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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부근에 있는 어느 교회가 있습니다. 1989년 어느 봄 날 이 교회에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데리고 들어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그 다음 주일도 역시 같은 모습으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매주 왔지만,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예배만 드리고 갔는데, 그 아버지의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그 해 7월 31일 가장 무더운 날, 그의 아들이 울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사모님이 전화를 받았는데,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이었습니다. 급히 그의 집이 있는 성남으로 달려가서 응급실로 아버지를 옮겼지만, 더 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벽제 화장터에서 장례를 지내고, 김수철목사님과 유정옥사모님은 그들 두 남매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을 했습니다.

그 남자 아이는 이 목사님의 큰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커서 군대를 갔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날 면회를 하기 위해 군대에 갔습니다. 면회실에서 아버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아들은 어머니에게 군대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형편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보다 한 달 먼저 들어온 고참이 자기를 너무 못살게 구는데, 한 번 대판 붙을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매일 연병장을 뛰고 가기에게 와서 보고한 뒤에 밥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 아들은 어려서부터 천식이 있어서 아침 일찍 뛰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또 다 뛰고 가면 식사 시간이 끝나서 밥을 못 먹을 때도 많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느낌을 겨우 참고 우선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고참이 아무래도 자기가 군대 처음 들어왔을 때 많이 고생을 했었는가보다. 그러니 연병장을 더 잘 돌아라. 괴로워하며 억지로 돌지 말고 즐거워하며 노래하며 돌아라. 다 돌거든 상관에게 고맙다고 해라. 어쨌든 많은 사람 중에 너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은 고마운 것 아니냐. 그 어떤 것보다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것이야.”

어머니와 아버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를 마치고는 아들이 같은 시간에 연병장을 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매일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을 돌았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다 되어 갈 즈음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로 시작합니다. 그는 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어머니! 저는 오늘에서야 하나님의 축복이 시련이라는 가면을 쓰고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매일 연병장을 돌 때마다 화가 나고 자존심도 상하고 그 날로 그만 모든 것을 끝장내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늘 구보 때마다 천식으로 숨이 막혀 뛰지 못하던 그가 바로 며칠 전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거뜬히 다 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참의 가혹한 요구를 통해서 자신의 지병인 천식을 고쳐주셨다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는 너무 그 고참에게 너무 고마워서 경례를 하면서 고맙다고 했더니 의아한 표정을 짓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내일부터는 저 스스로 뛰겠습니다. 어머니께 이 기쁨을 ‘할렐루야!’ 소리쳐 보내 드립니다.” 천식이 있으면 요즘은 군대를 안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2004년 그의 어머니가 쓴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라는 책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잘못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에게 최상의 조건을 주셨습니다. 좀 힘든 일이었지만, 그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일 때 좀처럼 치료되기 힘든 천식을 고치고 더 활기 있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밉기만 했던 그 고참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다윗의 감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낙헌제란 레위기에 나오는 다섯 가지 대표적인 제사 중에 하나인 화목제입니다. 화목제는 다시 세 가지 종류의 제사로 나뉘어 지는데, 그것은 감사제와 서원제, 그리고 자원제 혹은 낙헌제입니다. 낙헌제라는 것은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들은 낙헌제라는 표현 대신 “기쁜 마음으로 주께 제물을 드립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 가운데 함께 하신 은혜를 기뻐하며, 감사함으로 주 앞에 나아갑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한 해의 열매를 거두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지금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은 미국의 청교도들 102명이 1621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 중에 44명이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으면서도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감사의 예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중간에 없어지기도 했었지만, 다시 부활해서 오늘날까지 감사의 절기로 지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즘 교회들마다 우리나라의 명절인 추석에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11월 셋째 주일이 좋은 것은 교회력은 한 해를 성탄절로부터 시작합니다. 올해는 12월 첫째 주가 성탄절기가 시작되는데, 바로 그 얼마 전에 추수감사주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한 해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좋은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감사를 보면서 우리도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께 예배하는 시간을 갖기 원합니다.


다윗이 쓴 시편 54편 본시의 배경이 오늘 본문 1절 앞에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십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여기서 ‘십인’이란 말은 열 명이라는 뜻이 아니라, ‘십’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바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 약 10년 정도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서 도망자의 삶을 살았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떠다녀야 했고, 때로는 블레셋 지역으로 피해야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로 갔던 지역은 아둘람 굴, 엔게디 황무지, 그리고 십 황무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지역들은 대부분 유다 지파에 속한 지역들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바로 그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사울 왕으로부터 늘 피해 다녔지만, 가능하면 자기 지파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그가 도망을 다니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다윗이 자신을 괴롭히고 어렵게 하는 이들을 하나님께 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인’이라는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십’이라고 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했을 때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고 정복해 갔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지파들은 불과 20개 남짓 되는 성읍과 들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는 무려 81개의 성읍과 들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만큼 유다 지파는 강성했고, 수도 많았으며, 진취적이었습니다.

