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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이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유대 사회의 종교적 사회적 지도층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시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수고하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말씀대로 살고,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고, 서기관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신학자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의외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나갔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원망의 이유는 물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생각과 행동, 사역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과 유대인과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은 예수님의 주변에는 늘 가난하고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 정말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삶의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초대교회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종교인들은 좀처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늘 예수님의 사역을 주시해서 보았고, 엿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저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언제부터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보통 이런 생각은 자기 민족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때부터 가지게 됩니다.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애국적인 마음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시비를 걸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도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수용합니다. 은혜를 받고 기쁨을 가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교회의 리더십이 생기고 조금 더 책임적인 자리에 서고, 교회의 구석구석이 보이게 되면 마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저러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대감이 떨어집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믿음의 감격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책임감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리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까이 나아옵니다. 재미있고 기쁘고 감격이 있습니다. 한 일 년은 무조건 은혜가 됩니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교회의 리더십이 생기고 조금 더 책임적인 자리에 서고, 교회의 구석구석이 보이게 되면 마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저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감격을 잃어갑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대감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처음 누렸던 기쁨과 감격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마음의 부담과 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재미있고 기쁘고 감격이 있었습니다. 듣고 또 들어도 좋았습니다. 우리도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다 이런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언제가부터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심리적 경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약 3년 정도가 지나면 대개는 이런 현상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변해하고 교회, 이렇게 변해가는 성도가 그런 흐름을 반대로 돌리지 못하면 교회와 성도는 더욱 더 비참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안 믿을 수는 없고, 믿자니 힘들게 됩니다. 변화의 능력은 없고 마음만 날카로워집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교회가 가지 않아 안타까워하며 그것을 붙들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면서 원망과 불평만 늘어가고, 은혜가 식으며, 열정과 사랑도 함께 식어져 가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지니고 그 안에서 침체될 위험은 목사에게도 있고, 3년 이상된 성도님들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 두 가지의 비유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잃은 양 비유이고, 또 하나는 잃은 드라크마 비유입니다. 먼저 잃은 드라크마 비유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느 여자가 열 개의 드라크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드라크마란 헬라의 화폐단위로 노동자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의 화폐 데나리온과 비슷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돈입니다. 그러므로 열 드라크마는 노동자가 열흘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입니다. 그 액수를 가치가 크다 적다 논하기는 좀 어렵지만, 현재보다는 훨씬 더 높은 가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비유 말씀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열 드라크마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여자였습니다. 당시 여자는 바깥에서 노동을 할 기회가 남자보다 훨씬 더 적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부인은 경제적 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곧 경건이라고 말씀하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당시의 상황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인에게 열 드라크마는 언제든지 나가서 벌 수 있는 돈은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돈은 분명히 결혼할 때 남편이 지참금의 의미와 아내에 대한 사랑의 징표로 줄에 걸어서 아내의 목에 걸어준 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가지고 있던 열 드라크마는 단지 열흘간 일해서 벌 수 있는 화폐가치로서가 아니라, 남편의 사랑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 주는 열 드라크마였고, 남편이 죽으면 비상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말은 단순히 하루 나가 일해서 벌어오면 되는 돈이 아니라, 남편의 사랑의 증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즉 하나가 빠진 아홉은 아무런 구실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남편 눈에 띄는 날이면 가정에 불화와 다툼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아홉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지금 바로 그 한 드라크마를 찾는 것입니다.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즉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습니다. 찾은 후에는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내가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까운 친구들, 염려해 주고 함께 기도해준 성도들을 불러서 기쁨을 나눕니다. 이제 이 여인은 남편 앞에 당당할 수 있습니다. 