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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츠빌한인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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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시편 1편을 시편 전체의 주제 시라고 말합니다. 시편 1편에서 말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의인의 삶과 그렇지 않은 악인의 삶을 대조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편 시편 36편은 시편 1편과 어떤 면에서 맥락을 같이 하는 시편입니다. 시편 36편은 의인과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악인에게서 나타나는 악한 성품을 비교함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성품을 걷어내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품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표준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쉽게 번역했습니다. “악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죄의 속삭임만 있어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습니다.” 여기에 악인에 대해 정의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죄의 속삭임만을 듣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사람은 자기 의지로 선해지지 못합니다.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조차도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하기를, ‘내 속에 선한 것이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선을 행하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속에는 분명 하나님의 법이 있는데, 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 나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본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사도 바울의 이 표현을 다윗은 본시에서 ‘죄의 속삭임이 내 안에서 들려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이 죄의 속삭임을 자기 자신의 소리라고 인식합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내가 분노하고 내가 기분 나쁘고, 주는 것 없이 괜히 남이 미워질 때, 그렇게 분노하고 기분 나빠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의 이유를 찾고, 미워할 이유들을 찾습니다. 기분 나쁜 이유들을 계속 찾습니다. 그러면 생각할수록 더 미워지고, 더 분노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다윗은 ‘내 안에 죄의 속삭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속삭임을 듣다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분노와 미움을 계속 묵상하다 보면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에 대해 분노합니다. 반대의 현상으로 나갈 때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공격적인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왜 이렇게 사람이 악하게 변해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속삭임을 듣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죄의 속삭임을 듣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묵상하지 않으면, 자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가 나에게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교회에 왔는데, 누군가가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묵상합니다. ‘그가 왜 나에게 그런 표정으로 대하지? 내가 잘못한 것이 있나? 그러다가 이렇게 보통 대응합니다. ‘지는 얼마나 잘났다고?’ ‘자기가 나에게 그럴 권한이 있어?’ 이런 식으로 묵상을 전개해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닫히고 감정이 굳어져 갑니다. 이런 묵상이 긍정적으로 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 사람 오늘 왜 나에게 그렇게 밝은 표정으로 대했지. 나를 좋아하는 가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속에서 속삭이는 죄의 음성을 듣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 속에서 떠오르는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또 그 말씀의 기초위에서 선포하는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힘든 일입니다. 여간해서 자기의 기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보통 그 말씀을 다시 분해합니다. 저 말씀은 목사의 주관적인 생각에서 나온 말이고, 저 말씀에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동의할 수 없고,, 하면서 말씀을 다시 토막을 내어서 필요한 말씀만 듣게 됩니다.

