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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930년 경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북쪽에는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나라가 섰고, 남쪽에는 유다라는 나라로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솔로몬이 죽으면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남쪽에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베냐민 지파와 함께 유다를 세웠고, 북쪽에는 여로보암이 남은 열 지파를 모아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로부터 약 200년이 흐른 후 앗수르라는 강대국이 주변 나라들을 점령하면서 그 기세를 몰아 북쪽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지 8년 후 앗수르는 새롭게 군대를 정비해서 남쪽에 있는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당시 남 유다에는 히스기야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에 몇 안 되는 신실한 왕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8년 전 자신이 이미 왕이 되었을 때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로 그 앗수르라는 나라가 자기 나라를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다 나라로서는 엄청난 위기였습니다. 신실한 히스기야 왕이 유다를 다스리고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도 은혜로 이러한 위기 가운데서 큰 의지가 되지 못함을 그들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남 유다는 두 번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공격을 받았을 때, 남 유다는 친 앗시리아 정책을 폈습니다. 그들에게 호의적이었고, 그들과 타협적인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앗시리아가 요구하는 모든 조공물을 다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앗시리아 왕에게 바치기 위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모든 은과 금을 다 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다 모자라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 기둥에 입힌 금까지 다 벗겨서 앗수르 왕에게 바쳤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다시 앗수르의 공격을 받았을 때, 히스기야는 더 이상 타협적인 방법으로는 살 수 없음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정면으로 대치국면으로 들어갔습니다. 앗수르는 군사를 보내서 날마다 유다 민족으로 하여금 항복을 하도록 요구합니다. 너희는 이미 다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소리쳤습니다. 앗수르는 전략적으로 유다 말을 사용해서 예루살렘 성 앞에서 그들을 회유하며 흔들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군사들에게 앗수르의 회유책에 일체 반응하지 말 것을 명령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힘들었던 순간은 히스기야가 앗수르 왕으로부터 최후 통첩을 의미하는 편지를 받았을 때입니다. 앗수르 왕은 편지를 통해 협박했습니다. 앗수르에 멸망한 다른 어느 민족이라고 자기들의 신이 없었느냐? 그들 어느 민족도 자기 신들의 도움으로 앗수르로부터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네가 의지하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지켜 줄 것’이라는 말에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편지를 가지고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성전 앞에 펴 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훼방하려 보낸 이 말들을 들어보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라는 나라가 과연 주변에 여러 나라들을 점령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앗수르에 멸망한 나라들이 섬기는 신들은 모두 나무와 돌을 섬기는 것이 불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시여. 만군의 여호와시여, 하나님은 홀로 우주의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주여 우리를 저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왕하 19:14-19).” 우리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면서 그가 그 당시 얼마나 절박하고 힘들었을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시편 44편은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 드려진 기도입니다.

본시는 다른 시와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대부분 시편에 나오는 시들은 초반에는 죄를 회개하거나, 고난당하는 상황에서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죄 용서를 경험하거나, 혹은 삶의 무거운 짐을 해결받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 대부분 시들의 형태입니다.

그런데 본시는 그 반대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1-8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하신 놀라운 일들을 고백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선조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셨는지, 얼마나 놀라운 능력으로 함께 하셨는지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강력한 열방들을 쫓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조상들을 이곳 가나안 땅에 정착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마치 나무를 심듯이 심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조상들의 칼과 팔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9절 이하에서 나타납니다. 바로 그렇게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지금은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곤궁한 상황을 외면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께서 지금은 침묵하시고 계시다고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호소하고 계십니다. 22절 이하를 보십시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본문에서 우리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응답하지 않습니다. 조상들로부터 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기사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지금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기적과 역사가 현재 고난 가운데 있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점을 발견합니다. 성경에 아무리 많은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 그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입니다. 여기에 객관화되어 선포된 말씀이 나에게 주관화되어, 나의 사건으로 경험되기 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성경 속에 나타나는 역사 속에 들어가서 그들이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고, 그들이 보는 것을 함께 보고, 그들이 경험하는 것을 함께 경험해야 합니다.

성경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건이 나의 삶의 자리로 들어와서 나의 고백으로 동일하게 고백되기까지는 성경은 단지 문자일 뿐입니다. 그 말씀 안에 들어갈 때 우리는 아브라함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고, 모세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됩니다. 모세가 홍해를 걸어서 건넌 사건이 바로 나의 사건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합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조금만 참어. 곧 모든 것이 지나 갈거야.’ 라고 말하지만, 정작 고통 받고 있는 본인은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그것이 나의 사건, 나의 고백이 되는 순간에만 그것은 나의 것이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 시대 그 백성들의 간구와 기도, 몸부림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하나님과 유다 민족의 운명을 놓고 긴장하며 답을 찾고 있는,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이 시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오랜 기간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개념에서의 응답의 지연이 아닙니다. 사실 남 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전쟁으로 앗수르를 이기려고 해도, 그 이상의 시간을 노력 했어야 했습니다.

