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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모님이 쓴 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경찰 병원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폐가 굳어지는 희귀병으로 3년 간 병상에서 투병 생활을 하는 전직 경찰이었던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를 위하여 이 사모님은 1,000일 동안 매일 글을 쓰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이 사모님은 글 쓰는 은사가 있고, 또 매우 어려운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사역을 하면서 그 일들을 늘 글로 표현해서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역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성도는 사모님의 약속을 받으며 최소한 1,000일 간은 사랑하는 그의 가족 곁에, 이 사모님 곁에, 견딜 수 없는 병의 고통을 참으면서 살아줄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 사모님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글을 쓰다가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글을 써서 혹여 그의 생명이 단 하루라도 연장될 수 있다면 1,000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그는 글을 쓰고 또 쓸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그늘에서 많이 아픈 그들이 조금 덜 아플 수만 있다면..... 하면서 그는 글을 맺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금방 쉽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폐가 굳어가는 병에 걸려서 결국 오래 살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그의 생명이 하루 혹은 이틀, 아니면 한 달 더 연장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환자 자신과 가족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두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이런 일들을 보면서, 혹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헨리 나우웬이 쓴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48세 된 Harriso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농장 노동자였고, 다리 수술을 받기 위해 대도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부정맥 증세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가 입원한 병원에 원목 밑에서 1년 동안 임상 목회 훈련을 받기 위해 온 신학생 존 앨런이라는 사람이 이 환자의 병실을 두 번째 방문했습니다. 해리슨이라는 환자는 다음 날 수술 일정이 잡혀 있었습니다. 마음의 불안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는 임상 목회 훈련 과정으로 자신을 찾아온 신학생과의 대화가 부드럽게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해리슨은 자신의 수술로 인해 닥쳐올 자신의 운명을 두려워하기도 했고, 또 살아나간다고 해도 다시 살아가야만 하는 자신의 삶의 자리가 벅찼습니다. 상담을 마친 존 앨런이라는 신학생은 썩 기분 좋게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반사적이고 성직자의 관심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에 신학생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해리슨이라는 사람은 다음 날 수술 도중 사망했습니다. 존 앨런이라는 신학생은 돌아와서 대화의 내용을 기록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비로소 해리슨 씨의 마음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해리슨 씨가 한 말 중에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난 수술 중에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마취 중에 죽는 것보다는 자연사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또 하나 두려워했던 것은 삶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병원에서 살아 나간다고 해도 결국 감당하기 힘든 노동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존 앨런이라는 신학생이 그에게 “퇴원하시면 해리슨 씨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겠죠?” 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무 것도, 아무도 없어요. 고된 일만 나를 기다리고 있죠.”

이런 그의 상태에 대해 헨리 나우웬은 해리슨 씨는 죽는 것과 사는 것 모두를 두려워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죽고 싶지도 않았고 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즉 그는 끔찍한 덫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심리적 마비 상태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던 열망도 사라졌고, 갈망이 좌절되었으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의 의지는 꺾였습니다. 그는 사랑과 증오, 갈망과 분노, 그리고 소망이나 의구심으로 가득 찬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역사를 어떤 방향으로도 이끌고 가지 못하는 수동적인 희생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즉 그는 스스로 목숨을 건지기 위해 투쟁을 벌일 수도 없고,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해질 경우 편안하게 포기하는 결정을 스스로 하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졌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해리슨이라는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하면서 ‘아무 것도, 아무도 없어요. 오직 고된 일만 나를 기다리고 있죠.’ 라고 말할 때, 존 앨런이라는 신학생이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해리슨 씨, 저를 보세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제 눈을 들여다보면 당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여기 있을 거예요. 당신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존 앨런이 해리슨 씨를 기다린다는 말의 의미는 단지 그가 살아 돌아올 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가 수술 중에 죽는다고 해도 그곳에서 나는 다시 당신을 기다릴 것이라고, 나도 결국은 당신이 경험하는 그 죽음의 터널을 지나가게 될 것임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해리슨 씨에게 정말 주어야 하는 도움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이 있고, 당신의 그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앞서 말한 전직 경찰과 가족들에게 정말 중요한 도움이 무엇이었는지 그 사모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루를 더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할 만큼 당신의 삶은 가치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가족과 이웃들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가족들과 이웃들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일을 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됨을 확신시켜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시/기도)에서 앞서 말씀드린 두 사람에게 그토록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다윗은 약 10년 간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다니면서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사울 왕은 전쟁터에서 죽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해 계속적인 전투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 때에서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비로소 온전하게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나누는 시편 60편은 그런 과정을 그리고 있는 사무엘하 8장과 역대상 18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서와 역대상에 보면 다윗은 그의 부하 장수 요압과 아비새와 함께 주변 나라들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아람과 모압과 에돔과 같은 나라들입니다. 