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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수르 나라가 북 이스라엘을 주전 722년에 멸망시키고, 남 유다 예루살렘을 결정적으로 공격한 때는 주전 701년이었습니다. 이 20년 동안 앗수르는 남 유다를 비롯해서 주변 민족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공격했습니다. 이러는 동안 남 유다 민족에게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는 앗수르 나라가 매우 빈번하게 평화협정을 위반하는 일이었습니다. 앗수르는 남 유다 민족에게 평화를 약속하는 대가로 수많은 금은보화를 받아갔지만, 번번히 그 약속을 깨고 다시 더 큰 것을 요구했고, 결국은 나라 전체를 멸망시킬 음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7-9절에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유다 민족이 견뎌야만 했던 고통과 아픔을 그려줍니다. 남 유다 민족의 군사대표들이 앗수르 군대 장군들을 만나 협화평접을 맺었지만, 실패하거나 혹은 뒤늦게 다시 그 협정을 깨버리는 앗수르로 인해 이스라엘의 용사들은 밖에서 부르짖었고, 평화의 사신들은 슬프게 곡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 숨어 있어 거리를 다니는 행인들을 찾아볼 수 없었고, 대적들은 조약을 파기하였고, 성읍들은 모두 황폐화되어 갔습니다. 땅에 슬퍼하고 레바논의 무성한 삼림도 전란으로 병들어갔으며, 샤론의 비옥한 평야도 사막과 같이 메말라갔고, 과수원이 많은 바산과 갈멜산도 나뭇잎이 떨어져 벌거숭이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으면서 파괴된 현장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상황에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순간입니다. 1-6절은 이사야 선지자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확신에 찬 기도가 나오고, 7-9절은 그 동안 전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이스라엘의 형편을 보여주며, 10-16절은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상황입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이우리니” 드디어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당신의 모습을 높이시고 앗수르를 멸하시며 당신의 백성들을 세우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지금에 와서야 역사하시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을 보시면서도 이렇게 늦게까지 기다리셨을까요? 하나님은 언제나 늘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몰아가시는 분이십니까? 마치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취미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계속 책망과 징계의 말씀들을 주로 주셨습니다. 그들의 영적 무지와 외식함, 불신앙 등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책망의 대상들은 앗수르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와서 그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이 짧은 한 구절 안에 ‘우리’라는 표현이 4번이나 나옵니다.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우리가 주를 사모합니다.’

이사야의 이 기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그들은 드디어 하나가 되어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하나님께서 언제 역사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라고 말할 수 있을 때였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들은 철저히 공동체적인 구원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공동체적 구원의 역사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매일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고, 그러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그 기도를 들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실 수 있을까요? 교회에서 성도들이 하나되지 못하여 마음이 나누이고 가슴에 상처만 쌓아가며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한 역사를 이루실 수 있을까요?

천주교에 비해서 기독교(개신교)가 지닌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못됐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약점임에는 틀림없는 것입니다. 기독교(개신교)는 처음 생길 때부터 구교를 부정하면서 생겨났습니다. 천주교의 잘못된 교리와 타락한 모습을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탄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개신교)를 Protestant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개신교인 안에는 인정하든 안하든 상대방을 부정하려고 하는 의식이 저변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라는 인식이 부족합니다. 그대신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관심이 더 많습니다. 신학적으로 기독교는 두 가지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evangelical이고, 다른 하나는 ecumenical입니다. evangelical이라는 것은 복음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냐’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반면 ecumenical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교회는 주님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양자가 만나기가 그렇게도 어렵습니다. 대부분 어느 한 쪽을 더 강조하는 경향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니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우리’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 저 사람 좀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느헤미야는 포로기에 잡혀온 유다 민족의 후손으로 페르시아의 정부관리를 살아가던 중에 예루살렘에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나님께 재에 앉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와 내 조상의 죄를 용서하소서.” 그는 민족의 고통을 보면서 어쩌면 아직 한 번도 조국의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이민 3세 혹은 4세쯤 되는 사람이 이렇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조상과 자신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조상들이 지은 죄가 바로 자신의 죄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 민족의 고통은 자기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 민족, 자기 조상, 자기 자신이 이렇게 하나가 되어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드리는 그의 기도가 얼마나 파워가 있었는지를 성경은 보여줍니다.

다윗이 자신의 교만으로 인구조사를 했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징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무려 7만명이나 죽었습니다. 이럴 때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범죄하고 악을 행한 이는 내가 아니니이까?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가? 하나님이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소서.” 이것이 바로 ‘우리’ 의식입니다. 공동체 의식입니다. 이 고난이 나로 인해 왔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통회합니다.


우리가 ‘우리’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그 이유는 그들의 죄 문제였다고 말합니다. 영적 무감각과 외식, 그리고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너무도 많은 ‘의인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의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안에서 표출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겠다는 생각으로 표현됩니다. 영향력 있는 삶, 세상을 향해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로 자기의 의가 표현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 영향력 있는 사람을 살게 하소서.”

이런 생각은 요즘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인 리더십 이론으로부터 많이 나옵니다. 리더십의 정의를 봄녀 모든 정의에 빠짐 없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영향력입니다. 영향력을 주는 삶입니다. 리더십은 곧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리더십 이론은 기독교 안에서 매우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물론 리더십 이론은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한 지식과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해야 할 분야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봅시다. 영향력을 준다는 이 기본적인 리더십의 대전제가 과연 성경적인 사고인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안에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내 안에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리더십의 대부분의 내용은 오늘날 현대인에게 매우 중요한 점들을 가르쳐주고 있지만, 그러나 어떤 영향력을 주겠다는 전제는 성경적으로 옳은 전제는 아닙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저에게 당신의 목회철학이 무엇이냐고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때대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의 목회철학은 저의 목회가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 막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목사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점에서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목사의 지나친 열정, 혹은 목사의 빗나간 목회방향이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많이 경험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잠시 그 자리에서 내려앉아 조용히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고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더 놀라운 일들을 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최근 우리교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구석구석 신실하게 섬기시는 분들로 인해 교회가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보면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과 함께 같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향을 주겠다는 생각입니다. 좋게 표현하면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가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내가 변화시키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영향을 끼치겠다는 생각 저변에는 ‘자기의 의’가 있습니다. ‘자기의 의’는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지 못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라고 기도하는 대신, ‘하나님이시여! 저 사람에게 은혜를 주소서. 저 사람에게 변화가 필요합니다.’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7만 명이 죽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나인데, 어찌하여 이 양 무리를 치시나이까?’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7만 명의 백성들의 죽음이 다윗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갓이라는 선지자의 지적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다윗에게 나와 이 지적을 할 때 목숨을 걸고 나왔을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했다는 갓이라는 선지자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공개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논증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다윗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우리’라고 하는 범주 안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통치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백성들은 다윗에게 있어서 바로 ‘우리’였습니다. 자신은 죽어도 그들은 살려야 하는 그런 존재였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 백성들은 다윗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때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들어서 사용하셔서 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조차도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의 영향력이 목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사이를 구분하기는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깊이 살피고 말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라고 말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이우리라.”

우리는 우리 가정을 진정으로 ‘우리’라고 말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 모두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를 ‘우리’라고 말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의가 감추어지고 하나님이 들어나실 때 비로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 교회, 우리 가정, 우리 직장 공동체 안에 이런 은혜가 있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맞보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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