히스기야가 그 고통 중에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그 상황 안에서 엄청난 양으로 늘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시간, 짧은 기다림이었을지 몰라도, 히스기야와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인내와 두려움으로 기다려야만 했던 시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느끼는 시간의 개념입니다.이것은 전쟁터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운명의 갈림길에서 느끼고 부르짖는 고통의 소리였습니다. 이것은 한가한 삶의 자리에서 좀 더 부요해지기 위해 부르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전쟁을 일단 승리로 끝내고, 모든 상황을 수습한 후에 하나님을 찾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전쟁 중에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오랜 된 이야기입니다. 아빠는 출장을 가신지 여러 날이 되었고, 돌아 오실려면 아직도 이삼일은 더 있어야 됩니다. 엄마와 갖난 아기만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저녁밥을 지으시려고 나무를 집다가 그만 그 안에 있는 독사가 엄마의 발을 물었습니다. 독사에 물린 것을 안 엄마는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매우 빠르게 판단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는 아기를 살린 생각을 합니다. 아기는 아직 기어 다닐 정도밖에 안 됩니다. 본인은 이제 길어야 1-2시간 이내 죽을 운명임을 깨닫습니다. 1-2시간 안에 갖난 아기가 아빠가 올 때까지 살아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아이의 생명이 아빠가 돌아오실 때까지 살아있도록 준비합니다. 방을 따뜻하게 하고, 아기가 손을 뻗어 먹을 것을 잡을 수 있도록 적당한 위치에 음식을 놓습니다. 위험한 상황을 만나지 않도록 모든 주변을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시간은 훌쩍 지나갔습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엄마의 얼굴과 온 몸에는 땀이 비오듯 흠뻑 젖었습니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이젠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몸이 아직도 걸을만 하고, 활동할 만함을 느꼈습니다. 아직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나 하고 시계를 보니, 이미 상황이 시작된지 두 시간이 훨씬 더 지난 것입니다. 늦게 서야 그는 깨닫습니다. 그는 여전히 건강하며, 독사의 독으로 인한 죽음의 기운은 더 이상 그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의 몸에는 더 이상 독사의 독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시간에 그의 몸에서 비 오 듯 흐르던 그 땀을 통해 모든 독은 다 몸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이 엄마는 그 사건 속에 스스로 들어갔습니다. 엄마는 살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그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여기에 본문의 사건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있습니다. 독사에 물린 엄마는 살아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것은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히스기야 왕과 유다 백성들이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 부르짖음을 매우 절박한 부르짖음입니다.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히스기야였습니다. 그의 온 몸에 앗수르라는 적군의 독이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패배감과 절망의 그림자가 자신과 온 백성들과 군인들의 마음을 엄습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의 살 길을 찾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사명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종교적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격식을 갖춘 기도도 아니었고, 전통적으로 오는 방법을 배워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부르짖는 외침이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자기 삶의 자리에서 느끼고 고백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신앙이란 종교적 행위를 연습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행위를 연습하고 배움으로써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찬송의 멜로디와 가사를 배움으로써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하고, 주일예배를 드리고, 수요예배와 헌금생활을 하는 것 그 자체가 곧 신앙 자체는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지금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남는 시간, 여유로운 시간을 잘 활용해서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고단한 삶의 자리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적들이 눈 앞에 다가와 있는데, 히스기야는 한가하게 기도실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습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적 행위는 아무런 능력을 우리에게 주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삶 가운데 정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야만 하는 절박한 삶을 고백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려운 일만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험 앞이면 멀어지고, 사업이 어려우면 멀어지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속상해서 멀어집니다. 이런 경우 우리의 기도와 찬송과 헌신은 그야말로 시간날 때 드리는 종교적 행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기도, 능력을 맛보기는 거의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나는 매일 2시간씩 기도합니다. 그런데 바쁠 때는 할 일이 많기 때문에 4시간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백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일을 다 수습한 후에야 다시 하나님 앞에 나타납니다. 일단 앗수르와의 전쟁을 마무리해야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생활에 익숙해질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문제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준행하는 수많은 율법 규정들로 인해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들의 종교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종교생활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 종교적 행위로 판단하는 것이 몸에 밴 그들에게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우리가 한 해 동안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돌아보고 감사하는 달입니다. 그래서 이번 달에는 우리가 ‘감사 일천번제’라는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감사 일천번제’라는 말은 우리가 한 해 동안 지내오면서 감사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하나하나 기록해 보는 것입니다. 적어도 한 달에 하나 이상씩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성도님이 12개 이상의 감사의 내용을 담아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교회 전 성도님들이 일 천 개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전에 어느 집사님은 50개의 감사의 내용을 담아 함께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오늘부터 생각하십시오. 하루에 두개씩 찾아보겠다고 다짐하십시오. 사실 한 번 마음먹고 앉아서 한 해를 돌아보면 많은 감사를 발견할 것입니다. 한두 번 그렇게 하면 생각지 않은 감사의 내용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살기도 바쁜데 무슨 감사를 찾아!’ 억지로 하면 그것은 종교생활입니다. 거기에는 감동도 은혜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해 보자. 나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되는가 보자 하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시도해 보십시오. 자신의 생을 새롭게 보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12개가 20개가 되고, 50개가 되고, 100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외치는 그의 기도는 결국 유다를 구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무지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느끼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므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누리며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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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하시는 하나님(시44:9-26) 2007. 11. 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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