사무엘하 18장을 보면, 다윗은 가는 곳마다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럴 때마다 한 마디씩 다시 덧붙였습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하지만 본 시편 60편을 잘 보면, 다윗은 항상 이긴 것만은 아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서에는 간단하게 전쟁의 결과들만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다윗은 전쟁이 매우 어려워질 때 하나님께 특별한 기도를 드렸고, 그 내용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사무엘하와 역대상에는 기록되지 않은 한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다윗이 기도한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다윗은 북쪽에 있는 아람 나라 연합군과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1절위에 보면 이 시는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우는 중에 있었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아람 족속들에 속한 두 나라가 다윗과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남쪽에 있는 에돔 족속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입니다. 한 나라가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뜻하지 않은 남쪽 에돔의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은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렀습니다. 본문에서는 그 전쟁을 수행한 사람이 요압이라고 하고, 사무엘하에서는 다윗이 전쟁을 했다고 기록하고, 역대상에서는 아비새가 전쟁을 수행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아무튼 이 전쟁은 매우 힘든 전투였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아비새가 전투에 참가했고,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자 요압이 출정했으며, 결국 마무리는 다윗 왕이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본문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1-3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우리는 앞서 어느 교회의 사모님의 이야기에서 했던 동일한 질문을 다시 하게 됩니다. 다윗은 3,000년 전의 군주 국가의 왕이었습니다. 그가 나라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본문을 보면서 한 나라의 왕인 다윗이 하나님을 섬기는 왕이라고 하면서, 과연 이웃 나라들과 전쟁을 하는 과정의 일들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도와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면 우리는 본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도 역시 단순히 이스라엘의 영토를 넓히는 일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왕이라는 하는 권위와 자리에 매여 있는 사람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왕이었습니다. 그가 왕 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고, 하나님께서 내려 앉으라고 할 때 그는 언제든 내려앉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기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의 기도(1-3절)를 다시 보면 그의 간절한 기도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매우 시각적인 용어를 사용합니다. 흩으셨다는 표현은 결국 이스라엘을 위기 가운데 몰아넣으심을 말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도 그들은 한 곳에 뭉쳐서 전투를 치려야 할 군대를 두 곳으로 흩음으로 두 곳의 전투 모두 위험 가운데 빠지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2절의 기도도 동일한 느낌입니다.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다’고 말하면서, 그 틈을 메워달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3절은 두 곳으로 군사력을 나누어 보내면서 혼란과 전쟁 패배의 두려움에 빠진 이스라엘 군사들을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자신들에게 마시우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그 목적이 있을 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 때 엄청난 삶의 힘을 우리는 공급받습니다. 그 이유가 자녀든, 조국이든, 이웃이든, 그들이 곧 자신의 삶의 목적이며 이유일 때 우리는 놀라운 힘을 갖게 됩니다. 또한 죽어야 할 이유가 있을 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내던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고백처럼 ‘주께서 버리고 흩으셨다면’, 즉 하나님께서 ‘너는 이제 끝이다’고 말씀하셨다면 목적, 이유 없는 헌신을 하는 것이고, 결국 삶의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윗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그의 기도 한 복판에는 바로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다윗이 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혹시 자신들을 버리신 것은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과 안타까움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버리셨나요?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찢으심은 당신의 외면의 사인입니까?’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까지 숱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왔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시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비록 자신을 배신하고 떠날 수 있어도, 하나님은 한 번도 자신을 배신하거나 떠나지 않으신다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이 그를 이곳까지 오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도 다시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우리를 버려 흩으시는군요. 우리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왜 우리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해서 비척거리게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살고 죽는 것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삶의 놀라운 힘을 얻습니다. 임종을 눈앞에 둔 어머니는 아들을 보기 전까지는 죽음과의 투쟁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아는 군인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자신에게 놀라운 생명력과 힘을 공급해 줍니다.

