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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386세대입니다. 386세대란 약 10년 전에 많이 사용하던 말인데, 그 당시로서 나이는 30대이고, 80년대 학번을 가지고 있으며, 6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386세대가 대학을 다닐 때는 대모가 한창일 때였습니다. 학기를 시작하면 데모 없이 학기를 마칠 때가 거의 없었고, 제대로 학기를 마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주된 데모의 이유는 반정부적 이슈와 학내 민주화의 문제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공권력이라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언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의 말씀은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타락하고 자기 탐욕에 가득 찬 세속권력자들에게 굴복하란 말인가?’ 마음속에서부터 어떤 불신의 마음이 먼저 솟아오릅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반역적인 민족으로 유명했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 중에 친정부적 성향, 친로마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사두개인들처럼),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반정부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가장 극단적인 반로마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바로 열심당원이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장 반정부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은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틀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런 그들 자신의 신앙에 근거해서 누구에게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동적인 반항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폭력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자신들이 먼저 폭력으로 뭔가를 일으키지 않으면 하나님도 일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인과 암살을 위해 서약을 하기도 하고, 이를 위해 늘 품에 칼을 품고 다녔습니다.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는 유대인들의 가택을 부수고, 밭의 곡식을 불태웠으며, 가족들을 암살하는 일을 일삼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을 쓰면서 어쩌면 유대인 열심당원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다른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이런 모든 행위들이 모두 반기독교적인 행위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진리를 선언합니다. 그것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며,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의 열심당원들은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속 정권을 부정했고, 조공도, 세금을 내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폭력을 일삼고, 살인과 암살을 자행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의 창조주시며, 세상의 사람들이 가진 권세도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며,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도 세속 정권의 리더십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먼저 하나 오해를 풀기 위해 말씀드린다면, 항상 모든 경우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니엘도 바벨론의 총리로 지내면서 어떤 명령은 따르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세속의 권세를 따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적인 명령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세속의 권세 자들에게 권세를 주신 목적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 번째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칼을 주어 하나님의 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진노하고 심판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금방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속 정권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대변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세속 정권은 하나님의 뜻을 항상 바르게 대변할 수 없습니다. 세속 정권은 너무도 쉽게 자기들의 이익과 탐욕을 채우기 위해 권력을 이용하고 권력의 횡포를 일삼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속 정권을 사용하셨습니다. 애급과 앗수르, 바벨론과 페르시아 등 역사 속에 나타난 크고 작은 나라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당신의 징계의 채찍으로, 때로는 이스라엘의 보호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세속 정권의 불완전함을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이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 서 있는 목사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허물이 많고 잘못과 실수를 너무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를 목사로 세우셔서 오늘도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아멘) 때로는 부족한 목사의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하며 소망을 주시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목사를 보면서 ‘아!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라고 느끼게도 합니다. (그런 말에는 은혜를 항상 더 받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당신이 일하시고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세속 정권에 권세를 주신 목적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을 보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서 성도들이 안정되고 평온한 가운데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디도서 3장 1절을 보면, 권세 잡은 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준비를 하는 맥락에서 설명합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2장 13절 이하에 보면 권세 있는 자들이 선행한 자들에게 상을 줌으로 사회 속에 선을 권장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세속 정권에 권세를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정권이라도 무정부상태에서 겪는 것보다는 훨씬 더 안전함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속 정권의 기본적인 일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세금을 내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르셨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저들은 이러한 일에 항상 힘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양심을 인하여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양심을 인하여 한다는 말씀은 인간이 실질적으로 정부와 국가의 보호를 받고 산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한된 의미에서이긴 하지만, 그리고 본인들이 알건 모르건 하나님의 일군으로 위탁받은 일임을 성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국가와 정부가 타락했어도,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들의 보호를 받도록 하나님은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국가의 일에 견제와 균형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협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하나 더 깊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표면적으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본문의 이러한 말씀을 받쳐주는, 성경 전반에 걸쳐 흐르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 참여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범죄와 타락으로 멸망할 운명에 처한 인간을 보신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과 같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채 같은 운명을 지니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천지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체적, 공간적, 시간적 한계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즉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주님은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셨습니다. 병자를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으셨으며,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남자만 오 천 명이 먹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그 분은 인간들 중에도 가장 천한 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으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을 찾아가셨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말은 남편을 다섯이나 거느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섯 번이나 이혼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당시로서는 남편 없이는 창녀가 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못했지만, 주님은 바로 그런 여인, 모든 사람들이 다 버린 그런 여인을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은 매우 자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마태의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를 하셨고, 세리장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9절과 누가복음 7장 34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며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퍼부어댔습니다.

