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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 말씀에는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도 이 그룹에 합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 사람들로 이루어졌음을 볼 때 사두개파 사람들도 이 부류에 합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에서는 이들이 예수께서 들려주신 비유 말씀이 자기들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인 것을 알고 잡으려고 했다고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말씀은 바로 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서 농부들에게 맡기고 타국에 가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종을 보내서 소출 중 얼마를 받아오라고 했는데, 농부들이 주지 않고 오히려 종을 때리고 능욕하며 거저 보냈습니다. 두 번째 보낸 종도 그렇게 하고, 세 번째 보낸 종도 그렇게 때리고 능욕해서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자기 아들은 농부들이 존경하고 대우해 주리라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농부들은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이 아들만 죽이면 포도원은 자기들 것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악한 일일까요? 주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 들어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악함을 책망하는 말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 비유 말씀에 그들은 연합해서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예리하고 날카로웠는지 모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저들은 평소에는 원수로 지내던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예수를 잡으로고 하나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매우 강할 때가 많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고, 또 ‘화 있을찐저’라고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책망을 들던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참지 못하고 돌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뛰어들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하고 어떻게 안 죽을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그렇게 말씀을 전하시가다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용기가 없고 확신이 없습니다. 용기 있는 목사가 되기를 원하고,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다가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교회와 성도님들도 그렇게 말씀 위에 서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가슴을 찌르는 말씀 앞에 설 때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성도와 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에서와 같이 신앙적인 도전을 받을 때 우리는 보통 두 가지 중 하나의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복합니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단순히 언어와 생활 방식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 자체가 바뀌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방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전적인 말씀을 들을 때 회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상황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방어기제를 세 가지로 보여줍니다.

첫 번째 방어는 위선입니다. 20절을 보면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잡으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위선이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허점을 찾기 위해 자신을 위장합니다. 위선은 신앙인이 범하기 가장 쉬운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매우 자주 바리새인들을 책망한 가장 주된 이유는 바로 그들의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어는 아부였습니다. 칭찬과 아첨을 하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상대방을 높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높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십자가에 죽일 음모를 가지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모든 경계심을 풀고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칭찬과 아부는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만큼 ‘처세’에 관심이 많은 시대도 없었습니다. 성공하는 인생을 위한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언제나 그런 책들이 책방의 제일 앞 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제목처럼 칭찬이 얼마나 큰 위력을 가졌는지 실감나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처세술 작가들은 상대방을 기꺼이 칭찬하라고 격려합니다. 그가 고객이든 심지어는 적이라고 해도 그들을 칭찬하기를 아끼지 말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러한 칭찬의 이면에는 언제나 자기의 성공과 이익, 자신의 목적성취만이 있을 뿐입니다. 결국 상대방 그 자체를 위한 칭찬이 아님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칭찬은 바로 2,000년 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방어는 함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앙적 도전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세 번째 모습은 바로 함정을 파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이것은 정말 기발한 발상을 가진 질문입니다. 존 맥아더는 이 질문은 그들이 정말로 공들여 만든 질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는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로마의 통치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정부에 세금을 바치고, 그들의 통치를 받는 것은 곧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포기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정부는 식민지 국가들을 통치하면서 세금을 거둬들였습니다. 그들이 거둬들인 세금 중에 인두세가 있었는데, 인두세는 일 년에 노동자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내는 것입니다. 거기에 쓰이는 화폐가 바로 ‘데나리온’이라는 동전이었습니다. 데나리온에는 앞 뒤 면에 각각 황제의 얼굴과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존엄한 신의 아들 티베리우스 가이사 아구스도’라고, 그리고 다른 한 면에는 ‘최고의 제사장’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라고 하는 질문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어느 대답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상대방을 모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지 않으며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향해 칼을 들이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음모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고 하시고는, 이 데나리온에 누구의 화상과 글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 때 예수님께서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당시 상황에서 정확하게 어떤 의미, 어떤 뉘앙스를 주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기대한 대답은 아마도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란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세계 최고의 일류국가를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경계하는 것이고, 또 그것이 무너지면 예수님은 메시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을 금하게 되면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자로 고발해서 자연스럽게 로마 정부의 힘을 빌려 예수를 처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유대인들의 소요도 막을 수 있고, 자신들도 유대 군중들로부터 계속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기대했던 대답을 비껴 가셨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대답에서 ‘바치라’는 말의 의미는 ‘원래의 주인에게로 되돌려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본래의 그것이 가이사의 것이었다면 가이사에게 되돌려주고, 또 그 뿐만 아니라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로마정부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충성될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었고, 또 만약 예수님의 이 말씀을 거부하면 그들이 곧 로마정부에 고소를 당할 상황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세 번째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국가관을 드러내 줍니다. 본문의 주된 메시지와는 다소 동떨어진 문제이지만,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국가관에 대해서는 로마서 13장과 디모데전서 2장 등에 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26절에 그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이것은 그들이 회개할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나을 수 없는 지략으로 정말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질문을 하고도 예수님의 대답에 오히려 놀라고 기이히 여기며 입을 다물었다면 이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하면서도 회개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자리에 여전히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이런 모습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이해합니다. 가슴으로도 깨닫습니다. 그런데 삶은 그렇게 따라가지 못합니다. 행동은 여전히 과거에 붙잡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삶의 방향을 바꿀 용기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지금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나를 너무 강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 사회적인 구조 속에서 강하게 얽혀있는 삶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은혜가 없는 것일까요? 왜 그렇게도 사모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느끼지만 삶은 여전히 그냥 여기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해 나갈 결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들에게도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과 같은 삶의 모습을 결국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의인인 체하고, 칭찬과 아부로 사람들을 움직이려고 애쓰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상대방을 함정에 몰아넣는 상황을 만들어 버립니다. 어느 편에 설 건가? 우리는 이 시간 결단해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다시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의 이끄심을 따라 머리와 가슴으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응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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