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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을 보다보면 때로는 우리를 매우 당황하게 하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시편 137편 8-9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는데, 그곳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을 포로로 잡아온 바벨론 사람들에게 앙갚음을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침략자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저지른 그대로  네게 앙갚음하는 자 복되리라. 네 어린 것들을 붙잡아다가 바위 위에 메어치는 자 복되리라(현대어성경)”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입니다. 1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냅니다. 6절에서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다윗은 무슨 의미로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일까요?

본문의 구조를 잠깐 살펴봅니다. 다윗은 먼저 1-2절에서 내가 흠 없이 성실하게 살아왔사오니 나를 판단해 보소서. 나의 속마음과 생각까지 헤쳐 보소서(현대어성경) 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 단계로 자기의 의로움과 결백을 주장합니다. 첫 번째는 3-6절에서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자기의 의를 주장합니다. 즉 자신은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진리를 따라 살아왔으며(3절), 악한 자와 같이 살지 않았고(5절), 무죄하다고(6절)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8-11절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주께서 계신 집을 사랑했고, 주의 영광이 임하는 이 장막을 사랑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리고 7절과 12절에서는 하나님과 그 분의 하신 일을 송축함으로 시를 맺습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다윗도 이제는 막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자신이 과연 얼마나 바르게 살았기에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면, 우리도 다윗처럼 그렇게 당당해 보려고 하다가 그만 교만의 극치를 달리게 됩니다.

본문에서 다윗의 시를 이해하려면 다윗의 시대와 다윗의 입장으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다윗은 지금부터 3,000년 전의 사람입니다. 당시는 왕정시대였습니다. 왕은 곧 국가였고, 법이었습니다. 왕은 공식적으로 법 위에 굴림 하는 존재입니다. 왕은 곧 신이었습니다. 왕은 나라의 주인뿐 아니라 또한 백성의 주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언제든 백성들의 목숨까지도 빼앗을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왕은 잘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왕이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옳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은 곧 국가고, 법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왕과 맞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왕정시대의 통치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맘에 안 드는 신하가 있으면 사람을 시켜서 소리 없이 없애버리는 일을 다윗은 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부하 장수 중 요압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사울의 장수였던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아브넬은 본래 다윗과 함께 사울 왕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잠시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왕 밑에서 장수로 있었지만, 결국 다윗에게로 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요압이라는 다윗의 장수가 아브넬을 개인적인 원한으로 죽였습니다. 백성들은 다윗 왕이 아브넬을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윗과 백성들의 간격이 벌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이 때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다윗은 매우 요압으로 인해 매우 힘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요압 장군을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충분히 진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들 앞에서 그냥 도망을 갔습니다. 압살롬, 그는 나쁜 아들입니다. 어떻게 아버지의 자리를 넘볼 수 있습니까? 천하에 나쁜 아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냥 도망을 갔습니다. 압살롬의 군사력이 두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이길 수 있는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도망을 가면서 생각했던 것은 압살롬의 반역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시켜서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통해 나를 책망하시는 것이라면, 내가 압살롬을 처단할 때 나는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이 도망을 가고 있는데, 베냐민 지파의 시므이라는 사람이 도망가는 다윗을 보고 저주를 퍼 부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거거라(삼하16:7).” 공동번역 성경에는 이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꺼져라! 이 살인자야, 꺼져라! 이 불한당 같은 놈아!” 그 때도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지 못하고 그냥 갑니다. 그가 하는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1).”

다윗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을 일반적으로 주변에 있는 나라의 왕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청지기로서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왕으로 맡겨주셔서 왕인 것이지, 본래부터 왕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신도 아니고, 왕의 자격이 있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당시 세속적인 왕들의 왕의 개념과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왕의 개념은 전혀 달랐습니다. 세속적인 왕은 곧 주인이었습니다. 땅의 주인이고, 나라의 주인이고, 백성들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신이었습니다. 그런 세속적인 왕의 개념을 가지고 통치하던 왕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사울 왕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을 때는 겸손했습니다.