바로 그 81개의 성읍 중에 한 성읍이 바로 ‘십’이라는 성읍이었습니다. 그러니 ‘십’이라는 성읍에 사는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지파의 사람들입니다. 언제든 다윗의 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서두에 보면, 그들이 사울 왕에게 가서 다윗이 우리 지역에 들어와서 숨어 있다고 고자질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윗의 고민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동족 중에서도 같은 지파의 사람들입니다. 어차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 안의 일이니 같은 동족이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십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지파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배반하고 그의 목숨을 사울 왕에게 넘겨주려고 합니다.

유다 지파 전체 81개의 성읍 중에서 한 성읍의 사람들이 그러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 왕이 되지도 못한 다윗에게 충성하면서 사울 왕을 배반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정도의 배반자는 나라가 강성할 때조차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한 성읍에 사는 바로 그들이 다윗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사실 다윗은 전쟁에 탁월한 사람입니다. 전투 능력이나 전략가로서나 조금도 손색이 없는 탁월한 장수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그들은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도망자로 다니다가도 자기 동족이 이웃 족속들에게 공격을 받으면 그들을 공격해서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지금 문제는 자기 동족의 문제입니다. 자기 지파의 문제였습니다. 자기 지파 사람이 자신을 배반했습니다. 여기에 다윗은 고민합니다. 고통스러워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함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에 가서 그들을 돕고 치료하고 사랑하는 선교는 오히려 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향해 총과 칼을 겨누고 있는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향해 동일하게 칼을 겨눈다면 이방인들에게 못 보일 것을 보이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서로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마음이 어그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상대방이 먼저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며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만나도 인사도 하지 않고, 대화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정말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그럴 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도 같이 맞장구치면서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라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 먼저 대적하는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잘못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함께 맞대응을 하는 것은 더욱 잘못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상황과 입장을 다시 이해하게 됩니다. ‘십’ 사람들이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성경에 나온 사건만으로도 사무엘상 23장과 26장에 두 번이나 나타납니다. 다윗의 용맹함과 장수로서의 능력이라면 ‘십’ 성읍 사람들을 제거하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갑니다. 그리고 마음껏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3절).”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4절상).” 하나님께서 이 상황 가운데 개입하셔서 자신을 도우실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고참이 힘들고 어려운 일로 지속적으로 자신을 괴롭힐 때조차도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하고, 비록 연병장을 돌면서도 짜증내지 말고 노래하면서 돌라고 하는 어머니의 권면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돕는 자라는 믿음의 고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하나님의 더 크신 뜻이 있다는 고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5절).”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내가 원수를 갚으면 그것은 부작용과 더 큰 어려움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모든 문제를 잠들게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그 일을 위탁했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수많은 시들에서 보이는 다윗의 아픔의 고백들은 모두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드려진 기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만 하나님께 그 일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우리가 원수 갚는 것은 주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32장 35절에 “보수는 내 것이라.”(원수를 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로마서 12장에서도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0-21).”

또한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기도하고 난 후 6절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다 올려드렸습니다. 자기 삶의 모든 문제들을 다 주님에 내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난 후 하나님께 낙헌제로, 자원함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한 해를 돌아봐도 감사할 것보다는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만 혹시 생각나지는 않으십니까? 102명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찾았던 믿음의 발걸음은 결코 쉽게 그리고 값싸게 약속의 땅, 축복의 땅을 밟지는 못했습니다. 도착한 첫 해 겨울에 44명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그토록 강성한 미국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그들의 믿음 위에 세워진 것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군대에서 상관의 어처구니없는 가혹한 명령조차도 기쁘게 감당하라고 당부하는 어머니의 당부는 그냥 처세술로 잘 견디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 있음을 믿은 어머니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부는 실제로 그 아들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치유받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주일을 맞으면서 정말 정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우리는 감사의 조건이 먼저 있어야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감사의 조건보다 감사의 제사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감사의 제사, 감사의 마음, 감사의 자세가 오히려 감사의 상황을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고 증명한 일이며, 또한 성경이 오늘 우리들에게 수없이 반복적으로 가르쳐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는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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