그래서 다윗은 4절에서 그는 ‘주를 경외하는 자’라고 자신과 자기 백성들을 표현합니다. 다윗 자신과 자기 백성들은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주님 없이는 못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하며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5절에서 그는 ‘주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자신들을 표현합니다. 다윗과 그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셔서 사랑하셨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위해 진실로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죽어서도 안 될뿐 아니라 죽을 이유도 없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의미로서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언제든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게 하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 전쟁의 순간적인 패배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어쩌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은혜, 여전히 자신의 생명을 지키시고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다윗은 어떤 고난도,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 것만 느끼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비록 이스라엘의 왕좌라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북쪽의 아람과의 전투, 그리고 남쪽의 에돔과의 전투가 동시에 일어나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려가는 것이 혹 하나님께서 더 이상 다윗과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의 사인이라면, 다윗은 그 상황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살 의미도 없고, 살아갈 목적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렇다면 죽음도 두려운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는 갈 곳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기서 다윗은 이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전에 그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합니다. 6-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 이 말씀은 아마도 사무엘하 7장의 말씀을 표현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은 나단이라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놀랍고도 엄청난 약속을 받습니다. 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16절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고 9절입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갑작스럽게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곤경에 빠뜨린 에돔의 견고한 성 - 이 성은 바위라는 의미의 페트라라는 뜻을 가진 셀라 라는 성입니다. -을 누가 공격할 수 있게 하겠는가 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10절에서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버리지 마실 것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를 도우시사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11절). 그리고 12절에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용감히 전쟁터로 나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대적을 밝으시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해리슨 씨가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나 삶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그의 죽음의 자리에 진정으로 함께 해 줄 사람이 없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갖지 못한 것은 살아도 그를 기다려 줄 누구도, 어떤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살려고 하는 의지, 살아야만 하는 목적을 갖지 못한 것이 더 큰 불행이었다는 것입니다.

전직 경찰관을 돕던 사모님은 사람이 한 번 왔다 가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한 운명인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라도 더 살라고 격려하고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게 도왔던 것은 바로 24시간이라고 하는 하루하루의 물리적 의미로서의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의 삶이 그만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비록 더 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다고 해도 결코 무의미한 삶을 살지 않았음을, 그래서 기꺼이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나라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매우 민감하게 찾고 있습니다. 자신의 군대를 흩으시고, 땅을 갈라지게 하시며, 그래서 술을 먹고 비척거리는 것처럼 자신의 군대를 몰아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버리심의 사인이 아닌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고, 또한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주님, 저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이 피 값 주고 산 당신의 자녀입니다.’하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앞에 둔 어머니의 삶이 의미가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기 때문에 전투 중에 있는 군인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중압감을 감당하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 됨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짐들을 능히 이기고 견디는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있습니다. 나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이 부르신다면 언제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삶과 죽음은 그 어떤 상태로서라도 견딜 수 없습니다.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성도님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시고, 목적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그 분은 지금도 우리와 가장 가까이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을 바라보며 다시 힘을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만약 지금 삶의 자리가 어렵고 혼란스럽고 감당하기 힘들다면 하나님께 소리쳐 기도하십시오. ‘주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질병은 ‘고독’이라고 합니다. ‘군중 가운데 고독’이라는 말처럼, 인구는 날로 더 늘어가고 있는데, 유독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은 지난 어떤 시대보다 더 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와 매우 가까이에 계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또한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더 도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위로받는 자로 서 있습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다면 그 분은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주는 전도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우리 주변에 얼마나 외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늘 주변에서 서성거리지만 진정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목사가 다가가야 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이유로 그동안 다가가지 못했다고 해도, 이제는 내 마음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귀한 일입니다. 천만금을 주는 것보다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손을 잡아 주고,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한 일입니다. 그가 바로 내 아내(남편)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바로 가까이 있는 내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내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내 회사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어쩌면 늘 스쳐지나가던 무관심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었는데, 사실은 나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주님 앞에 고백합시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삶과 죽음의 이유와 목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린느 그 분 앞에 설 때 참된 삶을 위한 엄청난 힘과 능력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 분 앞에 설 때 비록 죽음의 문턱에 서 있다고 해도 조금도 두려움 없이 담대히 그 자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십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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