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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을 버리고 도망을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다윗의 장수 요압에 압살롬의 군사와 싸워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다윗 왕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 때 그 소식을 다윗 왕에게 전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당시 가장 훌륭한 제사장이었던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라는 장수였습니다. 이 때 요압 장군이 이를 말류 합니다. 왜냐하면 다윗 왕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요압이라는 장수는 워낙 영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에 다윗이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아히마아스 대신에 구스 사람으로 이스라엘 군인으로 있는 한 사람을 뽑아서 다윗 왕에게 전쟁의 소식을 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도 늦었지만, 아히마아스는 요압 장군에게 자기도 가겠노라고 허락을 요청했습니다. 요압 장군의 허락을 받고 아히마아스도 다윗에게도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아히마아스가 구스 사람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다윗 왕에게 승전보를 전합니다. 그런데 예상했던 대로 다윗 왕은 그의 아들 압살롬에 대한 안부를 묻습니다. 아히마아스는 그 말에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결국 잠시 후 도착한 구스 사람이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당시 전쟁터에서 전쟁의 소식을 전해올 때 누가 그 소식을 가지고 오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를 점치기도 했었습니다. 다윗의 진지를 지키고 있는 파숫군이 누군가가 달려온다고 하자, 다윗이 ‘그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파숫군이 ‘그는 아마도  아히마아스 같다’고 말하자, 다윗이 이어 대답하는 말이 ‘저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승전보를 전하는 군사는 그 자체를 특별한 영광으로 여겼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전쟁의 승전보를 전하는 메신저로 그려줍니다. 그는 장차 메시야가 기쁨의 소식, 복음을 가지고 오시는 것을 예언적으로 이사야 52장 7절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전쟁의 승전보를 전하는 군사의 모습을 시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 구원의 복음을 가지고 오는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산을 넘는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하고 찬미합니다.

이 말씀을 바울은 오늘 본문 14-15절에서 조금 바꾸어 이렇게 전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려면 누군가는 그에게 말씀을 들려주어야 하고, 말씀을 들려주려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려면 누군가는, 즉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보내셔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자의 사역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복된 소식, 즉 복음 그 자체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오늘날 교회도, 성도도 그렇게 복된 복음의 전파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전파는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의 존재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주신 사명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은 이 사명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얼마전 아프가니스탄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두 명의 성도가 순교를 하고, 21명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한국 사회에 많은 걱정을 끼치게 했고, 국고의 손실과 한국교회가 과연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서야 하느냐 하는 논란이 많긴 했지만, 그리고 단기선교냐 단기봉사냐를 가지고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교회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이런 말씀이 나온 배경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 천 년 동안 하나님을 믿어온 백성들인데, 막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순종치 않는다고 바울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사53:1).”

그리고 바울은 성경적인 복음의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본래 들을 때 생기는 것이고, 듣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은 생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스스로 자문하듯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은 아닙니까?’ 그리고 스스로 답을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고 시편 19편 4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합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못들을 리가 없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저들을 복음 전도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도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오늘도 복음은 전해져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내 귀에 들려져야 합니다. 내 귀에 들려지지 않는 말씀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통해 내가 은혜를 받지 못하고, 말씀을 통해 내가 먼저 변화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안타까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수 천 년 동안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진정한 의미에서 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먼저 내 귀에 들려야 합니다. 풍성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를 향해 주시는 말씀, 우리교회를 향해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읽는 게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성경 인쇄술이 발달되지 못했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전이나 회당에 가야만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랍비가 그 성경을 풀어서 해설해 줘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좀 더 엄밀한 의미에서 말씀드린다면, 말씀을 읽지 않고 듣는다는 것은 오디오 테이프를 틀고 들으란 말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내게 들려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얼마 전 어느 성도님이 새벽에 기도하고 가다가 제 방에 잠깐 들려서 잠시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사의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저것 달라고만 기도하면 왠지 더 부족한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는데, 오히려 감사하는 기도를 하기 시작하니까 세상에 다 새롭게 보이더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순간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지당한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감사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수없이 많은 말씀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말씀을 잊은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감사는 저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임을 알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삶이 새롭게 회복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이 들려진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첫째는 말씀이 깨달아진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동의한다는 뜻이고, 세 번째는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교회는 전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도하기 전에 전도 안 해도 올 수 있는 교회가 먼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전도 안 해도 올 수 있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교회 오면 먹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먹을 말씀이 있고, 나눌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내 가슴을 채울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하고,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까지 와서 편당을 만들고, 남의 허물을 들추고, 싸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잔치 집에 가면 먹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먹을 것도 마련해 놓지 않고 잔치에 초청해서, 배만 쫄쫄 굶게 만들면 거기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배불리 먹고 조금씩 싸들고 가도록 준비해 놔야지요. 교회 오면 배불리 먹고 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배불리고, 다시 집에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은혜가 풍성하게 싸들고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고 싶은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한 번 오면 푹 빠질 정도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를 만들어 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에 한국에 있을 때 어떤 분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기는 전도는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 그리고 교회에 꼭 출석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나오지 마시고, 다른 교회를 나가십시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보고 전도 안 한다고 야단치지 말라고 것입니다. 분명 그 분은 그 때 굶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줄 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보통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우리는 공평하게 내 말을 하고 또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엔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한참 대화를 하는데, 제가 말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상대방이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니까 생각나는 게 별로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안 그런 줄 알았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상대방에게 그런 내색도 못하고 조용히 대화를 마쳤습니다.

전에는 대화할 때 말을 비교적 많이 안하고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 좋다’는 소리도 참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목사가 되면서 말이 자꾸 많아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이런 소리를 오히려 듣습니다. ‘목사님, 은근히 강한 것 같아요.’ ‘목사님 말씀이 강해서 좋아요.’ 나쁜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듣는 훈련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저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힘든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 시간 말하라고 하면 대부분은 잘 하지만, 한 시간 들으라고 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기도의 순서를 따라 기도하고 딱 마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기도를 시작하고 끝마치면 시계를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시간에 기도를 끝마치는 저의 모습을 상당히 신령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어제와 오늘의 마음이 다른데 그렇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우리의 간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끝내서,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인가를 하려고 하시는데, 그냥 성경책 들고 일어서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황당하시겠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많이 한다고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으면, 멋있는 기도의 용어를 사용하려고 하지 말고, 내 마음의 상태를 가장 적절한 언어의 제사로 주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그리고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또박또박 그렇게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 기도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지고, 기도의 용어와 내용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대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힘쓰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삶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배우자의 말을 깊이 듣도록 힘쓰십시오. 그러면 진정으로 행복한 부부가 될 것입니다. 자녀의 언어를 무시하지 말고 깊이 들으려고 애써 보십시오. 그러면 자녀가 건강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 앞에 부모의 권위가 세워질 것입니다. 회사에서, 혹은 비즈니스 현장에서, 학업현장에서 다른 동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십시오. 그러면 삶의 길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더욱 풍성한 교회, 풍성한 가정, 풍성한 삶을 이루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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