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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부가 서로 관계가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싸움이 잦아지고 부부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회복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두 부부는 각각 인터넷 채팅으로 다른 남자와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부부 사이에서 생긴 불만을 토로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감싸주었습니다. 매우 깊은 공감대를 이루고, 드디어 그들은 서로 만나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처음으로 만나기로 약속하고 약속 장소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만나고 나니 상대방은 바로 자기 남편과 아내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상대방의 외도를 이유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남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채팅으로 서로 사랑의 말을 주고받을 때는 honey, prince 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을 그리워하면서 얼마나 멋진 남자, 여자일까를 상상했을 것입니다. 기대와 설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상의 남자와 여자를 상상했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문자로 사랑을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헛된 상상 위에 세워진 꿈이었고, 그 꿈은 결국 산산 조각나고 말았습니다.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제 아무리 영화를 누려도 잠깐 살다 죽고 마는 짐승과 같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장구치 못함이여’라는 말은 원어대로 번역한다면 ‘하룻밤도 견디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제 아무리 영광을 누린다고 해도 그 영화가 하룻밤도 견디지 못하는 인생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각각 남편과 아내가 있는 부부가 새로운 꿈을 꾸면서 사랑을 키워갔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끝날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번 만남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할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채팅으로 교제하면서 아마도 이제까지 자기 남편, 부인과 함께 살아왔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것이라고 꿈꿨을 것입니다. 그들은 두 번째 사랑은 영원히 가는 사랑이기를 기대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기대하고 기다렸다고 해도 그것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행위는 그들의 잘못된 가치관으로부터 나오는 행위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의 속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 원문대로 다시 번역한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들 생각에는 그들의 집이 영원하고 그들의 거처가 세세토록 있을 것이라고 하여 땅에다가 그들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즉 영원하지 않은 것에 영원한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창1:26-28). 또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전도서 3장 11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죽고 싶지 않고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입학했을 때가 “어제”같은데, 벌써 졸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연세 50세가 넘은 분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비슷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학교 다닐 때가 “어제” 같다’고 하십니다. ‘그저께 같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결같이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즉 그 이면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 사람들은 영생을 부인합니다.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죽음 후의 세계가 있음을 애써 외면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영생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생을 부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영생을 부인하며 사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만약 영생이 있다면 내가 지금 살아가는 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정말 영생이 있다면 지금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은 결코 영생을 기대하는 사람의 길일 수 없습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이해할 만큼의 빛을 주셨고, 또 원한다면 우리가 진리를 부인할 만큼의 암흑 혹은 모호함을 주셨다.’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려고 하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진리를 부인하려고 하면 또한 부인할 수 있을 정도의 모호함 혹은 암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아니 우리 모두의 삶의 모습을 자세히 드려다 보면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지만, 영생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인지를 의심할만한 삶의 모습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생을 믿지만, 그것은 단지 현재의 삶이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또 다른 삶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생은 지금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7절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우리가 믿는 자라면 우리에게는 이미 영생이 있고, 또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이생에서의 삶과 결코 단절된 것이 아닙니다.

김활란 박사는 죽으면서 자신의 장례식에서 장송곡이 아니라 행진곡을 불러 달라고 유언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시편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절)고 마치고 있습니다. 영생은 단순히 현재의 삶의 연장이 아닙니다. 현재의 삶의 연장으로 이해하는 영생은 이기적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영생의 소망을 주시는 것은 세상의 물질과 욕심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자유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생명, 영생의 소망을 볼 때 우리는 세상에서 얻는 재물과 명예, 부요함 등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은혜를 누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큰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우리에게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은혜는 성도로 하여금 참된 삶의 목적을 발견합니다.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더 큰 은혜 가운데 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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