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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누구나 자기의 작품에 서명을 합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Micheangelo, 1475-1564)가 자기의 작품에 결코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의 명령을 따라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벽화를 4년 동안 혼자서 그렸습니다. 발판 위에 누워서 작업을 하였고, 이로 인해 관절염과 근육 경련을 얻기도 했으며,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안료로 인해 눈병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1512년 마침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작품을 마치고 흡족한 마음으로 작품에 서명을 한 뒤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눈부신 햇살과 푸른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어떤 화가도 그려내지 못할 대자연의 아름다움! 그 때 문득 그에게 한 가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그 어디에 서명 같은 것을 남기시지 않았는데 기껏 작은 벽화를 그려놓고는 나를 자랑하려 했다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서 천정 벽화에서 자신의 서명을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사인이 그의 벽화에 있지 않지만, 여전히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벽화 ‘천지창조’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며,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아름다운 대자연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오늘 본문 1절과 9절, 처음과 마지막 절에서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 구절은 시편 8편의 첫 구절이자 마지막 구절이며, 또한 우리 삶의 첫 구절이자 마지막 구절이기도 합니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지난주일 주보에서 ‘17년 매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창조역사가 참으로 신비로웠습니다. 매미가 알을 낳으면, 몇 주일 지나 알은 애벌레로 부화한 뒤 먹이를 찾아 땅으로 내려와 땅 속 40cm 정도에 구멍을 파고 자리를 잡는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나무뿌리의 액을 빨아 먹으면서 오랫동안 애벌레로 지냅니다. ‘17년 매미’는 17년은 그렇게 땅속에서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  십억 마리의 매미가 17년이 지난 후 동시에 나와서 한 달 정도 살면서 짝짓기를 하고 죽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3년, 5년, 7년 혹은 13년이나 17년을 사는 매미는 무려 3,000종이나 됩니다. 그렇게 사는 이유는 천적을 적게 만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 많은 애벌레들 중에 한 마리도 조금 더 빨리 자랐다고 해서 일찍 나오지 않는답니다. 같이 나와야 살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에서 가장 신비로운 것은 그 많은 매미의 애벌레들이 세월의 흐름을 안다는 점입니다. 태양의 뜨고 지는 것을 보는 것도 아니고, 하루씩 날짜를 세는 것도 아니며, 한 해 두 해 세월 가는 것을 계산하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17년이 되면 땅 속에서 나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필시 하나님께서 그 매미의 애벌레에게 세월의 흐름을, 아니 17년이 된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장치를 그 몸에 넣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매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세상이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매미의 생명까지도 세밀히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들의 백합화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보다 더 귀하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맙시다. 내일의 문제로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모든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매미도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놀라운 약속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다윗이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늘 밖에서 양 치는 일을 했습니다. 양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밖에서 잠을 잔적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면 밤하늘을 보며 별을 세고, 달을 보면서 자연의 신비함을 느껴보곤 했습니다. 그는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자연은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접촉점이었습니다. 그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얻은 결론이 세 가지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절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여기서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에노쉬, שונא)는 유한한 존재,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의미이고, 인자라는 말은 ‘사람의 아들’이란 뜻으로 ‘벤-아담(םדא־ןב)’이라는 히브리어를 사용하는데, ‘아담’이라는 말은 본래 흙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지어진 존재,’ 즉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지극히 유한하고 깨어지기 쉬운 인간을, 그리고 흙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권고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건관대’라고 시작합니다. ‘내가 도대체 뭔데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을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들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자신이 회복됩니다. 형들과 비교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형들과 비교된 자신의 이미지를 갖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맛보고 살아갑니다.

만약 다윗이 주로 가정에서 살았다면 그는 아마도 많은 비교의 대상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형만한 아우 없다더라.’ ‘네 형 좀 봐라.’ ‘네 형만큼만 해 봐라.’ 이런 식의 말들을 들으면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집에 찾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인 이새는 다른 7명의 아들들은 다 인정했어도, 다윗은 결코 왕의 재목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세상에서 들리는 소리들은 대부분 우리의 마음을 낙심케 하고, 절망하게 하는 소리들입니다. 수없이 비교당하고, 무시당합니다. 가족이나 회사, 혹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생각할 때마다 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자꾸 왜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잘못된 자기 이미지를 갖습니다.  

