굴을 감쌀 때 그 짧은 순간 죽음이 무엇인지를 느낍니다. 수의로 가려진 얼굴을 보는 것은 정말 ‘이것이 죽음이구나’라고 느끼게 합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이 마음에 찾아옵니다.

세 번째가 발인예배와 하관예배 때입니다. 하관예배 때 고인의 시신이 땅 밑 깊은 곳까지 내려 안치하고 흙을 뿌리고 덮을 때 더 이상 다시 보지 못하겠구나 라고 생각할 때 꼭 유족이 아니더라도 죽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런 절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죽은 자의 부패로 인해 오는 육체적 질병 혹은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또 하나는 죽은 자를 장사할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 찾아오는 영혼의 절망감입니다. 이런 절망을 매일 경험해야 한 것입니다. 이런 절망감은 이전에 가나안 정탐의 실패나 고라 일당의 배반으로 통해 왔던 이스라엘 민족의 혼란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더 이상 무슨 반역을 할 힘도 없었겠지만, 이젠 무엇을 하자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영혼 깊숙이 파고 드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시대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도 광야 세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이 땅에는 지금도 여전히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던 그런 반신앙적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능력하고 광야에 40년을 머물면서 어떤 길도 제시하지 못하는 모세와 아론을 향해 그대로 있을 수 없는 백성들의 답답한 모습이 반역으로 나왔던 것처럼 오늘날 이 시대에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날마다 죽음을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절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존의 문제입니다. 광야에서 죽은 자를 장사하면서 그들이 느끼는 절망, 결국 나도 이렇게 죽을 것이고, 더 이상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는 절망감이 그들의 영혼을 갉아먹듯이, 그렇게 오늘날도 세상은 사람들의 영혼 깊은 곳에 깊은 절망과 탄식을 갖게 합니다. 몰려오는 절망감을 피해갈 방법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인가요? 사람들의 절망을 봅니다.


주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만들게 합니다. 암송아지를 잡아서 불에 태우는데, 그것은 온전한 것으로 흠이 없어야 하고, 붉은 것이어야 하고, 또 한 번도 멍에를 매어보지 않은 것이어야 했습니다. 이런 암송아지는 흔하지 않았습니다. 세심하게 골라서 택해서, 그것을 성문 밖으로 가지고 가서,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게 하고,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함께 암송아지와 함께 살라서 그 재를 잘 거둡니다. 그리고 그 재를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습니다. 그런 후 죽은 자로 인해 부정해진 사람이 있을 때마다 제 삼일과 제 칠일에 그들의 몸에 우슬초로 그 물을 찍어서 그 몸에 뿌리게 했습니다.

시체를 만졌을 때마다 그들은 이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시체를 만지고도 이 예식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정결입니다. 당시 그들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광야는 물을 쉽게 구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자기 몸을 씻으라고 하면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시하고 자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런 일은 곧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큰 재앙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을 부어주는 것도 아니고 우슬초로 찍어서 뿌려준다고 하니 그것으로 얼마나 그들의 몸을 씻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광야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살리는 가장 최선의 대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 그들은 스스로 정결해야 한다는 것을 늘 의식하게 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예식은 그들을 육체적으로 정결하게 지켜줬음에 틀림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영적인 문제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들은 죽음의 사건을 볼 때마다 흔히 경험하는 죽음의 의미 이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자신들도 조상들이 죽었던 것과 같은 죄로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준행합니다. 우슬초로 이 물을 찍어서 자기 몸에 뿌렸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식이었습니다. 속죄제라고 본문은 표현합니다. 이것이 예식이라는 말은 단지 육체적인 정결함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의 사건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예식이었습니다. 이 예식을 행하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정결하게 하셨다는 하나의 선언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선언을 역설적으로 본문에서는 이 예식을 하지 않는 자가 끊쳐질 것이라고, 죽게 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예식을 잘 알고 있던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 자기 죄로 인해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기도하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51:7).”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선언을 소망하는 다윗의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피를 흘리시고 하나의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체와 영혼을 갉아먹는 죽음의 세력을 이 속죄제를 통해 회복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것처럼, 오늘 주님은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생명력을 불어넣으십니다.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을 경험할 때마다 그들은 제사장이 만들어 준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뿌려서 자신의 정결함을,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유해졌음을 계속 확인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광야를 통과합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어느 날 시체로부터 오는 부패된 병균이 아니더라도 이미 마음의 질병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인 절망의 포로가 되어 결국 죽어버리고 말 것이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광야입니다. 얼마나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일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죽음이 무엇인지를 보게 합니다. 실패가 무엇인지 보게 하고, 낙심과 패배감에 휩싸이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늘 주님께로 돌아와서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뿌려서 정결함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정결함을 받은 존재이다. 하나님은 나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큐티를 의미합니다.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날마다 정결함을 얻어야 합니다. 그저 몇 방울 떨어지는 물 같지만, 사망의 그늘이 우리를 덮을 때마다 지속적으로, 한 번도 빼놓지 말고, 하루도 거르지 말고 말씀의 생명수로 우리를 정결케 하는 것이 곧 승리의 길입니다. 거룩함을 다시 강조하시는 오늘의 말씀을 봅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오늘 우리 모두를 정결케 하십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세상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본래 광야입니다. 개스 값도 올라가서 삶의 위기가 찾아오고 주변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덮어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때 승리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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