하지만 얼마간 세월이 지난 후 사울 왕이 아말렉이라는 나라와 전쟁을 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 왕에게 이번 전쟁에서는 모든 생명 있는 자는 다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살진 짐승을 살리고, 아말렉 왕도 살렸습니다. 나중에 이것을 알게 된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렸노라’고 선언합니다. 이 때 사울 왕이 사무엘에게 이렇게 간청합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군인들과 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는 나를 왕으로 대접해 주시어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나와 함께 성소로 올라가 주십시오(삼상15:30, 현대어 성경)!'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다고 말씀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서 있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땅도 하나님의 것이며, 백성도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라도 또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왕의 보좌에서 내려오라고 하면 그 날로 내려와야 하는 존재로 자신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힘써서 올라간 자리도 아니고, 자기가 애쓴다고 지킬 수 있는 자리도 아님을 그는 알았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다가 보니까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신하들과 갈등이 생겼든지, 아니면 정적들이 나라 안에 있었습니다. 양의 탈을 썼지만 악한 의도로 나라를 허물어 버리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나라를 분열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지도자는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칫 서투른 정적 제거는 또 다른 불씨를 불러 올 수 있습니다. 왕은 힘이 있습니다. 군대가 있고, 권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을 쓸어버리면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의의 백성이 다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혹시 자신의 죄가 있는가? 혹시 내가 잘못한 것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흠 없이 살고 흔들림 없이 주를 의지하고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에 의해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본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좋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 나를 판단하시옵소서. 나를 살펴보시옵소서.” 어떤 성경에는 ‘내 마음의 생각과 동기를 알아보소서(1절).’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한 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나누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심판을 위임합니다. 왜냐하면 다윗 자신이 심판하면 자신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내가 심판하면 내 의지대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닙니다. 이 나라는 주님의 나라입니다. 주께서 판단하여 주셔야 합니다. 제가 잘못 했으면 제가 달게 받겠습니다. 압살롬에게 쫓기면서, 시므이에게 욕을 먹어 가면서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을 때조차도 다윗은 그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가지고 있는 청지기적 왕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진리 가운데 살았습니다.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안지 아니하였으며,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였으며,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않았습니다.’ 보통 세속적인 왕이었다면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심판하면 되었습니다. 언제든 정적은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주님께 내어 놓습니다. 자신을 주님 앞에 점검 받습니다. 자기 기준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객관화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보는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내 모습, 그리고 백성들 앞에서 온전히 드러나는 내 모습이기를 원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대통령이 주인이 아닙니다. 국민이 주인입니다. 하다못해 요즘은 회사의 주인도 회장이 아닙니다. 회장은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회사의 경영권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회사의 주인은 주주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회사의 물건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하물며 교회는 더더욱 교인들의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것도 아니고, 장로의 것도 아니고, 집사의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유화되어 갑니다. 주장이 강해져 갑니다. 목소리가 높아져 갑니다.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목소리를 낮추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기도합시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봅시다. 내 마음과 내 가치관과 내 고정관념을 주님 앞에 내려 놓아보십시오. 사실 내 자리를 내려놓기 전에는 절대로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조용히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잘 혼동하는 것 중에 하나는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확신을 혼동한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분명하게 알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적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다른 성경(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언제나 내 앞에 있으므로 내가 주의 진리 가운데 걸어갑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지 않았고, 부인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으로써 나라의 일을 할 때는 그는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사울 왕을 그는 두 번이나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분명히 하나님이 버린 왕이었습니다.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백성들이 다 자기를 잘했다고 칭찬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 생명을 걸고 죽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을 하면서 늘 하나님께 ‘하나님! 북군에게 승리를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이 전쟁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쟁인지 알게 하소서. 하나님!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전쟁을 하고 있는지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님들은 어떤 일을 할 때 얼마만큼 기도하고 하십니까? 얼마만큼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까?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 의료선교를 갔던 분당샘물교회 성도 22명이 탈레반에 의해 억류되어 있습니다. 속히 풀려나기를 바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선교단을 이끌고 갔던 고 배형규 목사님이 피살되었습니다. 마음이 참 많이 아팠습니다. 배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9살 난 딸에게 아버지가 죽은 며칠 후에 아버지의 죽음을 알렸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분당샘물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은조 목사님은 참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유명하신 분이 아니라 훌륭한 분입니다. 그 분은 전에 서울영동교회에서 담임목사님으로 17년을 시무하셨습니다. 그는 대형교회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목회방침을 가지고 그동안 여러 교회들을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998년 스스로 분당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박은조 목사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면서 시작한 일 중에 하나가 목회자의 사례비의 평준화였습니다. 담임목사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목회자들의 사례비를 동일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 수와 기타 부수적인 삶의 상황에 따라 차등을 두었습니다. 획기적인 일이라고 해서 당시 교계 신문에 나기도 했었습니다.

참 훌륭하신 담임목사님과 함께 사역하던 또 다른 훌륭한 고 배형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한국사회에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들이 너무나 많아져서 한 번 더 마음이 아팠었습니다. 그런데 고 배형규 목사님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고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 배형규 목사님께서 지금 천국에 가셔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고 느껴집니다. ‘하나님! 이 땅의 수많은 선교의 불길들이 꺼지지 않게 하소서. 제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사오니 이제 꺼져가는 복음의 불길이 한국 사회에 다시 한 번 불타오르게 하소서.’ 배 목사님은 살았을 때보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더 크고 강하게 복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선교지로 가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죽었지만, 그는 죽음으로써 더 크게 복음에 대해 말하게 되었습니다. 청지기 왕 다윗이 약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 중에 일하십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님들 가운데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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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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