그런데 언젠가 그 말씀이 통째로 나에게 들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필히 그 말씀이 나의 생각과 나의 가치관, 나의 의로움에 대한 생각들을 여지없이 부숴버립니다. 자기 자신이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내가 그동안 붙들고 있던 모든 가치체계와 신념들이 무너지는 것을 느낄 때 그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것을 보통 회개한다고 말합니다. 회개할 때 보통 눈물, 콧물이 나오고 통곡을 합니다. 내 몸의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것을 경험하고, 내 정신세계와 몸이 함께 부서지는 경험을 합니다. 한 없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부끄러움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게 느끼는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끄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또한 자유를 경험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데, 그 말씀이 얼마나 강력하게 역사를 했는데, 하루에 삼 천 명이 회개하는 일이 나타났습니다. 이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앞에서 보인 반응이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이것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인식체계와 가치체계가 다 무너져 내려앉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으로 예민할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합니다.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최근 6개월 이내 몇 번이나 눈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해 보셨습니까?’ 처음 예수 믿을 때 말고 최근 6개월, 혹은 많이 잡아 1년 안에 몇 번이나 하나님 앞에서 나의 추함을 발견하고, 나 중심적인 생각을 발견하면서 진정으로 눈물로 회개해 보셨습니까? 이것이 바른 길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기도하면서 보니, 이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바른 길인 줄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을 주장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가 나로 인해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밭과 같습니다. 옛날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때, 쟁기를 소에 매고 밭을 맵니다. 그러면 겨울 동안 딱딱하게 굳어있던 땅이 파지면서 그 흙이 부드럽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씨를 심어야 되는데, 그만 농부가 게으르거나 다른 일로 바빠서 잠시 손을 놓고 있으면, 얼마 안가 그 밭에 잡초로 다시 우거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런 밭과 같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의 마음의 밭을 갈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에도 악한 사탄으로 인해 나는 잡초로 우거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뿌릴 수 없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내 속 깊은 곳에서 죄의 속삭임이 듣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의 생각이 치우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그런 감정들이 나의 언어와 행동을 통해 나타납니다. 결국 가정이든, 회사든, 사업장이든, 교회든 그런 감정들로 다시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속에서 나오는 죄의 속삭임을 들으면서 우리의 마음에 생기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2절에서 말하는 자긍, 즉 자만하는 마음입니다. 자만하는 마음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자기 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현대어)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설마 하나님이 내 허물을 알기나 하랴.” 죄의 속삭임을 들으면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누구도 내 죄를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포장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위한 것처럼 말합니다. 마치 상대방을 위해서 그렇게 선심 쓰는 것처럼 말합니다. 마치 그것이 교회를 위한 것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자기의 진짜 속내를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도 그렇게 진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두 번째 자만하는 사람의 특징은 ‘미워함을 받지 아니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설마 이쯤 가지고 (하나님이) 벌을 내리라.” 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의 행위는 벌 받을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종말의식의 부재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 분 앞에서 심판받으리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구체적인 현상을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이 말씀을 다른 성경(현대어)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입을 열었다 하면 싸움이나 일으키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대고 슬기롭고 착한 일은 아예 할 생각조차도 않는구나.” 만약 하나님의 교회 안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들리는 죄의 속삭임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그런 교회가 진정한 교회일 수 없습니다. 그런 성도는 진정한 성도일 수 없습니다. ‘설마 하나님이 내 허물을 알기나 하랴’ 하고, ‘설마 하나님이 이쯤가지고 벌을 내리랴’라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하면 싸움이나 일으키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교회고, 성도일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악인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블레셋 군사도 아니고, 아말렉도 아니고, 애굽도 아니며, 바벨론도 아닙니다. 그들은 바로 이스라엘 왕국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다윗의 친구들이며, 신하들이고, 형제들이며,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다윗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자기 원하는 대로 해석해 버립니다. 자기 속에서 나오는 죄의 속삭임을 듣습니다.

자신을 배신한 아들 압살롬이지만, 그래도 사랑하던 아들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다윗을 못마땅하게 여긴 요압이 다윗을 협박합니다. 계속 그렇게 슬퍼만 하고 있으면 당신의 신하들이 다 당신을 떠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렇게 말하던 요압이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다윗의 외조카입니다. 다윗의 누이인 스루야의 맏아들입니다. 다윗은 8형제 중 막내였고, 스루야는 딸로 첫째이기 때문에 아마도 매우 일찍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다윗과 거의 연배가 비슷할 수 있습니다. 그런 조카가 외삼촌인 왕 다윗을 협박합니다.

전공(戰功)으로 말하면 요압만큼 다윗 밑에서 전공을 많이 세운 장군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전공(戰功)의 문제가 아닙니다. 요압이 아무리 많은 전공을 세웠다고 해도, 요압은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지 않고, 오히려 자기 속에서 들려지는 죄의 속삭임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전공(戰功)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공(戰功)을 따집니다. 누구 교회에 더 많은 공을 세우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교회는 얼마만큼 많은 일을 하느냐,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느냐 보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를 살피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자식처럼 아끼던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속에서 들려지는 죄의 속삭임을 듣고는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윗을 죽이기 위해 나라의 모든 군사력을 동원했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이런 원리로 움직여집니다. 권력 앞에서 형제도 부모 자식도 없습니다. 우리도 역시 작은 이익 앞에서 다투곤 합니다. 작은 명예 앞에서 욕심을 부립니다. 좀 더 인정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받지 못함에 따라 우쭐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쉽게 우리 입으로 내 뱉는 말로 인해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시기하고 섭섭해 합니다. 어디 선간 멈추어야 하는데, 멈출 곳을, 멈출 기회를 찾지 못합니다. 이렇게 치유 받지 못하고 긴 세월을 보내고 나면, 이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됩니다. 상처는 곪을 만큼 곪아있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회복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모든 미움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분열에는 양보할 수 없는 명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가정은 날마다 치유되는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는 날마다 주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가치관이 깨어지고, 마음을 찢는 고통으로 회개하여 우리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아집과 고집이 무너질 때,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깨어져가는 공동체를 향해 다윗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증거 합니다. 5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즉 하나님의 사랑이 하늘에까지 닿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실상은 자기 속에서 들려지는 죄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 사랑하심을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또한 주님은 이어서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상을 운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들을 살피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개입하시며 관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교회를 돌보십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샬롯츠빌 한인교회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한 빛과 소금 교회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노스사이드 침례교회도 사랑하십니다. 그 교회가 어떤 이유로 어떻게 세워졌든 간에 하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를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큼이나 그들도 끔찍이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목사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내 교회만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성도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습니다. 내 교회만 잘 되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무관심합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나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나도 그를 미워하고 거부합니다.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만큼이나 성실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속내를 가슴 깊이 숨깁니다. 하나님이 모르신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하나님이 내 허물을 알기나 하랴.’ ‘하나님께서 이것까지 벌하시랴.’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화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복해야 합니다. 왜 손을 못 내밉니까? 그들이 내 손을 뿌리쳤다는 이유로 내 손을 못 내미나요?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미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욕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내가 없어져도 주님은 드러나셔야 합니다. 우리의 영광이 사라져도 주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왜 그 일을 못하는 것입니까?