명절이나 특별한 기념이 되어 남편과 함께 외출할 때 열 드라크마를 목에 다시 걸고 기쁨으로 외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열 드라크마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무엇을 의도하셨을까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싫어하고 비난하는 세리와 죄인들이 바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 여인의 열 드라크마가 온전한 것처럼, 교회도 역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을 때 온전한 교회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교회는 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그대로 둔 채 교회는 참 교회일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홉 드라크마는 남편 앞에 내어놓을 수조차 없는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면서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보이면, ‘아!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때로 교회예배에 늦게 오는 사람을 보면 ‘아!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가 오는구나!’라고 바라봐야 합니다. 교회는 그들로 인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좀 부족한 사람이 있을 때 비로서 교회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돌아가서 첫 번째 비유를 보겠습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잃은 양 비유입니다.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찾아다닌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실제로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수고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 땅의 목초지는 불과 수마일 정도의 좁은 중앙고원만 있었고, 그곳을 넘어가면 가파른 벼랑과 극히 삭막한 황무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때로는 양 떼가 개인소유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공동소유로 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두 세 명의 목동이 조가 되어 양 떼를 초장으로 인도하는데,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한 목자는 그 양을 찾으러 가고, 마을 사람들은 그 목자와 잃어버린 양을 기다립니다. 드디어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오면, 정말로 온 마을 사람들은 기쁨의 환성을 지릅니다. 이것은 목자 개인의 기쁨만이 아니라 온 마을 전체의 기쁨으로 전염되는 것입니다. 수고한 목자에게 감사하고 돌아온 양, 죽지 않고 돌아올 수 있어서 감사하고 예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잃어버렸던 양을 쓰다듬어 주고 안아줍니다. 7절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죄인 하나는 세리와 죄인들을 의미하고, 의인 아흔아홉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너희들 아흔아홉보다 세리와 죄인 한 명 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도 고생했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가 올 때까지 그들도 들판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렸습니다. 한 마리 양이 들판에서 헤매다가 겨우 목자에게 발견되어 왔습니다. 그것도 걷지도 않고 목자의 등에 업혀서 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양을 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 이것을 못 참는 것입니다. 잃었던 양이 다른 아흔아홉 마리의 틈에 들어왔습니다. 함께 고생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 이 양에게 다가와서 주인 모르게 발길로 한 대 걷어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길도 잃어버린 주제에 목자 어깨에 올라타고 오면서 우리만 고생 시키냐? 너만 고생했냐?’

우리가 누군가를 도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울 땐 대개 아무리 도와주어도 나만큼 되기 힘든 사람을 도와주게 됩니다. 비슷한 사람을 돕는 것은 돕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 주면 또 하나 받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울 때 도움을 받는 사람이 도와주는 나보다 더 낫게 살아갈 때, 즉 더 좋은 자동차를 탄다든지, 혹은 더 좋은 옷을 입었다든지, 혹은 더 좋은 집에 살 때 그것을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7절 말씀은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아흔아홉 마리도 똑같이 추위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 양만 환영받고 사랑 받습니다. 사람들이 그 양만 좋아하고 즐거워합니다. 바로 이 때 박수칠 수 있는 사람,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본문에 이어 나오는 또 하나의 비유 말씀이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자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가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작은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새 옷을 입혀주며, 신을 신기고,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합니다. 그 때 큰 아들이 들에서 일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불평합니다. 나는 아버지께 항상 순종했고, 길을 잃은 적도 없고,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저를 위해 염소 새끼조차 잡아주신 적이 없으셨는데, 작은 아들이 돌아오매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자기 동생은 자기가 누려보지 못한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내가 받아보지 못한 사랑과 관심을 동생이 받고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아버지의 재산으로 허랑방탕하여 쓰고 온 동생입니다. 자!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런 원망과 불만으로 가득 찬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씀합니다. ‘너는 이미 다 누렸지않니!’ ‘너는 네 동생보다 더 큰 것을 누렸단다.’ 성경대로 표현한다면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게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너는 네 동생보다 더 큰 것을 이미 누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아들인 형은 누구입니까? 형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생활 3년 이상 하면 누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심리적 경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책임의식이 생기고 그것이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일종의 피해의식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수고와 헌신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지만, 오히려 다가오는 것은 마음의 상처뿐입니다. 늘 작업복만 입고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땀을 흘렸지만,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고, 감사도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집나간 동생이 돌아오면서 그런 피해의식과 상처는 더 커져만 갑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있어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회복하는 일은 신앙과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기 위해서 필연적인 일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모습으로 믿음의 감격을 잃어버렸다면 감격의 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동생이 받고 누리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부러워하는 이상 그 회복은 영영 얻기 어렵습니다. 이제 큰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은 참으로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버지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제까지는 받음으로 은혜를 누렸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았다면 이제는 나누고 베풂으로서 얻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열 드라크마가 온전할 때 남편 앞에 떳떳할 수 있었던 여인처럼, 동생의 돌아옴을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는 아들에게진정한 감사가 가능한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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