수년 전 뉴욕의 한 거리에서 풍선 장수가 풍선을 팔고 있었습니다. 장사가 안 될 때면 그는 풍선을 하나씩 날려 보내곤 했습니다. 풍성이 하늘로 떠오를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잠시 동안은 장사가 잘되곤 했습니다. 그는 각기 다른 색깔의 풍선을 날려 보냈습니다. 처음엔 하얀색, 다음에는 빨간색, 그리고 노란색의 풍선을 날려 보냈습니다. 잠시 후 한 흑인 소년이 풍선 장수를 올려다보며 질문했습니다. “아저씨, 검은 풍선도 하늘로 날아갈 수 있나요?” 풍선 장수는 어린 흑인 소년을 내려다보며 동정심과 이해심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얘야, 풍선이 떠오르고 안 떠오르고는 색깔이 아니라 풍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란다.”(지그 지글러, ‘정상에서 만납시다.’ 선영사, 48쪽)

풍선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풍선의 색깔이 아니라 풍선 안에 있는 헬륨 가스입니다. 우리를 떠오르게 하는 것은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느냐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풍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힘이 마치 풍선의 색깔에 의한 것이라고 착각하여 생각합니다. ‘나는 검은 피부를 가졌기 때문에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검은 피부는 고칠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자라면서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받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도록 태어났다는 메시지를 받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처럼 사람들 속에서는 그 외에 다른 메시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세상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의 소리보다 자연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얼마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까? 우리 귀가에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를 넘어서서 더 크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성경을 얼마나 읽으십니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얼마나 묵상하십니까? 이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놀라운 생명력과 힘을 주는지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다윗처럼 감탄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이시여! 사람(내)이 무엇이건대 주께서 저를 이처럼 생각하시고, 제가 무슨 존재인데, 저를 이렇게 돌보십니까?’

성경을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성경을 놓치 마십시오. 매일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분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불렀노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다윗이 자연을 통해 발견한 하나님의 두 번째 음성은 5절에 있습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여기서 ‘천사’라는 말은 ‘하나님’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은 인간을 굉장히 존귀하게 창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이렇게 영화와 존귀로 관 씌우셨습니다. 다 소중합니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귀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예쁘고 잘 생기게 창조하셨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는 못난 사람이야!’ ‘너는 할 수 없어.’ ‘그 사람 원래 그래요.’ 라는 말만 듣고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불행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다윗에게 참 훌륭한 모습 중에 하나는 요압이라는 장수와 함께 끝까지 갑니다. 요압이라는 장수는 다윗의 측근입니다. 장수로서도 매우 탁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장수가 매우 정치적입니다. 자기가 맘에 안 드는 사람을 왕도 모르게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왕이 죽인 것처럼 해서 왕을 어려운 곤경에 빠지게 했습니다. 나중에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가 싸우는데, 그만 압살롬의 머리가 나무 위에 걸렸습니다. 그 모습을 알고는 요압이 창으로 그의 심장을 찔러 죽입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다윗이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너무 괴로워서 침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소리를 높여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슬퍼했습니다. 이 때 요압이 다윗 왕을 찾아가서 협박합니다. 왕께서 계속 이러시면 당신의 신하들이 다 당신을 떠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번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충실한 장군 우리아를 죽입니다. 이 때 다윗이 이 일을 부탁한 장수가 바로 요압입니다. 요압은 그런 정치적 일, 다윗의 왕권을 유지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입지를 굳게 하는 일에는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나중에 요압으로 인한 마음의 아픔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압을 다윗이 끝까지 같이 갑니다. 대단합니다. 물론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요압의 죄를 물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화와 존귀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자신의 자존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하셨고, 그것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 앞에 늘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존귀하게 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보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는 누구의 인정을 받아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하심, 영광과 존귀가 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사람은 누구와도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요압은 늘 다윗의 권력에 도전했고, 넘어서는 일을 했습니다. 끊임없이 다윗을 뒤에서 조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를 제거하거나 죽이지 않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요? 