그렇게 사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을 밝히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태5:14-15).” 맛을 잃은 소금을 음식을 짜게 할 수 없습니다. 말 아래 감추어 놓은 등불은 세상을 밝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음식을 짜게 할 수 있는, 음식을 음식 되게 할 수 있는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비추는 등불로서, 말 아래 있지 않고 높은 곳 등경 위에 있는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했습니다. 죄악이 가득차서인가요? 4천 년 전 가나안 땅에 동성애가 버젓이 거리에서 횡횡하던 악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악이 가득 찬 소돔과 고모라 성이라도 그 성들이 유황불에 멸망한 것은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의인 열 명이 없어서임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롯의 사위들조차도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 영적 무분별함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케 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파송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머물면서 그 안에서 주의 은혜만을 맛보고 누리라도 보냄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버지니아 대학도 한국 학생들에게는 한국 문화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매년 9월이 되면 신입생들이 들어오고, 그러면 신입생 환영회라는 것이 열립니다. 한국에서도 그렇듯이 신입생 환영회는 대개 처음 온 신입생들에게 술을 마시게 합니다. 이 신고식을 어쨌든 넘어가야 합니다. 신입생으로 들어오는 학생들마다 신앙생활을 한 친구들은 고민을 합니다. 아예 가지 않는 학생들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꼭 바람직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선배들이 이 걱정을 합니다. 신입생들이 술 때문에 고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라고 해야 되냐 가지 말라고 해야 되냐고 목사에게 와서 묻습니다. 그 때 이렇게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짐을 신입생들에게 다 떠넘기지 말고 너희들도 거기 같이 가. 만약 술 먹는 게 마음에 걸리는데, 분위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먹어야 된다면, 선배들이 열 명이든 스무 명이든 같이 가서 그 자리에 참석해라. 그리고 소주 대신 사이다 마시고, 맥주 대신 콜라 부어 마시면, 신입생들이 알아서 눈치껏 자기 믿음 따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제가 느끼는 것은 선배들이 그곳에 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는 더 이상 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싫어졌습니다. 대화의 내용도 다릅니다. 한 두 마디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불편하고 어색합니다. 전에는 술자리가 그렇게도 좋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대견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신앙적인 마음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사실일까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뭐가 좋아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렸겠습니까?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이게 어떻게 가당키나 한 말씀인가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이 먼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문둥병자를 치유하시면서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문둥병자의 손을 잡고 치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죄인들과 병자들, 약한 자들에게 다가가신 주님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을 향해서도 세상을 향해 다가가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샬롯츠빌에 있는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찾아가기 전에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골프장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계 모임을 하는 곳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단지 세상에 세금을 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상을 찾아오셨던 주님,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버리셨던 주님의 사랑이 깊이 배어있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왔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있는 것이 꼭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인가?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땐 세상의 습관과 타락한 문화를 끊는 것이 매우 힘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자리에서 생각해 봅시다. 지금도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물론 사람 나름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이곳에 더 편한 자리입니다. 주일이면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더 편안합니다. 세상 가운데 안 믿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공동의 대화의 화제도 찾지 못하고 어색하게 보내지만, 교회만 오면 할 말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교회 안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단지 이곳에 더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단지 마음의 갈등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로서의 교회를 좋아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던져지셨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빛이 등경 위에 있지 아니하고 말 아래 있으면 어떻게 주변에 빛을 비출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만 머문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빛이 비춰질 수 있을까요?


2004년과 2005년에 걸쳐 우리교회는 이웃 섬김의 날이라는 행사를 세 번 했습니다. 제가 처음 2004년 8월에 왔을 때 목사 취임식을 하신다고 해서, 취임식도 좋지만, 그러는 대신 주변의 이웃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하면 좋겠다고 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할 때는 너무 좋겠다고 하면서 매달 한 번씩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가, 아무래도 무리라고 생각되어 일 년에 두 번 하기로 했는데, 막상 2005년 이듬해에 두 번의 행사를 하고는 더 이상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인즉슨 목적이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전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섬김도 아닌 모양이 되었습니다. 막상 이웃들을 초청했지만, 많지도 않는 이 작은 도시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을 수는 없었고, 많은 경우 우리교우들의 잔치처럼 되는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찾아온 사람들이라고는 우리교회를 항구적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 멀리서 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면서 섬김의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목적 없는 행사라는 딱지를 붙이고는 당분간 쉬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분간이라는 말은 목사가 못내 양심의 가책 때문에 한 말일 뿐 실은 막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목사는 생각할수록 이웃 섬김의 날을 계속 하지 못하는 이유는 목적 없음이 아니라 힘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적은 수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에 겨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때때로 그 때 그 이웃 섬김의 날은 이제 더 이상 안 하냐는 말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간혹 들을 때마다 그 때의 그 섬김이 얼마나 귀했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때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는 도피처가 아닙니다. 물론 세상에서 지치고 힘든 영혼과 몸을 쉬어야 합니다. 새롭게 재충전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세상을 섬기라고 명령하십니다. 힘써 그들의 일에 참여하고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부상자를 치료하는 곳이기도 해야 하지만, 전투장으로 나갈 군인들을 훈련하는 곳이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어디쯤 서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공부도 하고, 기도회도 하고, 제법 사람들도 모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되었습니까? 그러면 되는 것입니까? 성경공부는 무엇하러 있는 것입니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 말씀이 우리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지 못하는데, 그 말씀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줄줄이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학원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나가지 않고, 자꾸 움츠러들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주저앉아 있는 교회는 병든 교회입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섬겨야 합니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를 데려가시지 않고 이곳에 살게 하시는 목적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교회 안에 머무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복음의 사랑을 가지고 나가는 능력 있는 교회로 세워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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