오늘날 한국교회가 왜 이토록 사회에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왜 아프가니스탄에 선교하러 자기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다 들여서 가고서도 왜 이렇게 사회로부터 욕을 먹어야 합니까? 이것이 핍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은 핍박이 아니라 욕을 먹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탈레반에 잡힌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 저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그곳에서 순교해야 한다면 그들에게 담대함을 주셔서 떳떳하게 당당하게 순교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지 못할까요. 한국교회에 누구도 그렇게 공개적으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말했다가는 ‘네가 가서 죽어보라’ 고 할까봐 그 말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됩니다.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을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 간에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누구에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교회 간에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향해 주님은 사랑이시라고, 그 사랑을 맛보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할 수 있겠습니까? 어불성설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손을 내밉시다. 사랑합시다. 먼저는 우리끼리 사랑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좀 더 나누어 봅시다. ‘하나님이 내 허물을 알기나 할까?’ ‘하나님께서 이것까지 벌 하시랴?’ 예!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이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을 큰 바다와 일반이라.” 주님의 의가 하나님의 산들과 같습니다. 주님의 의가 산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주님의 판단은 큰 바다와 같이 깊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의를 흔들지 못합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판단의 깊이를 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산과 같은 하나님의 의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 의로움에 복종할 뿐입니다. 우리의 의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고, 복종해야 합니다.

7절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주의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답고 보배로우신지요!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과 의로움을 묵상하다가 감탄하는 말입니다. 어찌 주의 인자가 그렇게도 보배로우신지요!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주님만이 언제나 가장 의로우시고 가장 자비로우시며 가장 성실하십니다.

그래서 7절 하반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뢰합니다. 전적으로 그 분의 권위와 사랑과 인자하심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의 말씀 앞에 내 판단과 가치관과 주관을 내려놓습니다. 어려울 때,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겪고, 어려움이 올 때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뒤통수를 맞을 때조차도 다윗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와 성실하심을 묵상했습니다. 미움을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분노를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속에서 들려오는 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자를 묵상합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참으로 멋진 삶을 살았습니다. 멋있었습니다. 가장 화려한 삶을 살았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누렸습니다.

그가 8-9절에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누리는 것 네 가지를 밝혀둡니다. 첫째는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고, 둘째는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운다고 합니다. 여기서 ‘복락의 강수’란 말은 단어 그대로 직역하면 ‘에덴의 강물’을 마신다는 뜻입니다. 셋째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 안에 거합니다. 가장 생명력 있게, 가장 사람답게, 가장 풍성하고 놀라운 은혜를 누리며 산 사람, 다윗이었습니다. 넷째 주의 광명으로 비추신 밝은 빛으로 자신의 인생길을 걸어갔습니다. 어려서 양치기 할 때 받은 기름부음의 사건이 조금도 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은혜와 영광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님들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로서 당당하게 복음으로 서야 합니다. 그러려면 복음으로 먼저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으로 연연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작은 것에 시비를 가리고, 작은 감정에 얽매이는 사람이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수 없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일 때는 먼저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이 한 번 죽은 자였습니다. 골리앗을 이김으로 승리하고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은혜와 능력을 누림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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