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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수 백년 동안 노예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노예로 살면서 그들 안에는 노예 의식(근성)이 있었습니다. 노예 근성은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늘 의심하고 눈치 보고 좀 더 편한 것을 찾아 다닙니다. 그들에게 내일이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라는 일만 하면 되고, 주는 음식만 먹으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살면서 그들의 이런 삶의 태도는 거의 본성적으로 몸에 배어 갔습니다. 그런 습성은 쉽게 변화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옛날 한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야곱이라는 자기 선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희미하게나 들었을 것입니다. 그 야곱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었고, 그의 아들 요셉이라는 사람은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이 애굽 나라의 총리였다는 소리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노예로 살아가는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민족, 어느 종족치고 그런 전설 한 두 개 없는 종족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부르신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성경에서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나 솔로몬 때쯤해서 만들어진 백성의 모습이 아니었고,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처럼 그렇게 작지만 세계를 이면에서 움직이는 엄청난 힘을 가진 민족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노예였고, 노예의식을 가지고 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노예들을 부르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부르셨습니까? 그들을 바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그리고 야곱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430년이 지난 오늘, 하나님은 노예가 다 되어 버린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가나안은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왔던 곳이고,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좇았던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들의 후손, 엄청나게 불어난 한 민족, 하지만 노예근성으로 길들어진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

3개월에 걸쳐서 시내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습니다. 성막을 건조합니다. 남자만 603,550명의 사람들을 군대처럼 조직합니다. 이런 것들은 앞으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가기 위한 준비들이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미래지향적인 일들이었습니다. 노예근성으로 찌들려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민으로 장차 세상의 모든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백성이 되도록 인도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호기이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 기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참여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율법을 주셔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준수하게 합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오늘날 사람들도 깝깝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들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들에게는 삶의 법칙들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필요했습니다.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흔들리거나 주저앉지 않는 줏대있고, 강한 백성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광야를 통과할 수 있고, 가나안에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군대로 조직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이제까지는 노예로 살았습니다. 군대는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동안은 늘 감시 받으면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군대를 조직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다른 민족이 자신들을 침범하거나 억압하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 일들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도전하셨습니다.

셋째로 성막을 주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인도를 받았습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과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막을 만들고, 하나님께 그것을 봉헌하는 예식을 하는 장면입니다. 84절을 보면, 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막을 짓고, 그 안에 들어가는 물건/기구들을 만들어서 그 물건들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기름을 바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일입니다. 봉헌식입니다. 비로서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성막과 그 성물들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것이고, 거룩하게 다뤄야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거의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성막 봉헌식에서 하나님은 각 지파의 족장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도록 했습니다. 1-9절에는 족장들이 레위인들이 쓸 수 있는 12마리의 소와 지붕 덮인 수레 여섯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각 지파별로 많은 예물을 드립니다. 매 지파마다 동일한 양의 봉헌 예물과 번제물, 속죄 제물, 화목 제물을 드렸습니다. 똑 같은 이야기를 각 지파 당 6절씩 12번 반복해서 72절에 거쳐 (12-83절까지) 묘사해 줍니다. 그리고 본문 84절부터 88절까지는 그 총계를 다시 정리해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앞에서 언급했던 율법수여와 군대조직, 그리고 성막 봉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려던 메세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것이고, 둘째는 너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몸은 애굽에서 나왔지만 그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는 아직도 여전히 노예근성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진정한 당신의 자녀로 삼고 싶으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품위있는 자녀가 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는 노예근성이 있었습니다. 노예근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피지배자의 심리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늘 의심하고 눈치 보며 좀 더 편한 자리만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에게 내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하라는 일만 하면 되고, 주는 것을 받아 먹을 뿐이었습니다.  이것들은 그들의 몸에 완전히 배어 있었습니다.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하나 더 그들에게 예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족장들이 이 예물을 드렸습니다. 잘 살펴보면 적지 않는 예물이었습니다. 그것들은 그들이 드릴 수 있는 최대의 것이었습니다. 이 예물을 드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재물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기에 보면 나올 때 주변 이웃들로부터 은, 금 패물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마도 그런 것들이었을 것있습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광야에 있습니다. 광야는 내일이 없는 곳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날는지 모릅니다. 양식이 부족하면 주변 민족들에게라도 찾아가서 그 물건들을 주고 양식이라도 얻어와야 할 것입니다. 아직은 뚜렷하게 민족의 살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을 드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미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예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남에게 뭔가를 주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늘 받아만 보았습니다. 종으로, 노예로 살면서 언제나 주인이 주는 것만을 받아 먹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습성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받친 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잘 보이려고, 좀 더 편한 자리에서 일해 보려고 하는 뇌물성 상납뿐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 그냥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대가를 기대하지 않으면서 드리거나 나눠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 백년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만들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줄 줄 아는 백성이 되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었고, 선민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을 통해 온 민족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눠주는 민족을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요함을 나누고 싶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이십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을 만드셨나요? 당신의 부요함을 나누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풍성함입니다. 그렇게 나눌 때 하나님은 그 빈 자리에 당신의 기쁨과 감사와 능력과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다소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받는 것에 더 익숙해져 갑니다. 하나님은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맞습니다. 거기까지는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도 주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자신의 삶이 광야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날 다소 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요하심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요케 하시는 것은 인간의 죄성으로부터 오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찾고 요구하면서 먹을 것이 넘쳐서, (아프리카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체중관리가 필요한 삶을 살면서도 부족하다고 떼를 쓰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더 줘서 부요케 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순간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모든 것이 다 충족된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불편한 것도 많았습니다. 광야의 삶이 어떻게 만족스러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광야에 비가 내리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보았던 지배자들처럼 그렇게 부요하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만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하루 먹을 양식이었습니다. 내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셨던 것은 광야에서조차도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율법 중에는 추수할 때 밭의 네 모서리에 있는 곡식들은 추수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난한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왜 가난한 자가 있게 하시는가? 가난한 자들에게 동일하게 복을 주셔서 넉넉하게 하시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주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베푸는 사랑을 지닌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는 다른 사람들의 사랑의 베품을 통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경험하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게 살아갑니다. 왜 어려울까요? 이곳에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삶은 어려운 법입니다. 광야에 살면서 편안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광야를 많이 다녀본 대상과 같은 사람들은 광야의 불편함을 잘 압니다. 그래서 왠만하면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광야를 통과하면 쉴 수 있습니다. 광야에 있는 동안은 가능한 짐을 줄이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것은 광야의 삶을 더 불편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무엇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여행을 처음 해 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건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와도 가 보면 부족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근성에 매여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물을 요구하십니다. 그들이 어디서 이런 많은 예물이 있었습니까? 광야에서는 삶을 얼마간 더 살아야 하는데, 이것들을 다 내어 놓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내어 놓을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 비로소 됩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밭의 네 모퉁이를 남겨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유인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사람이 지닐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노예 근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전에는 마귀의 노예이었습니다. 늘 불안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 놓아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높은 신분을 지녀도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높은 신분, 더 많은 재물을 구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인의 삶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때 나타납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내려 놓고 나눌 때 진정한 은혜와 복이 임합니다. 이런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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