하나님의 존귀케 하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셨다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좀 못마땅한 사람이 있어도 함께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불편해도 함께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험담하고 멸시한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케 하심을 기억하십시오. 그 분의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어떤 일도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 속상하다고 소리쳐 봐도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잠기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높이신 다윗의 생애처럼 영광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다윗이 자연을 통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만물을 인간에게 맡기셨음을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6절입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우양과 들짐승,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등 모든 생명체와 자연을 다스리도록 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맡겨진 양을 자신의 유익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책임으로 인식했습니다. 청지기의 자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달려들어 잘 섬깁니다. 우리교회에도 가끔 보면 오늘 처음 교회 나왔다고 인사하고는 예배 마친 후 주방으로 가보면 그곳에서 밥 퍼주는 봉사를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체질적인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때까지 그에게 정말 중요했던 점은 그가 자연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다스리도록(관리하도록) 맡겨주신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책임을 인식합니다. 모든 일에 책임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또한 부지런합니다. 책임의 한계를 그으려고 하기보다는 때로는 자기의 선을 넘는 곳까지 나아가서 감당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비록 군사 훈련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소년이었지만, 블레셋의 골리앗이 이스라엘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할 때 직접 나가 싸웠습니다. 다른 장수들은 뭐하냐고 비난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이 나라의 꼴이 이게 뭐냐고 소리칠 수 있었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나갔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블레셋의 위협 앞에서 구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하나님은 다윗에게 나라 전체를 맡겨 주셨습니다. 다윗은 나라의 왕이 되어 40년 동안 나라를 맡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성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책임지는 일을 피하려 하지 마십시오. 요즘 사람들은 너무 정확한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절대 개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형들에게 도시락 가지고 전쟁터에 갔다가, 싸울 장수가 없자 자신이 가지고 다니면서 양치기에 쓰던 물매로 골리앗을 때려 눕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하나님! 내게 주신 사명이 뭐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냥 하시면 그것이 나의 사명이 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으로 인해 감사하십시오. 일할 수 있음으로 인해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생각하시고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세상의 소리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을 영화와 존귀로 관 씌우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요압과 함께 끝까지 간 다윗을 묵상하십시오. 다윗이 그런 정적과 같은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하나님께서 씌우신 영화와 존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만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상대한 장수가 없을 때 자신이 나갔습니다. 원망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군사 훈련 한 번도 받지 않은 그가 그냥 그 자리에 나갔습니다. 다윗이 누린 그 은혜가 성도님들에게도 풍성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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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749 인자를 파는 사람(마26:14-29) 2007. 3. 11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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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 사랑의 비밀(아4:1-16) 2007. 3. 25 주일예배
746 나귀 타고 입성하신 주님(눅19:28-44) 2007. 4. 1 종려주일설교
745 부활 신앙(고전15:12-20) 2007. 4. 8 부활주일예배
744 열 두 돌의 기념비(수4:1-9) 2007. 4. 15 주일예배
743 징계를 통한 강한 믿음(히12:5-8) 2007. 4. 22 북한선교후원예배
742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수10:1-11) 2007. 4. 29 주일예배
741 은총을 받은 자녀(삼상2:26) 2007. 5. 6 어린이주일 예배
740 온전한 가정(엡5:22-33) 2007. 5. 13 주일예배
739 도피성으로 가라(수20:1-9) 2007. 5. 20 주일예배
738 여호와만 섬기라(수24:14-18) 2007. 5. 27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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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6 반응하는 신앙(엡4:25-32) 2007. 6. 10 주일예배
735 말씀묵상과 기도(엡6:10-17) 2007. 6. 17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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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3 시냇가에 심은 나무(시1:1-6) 2007. 7. 1 주일예배
» 다윗을 세우시는 하나님(시8:1-9) 2007. 7. 8 주일예배
731 주의 장막에 거할 자(시15:1-5) 2007. 7. 15 주일예배
730 여호와여 구원하소서(시20:1-9) 2007. 7. 22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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