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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 시골에서 나무 광에 나무들이 쌓여있는데, 그곳에 불을 지피는 시늉을 하다가 어머님께 심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막내로 자라면서 크게 야단을 듣지 않고 자라던 저에게 있어서 그 때의 어머니의 꾸중은 견디기에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어머님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들고, 심지어는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았습니다. 마치 제 엄마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었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그 때 어린 저에게 진노하셨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때의 저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었는지 깨닫고 되었고, 어머님의 진노는 그 정도로 끝난 것만으로도 감사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의 40년 전의 사건이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저의 기억에 남을 만큼 큰 꾸지람이었고, 그것은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마치 그런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바로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지금 자기 민족 유다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징계의 채찍을 들고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을까? 이런 분이 어떻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란 말인가? 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본문을 보면 “내가 그들을 벌하리라.”는 표현이 3번, “멸절하리라”는 말이 4번, 그리고 “진멸하리라”는 말이 3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분은 사랑의 하나님이며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자리하신 분이시고, 또한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또한 진노하시는 분이시고, 심판하시며 진멸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어머님께 꾸중을 듣는 아이가 억울하다고, 날 사랑해주시던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항의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것이 마땅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듯이, 우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하심도 그 자리에서는 힘들고 어려운 길이지만, 실은 그 안에 그 분의 사랑이 숨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을 오늘 만나시기를 소원합니다.


본문의 배경이 이렇습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유다 왕 요시야 때 유다 민족을 향해 그들의 죄로 인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의 고손자였습니다. 그리고 요시야 왕은 히스기야 왕의 삼대손, 즉 증손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 왕과 스바냐 선지자는 숙질관계였습니다. 즉 스바냐는 왕족이면서 당대에 심판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라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웠지만, 그의 아들 므낫세 왕은 55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우상의 나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기는 단들을 세우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아들들을 말감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등, 그 외에도 점을 치고, 마술사들을 고용해서 나라의 길흉을 점치곤 했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의 제사장과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을 함께 섞어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의 모습을 완전히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의 아들 아몬 왕도 2년 간 통치하면서 그 아버지 므낫세의 길을 가다가 신하들에게 암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요시야 왕입니다. 요시야 왕은 나이 8세에 왕이 되어서 16살이 될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16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가 되었을 때부터 성전을 조금씩 수리하고 청결하게 만들어 갔습니다. 그의 나리 26세가 되었을 때, 그러니까 그가 왕이 되고 18년이 지난 후에서야 그는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마무리를 거의 짓게 됩니다.

요시야 왕이 하나님을 알고 유다 민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거의 10년의 세월이 들었습니다. 그 마지막 과정이 성경 한 권을 성전에서 발견했는데, 그것이 학자들은 신명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보면서 요시야 왕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회개하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성대하고 화려하게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이 16세 되어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을 때부터 26세 성전에서 성경책을 발견하고 회개하며 유월절을 회복하는 그 어간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개와 개혁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한 가지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스바냐라는 선지자를 보내셔서 유다 백성들을 책망하시고, 징계를 선포하시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건을 행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의 굳어진 마음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스바냐에게 있어서는 생명을 건 영적 전쟁이었고,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정말로 듣기 힘든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에 바르고 긍정적으로 반응하느냐 아니냐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 8-13절에 보면 적어도 네 부류의 사람들을 향해 스바냐 선지자는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첫 번째 8절에서 스바냐 선지자는 방백들과 왕자들, 즉 왕족들, 그리고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책망합니다. 이들은 당시 유다 민족들 중에 가장 높은 특권을 누리는 기득권층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안정되었고, 그러므로 변화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일부는 결국 그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들은 선지자들의 음성을 듣는 것이 힘들어서 선지자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스바냐 선지자의 책망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 일부, 즉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습3:13). 스바냐 3장 17절을 보면 이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늘 기쁘고 감사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생각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는 결단이 있어야겠습니다.


두 번째로 9절에서는 당시 권력자들에게 붙어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향해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불의한 상전들의 탐욕을 채워주기 위해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서민들을 착취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서로 커다란 먹이사슬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 악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구조가 깨어지는데 무려 10년의 세월이 걸린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다음 주에 구역조직을 발표합니다. 구역을 편성할 때마다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구역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구역 편성의 기준들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누구와 구역이 편성되어도 좋다는 마음들이 성도님들 가운데 형성되고 있습니다. 청년부와 대학부는 물론이고, 장년들에게도 그런 분위기가 세워지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는 아무렇게나 구역이 편성되어도 잘 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안에 강한, 그래서 깨어지지 않는 악한 구조가 아니라, 언제든 함께 세워주고 섬길 수 있는 아름다운 전체 교회 공동체가 앞으로도 더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세 번째는 11절에 막데스 거민과 가나안 백성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들은 함의 후손들이고, 상인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이방신을 섬기고 이방 문화가 유다 땅에 들어오면서 이방 문화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자기들의 이익에 눈이 먼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를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데는 관심이 없고 어찌하든 자신들의 물질적 탐욕을 채우기 위해 어떤 것들이든 유다 땅으로 드려올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신앙이 개인적인 이익의 수단이 되면 우리의 믿음을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하면서도 그 속에 자기 자신의 신분과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다면 그것은 교회를 타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여론을 형성하고, 주류와 비주류를 만들어가는 것은 깨어져야 할 구조입니다. 신앙은 희생과 섬김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고백하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 또 다시 자기의 이익과 탐욕에 눈이 어두운 것은 심판의 매를 자청하는 것입니다. 주님 가신 길처럼 진정으로 섬김의 길을 기쁘게 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네 번째 12-13절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심판을 외치십니다. 그들에게는 영적 민감성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고, 말씀을 듣지도 않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나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경건할 수 없습니다.

요시야 왕은 스바냐 선지자의 이런 지속적인 심판의 메시지를 통해 유다 백성의 영적 개혁을 이루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시는 말씀을 통해 왕족들과 귀족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고, 악한 먹이사슬의 구조들이 깨어지며, 자기 이익에만 눈이 어두웠던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던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의 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말씀 위에 서는 교회가 됩시다. 때로는 쓰리고 가슴을 찌르는 말씀 앞에서도 겸손히 그 말씀을 듣고 아멘하여 화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유익을 따라 움직이지 말고, 진정으로 섬김의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회로 세워져서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건강한 교회, 건강한 가정을 세워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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