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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는 항상 주변에 이교적인 배경에서 자라갔습니다. 대부분의 교회 성도들은 이방종교의 영향 하에 살아왔던 사람들이고, 또 여전히 그런 습관과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지만, 또 한편으로는 언제라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쉽게 동화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이미 우리 안에 불신앙적인 모습과 비성경적인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5월 5일 타계한 밀드레드 러빙(Mildred Loving)이라는 한 흑인여성은 1958년에 당시 미국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는 백인 리처드 러빙과 결혼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버지니아 주에서 추방당했습니다. 향수에 시달린 그들은 자신들의 추방이 위헌임을 증명하기 위해 소송을 했고, 결국 결혼한 지 9년 후에 ‘인종간 결혼금지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1958년 당시 한 법원에서 읽혀진 판사의 판결문 중에는 18세기에 Blumenbach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인종에 대한 언급이 다시 읽혀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인과 흑인, 황인과 말레이인들을 창조하셨고 그들을 각기 다른 대륙으로 갈라 놓으셨다. 하나님의 이같은 배치를 거스리며 결혼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 하나님이 인종을 떨어뜨려 놓으신 것은 그들의 혼합을 의도하지 않으셨다는 증거다.”

어떻게 기독교 정신 위에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선언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흔히 기독교적 문화라고 하는 표현들 속에 담겨있는 사상들이 진정으로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속에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수없이 한다고 해서 그것을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반기독교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전반부(1-7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되,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 4번이나 나옵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르 원하시다고 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속전(속죄물)으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디모데가 지금 목회하는 곳은 에베소입니다. 에베소는 사도 바울이 일찍이 3년간 목회를 한 곳입니다. 그들은 기도할 줄 알았고 구원에 대해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기독교적인 삶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기 원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7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당시 왕은 네로 황제를 지칭합니다. 기독교를 가장 혹독하게 핍박한 로마 황제 중에 가장 두드러진 네로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시대 대부분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권력은 언제나 부패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런 점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도 권력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도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임금들을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여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파하던 사도들은 하루에 3,000명씩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를 맛보았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을 더이상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에 임한 엄청난 심판으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흩어지게 되었고, 가는 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놀라운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인해 예루살렘 지도자들 중에 심각한 회의가 있었습니다(예루살렘 회의, 사도행전 15장).

교회는 황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그것이 예루살렘 안에 머문다면 그것은 유대교이지, 기독교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우리의 평안과 복을 위해서만 기도한다면 그것은 이익단체는 될 수 있어도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백인과 흑인, 황인을 따로 살도록 구분한 것이 곧 그들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차별적 가치관 형성을 만들어내는 기독교는 기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영역은 말씀을 따라, 말씀 안에서 자꾸 넓어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비추며 믿음 안에 자신을 세워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어지는 본문(8-15절)에서 남자들은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고, 여자들은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고 권면하는 등 만은 면에서 여성들의 삶에 대해 제한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사실 엿어들이 인류역사상 본격적으로 인격적 대우를 받던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안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빌립보 교회의 두드러진 두 여성 지도자들이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남편보다 부인이 더 영향력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사 드보라는 바락이라는 장군을 세워 가나안 왕 야빈의 공격을 막아내는 엄청난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빌립은 4명의 딸이 있었는데, 모두 예언자였습니다. 또한 디도서 2장 3절에는 나이 많은 여자들로 하여금 선한 것을 가르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결론맺는 바울의 언급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매우 다른 다른 분위기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시 특별한 배경 아래서 쓰여졌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에는 아프로디테라는 유명한 신전이 있었고, 그 안에는 남여간의 성적 결합을 제의의식을 삼는 이들의 성창제도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1000여명의 여자 사제들, 즉 창녀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남자들을 유혹했고, 아프로디테 신전에 들어가 성적 문란을 일삼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고린도뿐만 아니라 에베소에도 디아나(Diana)라는 신전이 있어쏘, 멜리쌔(Melissae, 뜻: 꿀벌)라는 수백명의 여승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기능도 고린도와 동일하게 매음행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에 사는 여성들은 매우 밀폐된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들은 남편 외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자신만의 거처에 거하곤 했습니다. 그런 여성들이 공공집회에서 자신을 들어내는 것을 결코 좋은 모습으로 인식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지역인 에베소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인과 종이 하나이며, 남자와 여자가 하나였습니다. 그들 안에 신분적 차별은 있었어도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인 차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밖에서 볼 때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다분히 고린도 아프로디테 신전에 있는 성창들, 그리고 에베소 디아나 신전에 있는 성창들과 조금도 다르게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비난받을 상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린도서에는 여성들에게 머리에 수건을 쓰고 머리를 가리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는 여자들은 당시 성창들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참된 은혜와 능력을 맛본 자들입니다. 그들은 종과 주인이 만나도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별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분명 복음의 능력이었고, 복음으로 인해 그들이 누리는 특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특권을 다시 내려놓을 때가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복음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다시 그런 권리를 내려놓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고 말씀한 사도 바울의 성숙함을 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언급한다고 그것이 곧 복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언급하면서도 전혀 비복음적, 비성경적인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복음은 복음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다시 내려놓을 때 가능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 특권을 주님 앞에 다시 내려놓음으로 주님께서 허락하신 더 놀라운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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