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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 바벨론은 유프라테스 강 옆에 위치해 있습니다. 바벨론은 자기들의 땅을 좀 더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기 위해 바벨론 지역 주변에 관개수로를 만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곳으로 옮겨져서 노동을 했습니다. 땅을 파고 물길을 만들고 그곳에 물이 지나가도록 만드는 대수로 공사에 투입되었던 것입니다. 무자비한 태양 아래 있는 포로들의 삶은 정말 고통스럽고 피눈물 나는 삶이었습니다. 화려했던 예루살렘의 성전은 예루살렘에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만들어 놓은 수로들, 강변에서 일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할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도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수금(하프)을 버드나무 위에 걸어놓고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성전에서 레위인들과 부르던 그 아름다운 찬양을 그들은 더 이상 부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감독관들이 와서 유대인들이 쉬는 시간에 예루살렘에서 부르던 노래를 하나 부르도록 요청합니다. 마치 군대에서 쉬는 시간만 되면 노래시키는 것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유대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고 아프겠습니까? 나라 잃은 슬픔도 큰데, 예루살렘에서 부르던 너희들의 노래 한 번 불러보라고 감독관들이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이렇게 한탄합니다. 우리가 나라 잃고 이방 땅에 왔는데, 여기서 무슨 노래가 나오겠냐고, 무슨 노래를 부를 수 있겠냐고 한탄을 합니다. ‘차라리 예루살렘도 잊어버리고, 수금 타던 이 재주도 다 잃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울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만약 예루살렘에 대한 사무치는 이 마음을 잊어버리고, 노래할 수 있는 나의 혀가 입천장에 들러붙어 버려서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르짖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137편에 나오는 시의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면서 너무도 고통스런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대한 그리움을 그리면서 노래한 참 슬픈 노래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그곳에서 70년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70년이면 적어도 두 세대가 흐른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그곳에서 고향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한탄도 했고,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옛날 모세 할아버지가 계실 때는 애굽에 있던 우리 민족을 위해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셔서 애굽에서 빼내셨다는구먼. 그게 사실일까? 하나님이 그 때 그런 일을 하셨다면 지금은 왜 못하실까? 그 뿐만이 아니야. 기드온이라는 용사는 불과 300명의 군사를 가지고 미디안 군사 12만 명이나 죽였었대.’ 여호수아 이야기, 다윗 이야기, 사무엘 이야기 등등 그들은 시간만 되면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정말 그랬을까? 아니야. 그런 일은 전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을 거야.’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역사 속에 빨려 들어갑니다. 그 역사의 한 중심에 계시던 하나님을 그리워합니다. 그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다시 찾아오시기를 고대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소서.’ 이것이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성전도 없었습니다. 제사장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없어졌습니다. 성전에서 레위인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성가대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어떤 종교적 도구도 없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유대인들이 돌아갈 곳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존재의 목적을 발견했습니다.

에스라라는 매우 훌륭한 율법학자가 바벨론에 포로로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스7:10). 그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묵상하도록 하고, 묵상하는 말씀들을 정리했습니다. 성전도 없고, 성전제사도 없고, 제사장도 없고, 레위인들의 역할도 없는 포로기의 삶이 그들로 하여금 말씀에 더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던 회당도 이때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성전제사와 회당에서의 말씀을 묵상하고 가르치는 일로 전수되었습니다. 성전제사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고백하게 했다면, 회당에서의 말씀 묵상과 가르침은 그들의 삶 속에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들은 조상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삶 가운데 계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쫓겨 갈 때 쓴 시이자 기도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시3:1).’ 아들에게 쫓기는 아버지 다윗의 다급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그 때 다윗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나님은 그 때 어떻게 다윗과 함께 했을까? 다윗은 그 고난과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나아갔을까?

바벨론의 포로로 생활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그야 말로 말씀의 참된 묵상입니다. 그냥 성경을 읽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조상 다윗이 경험하는 것을 동일하게 경험합니다. 다윗의 당황함, 고통, 아픔, 적개심, 배신당하는 마음, 분노, 이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놓는 다윗의 마음은 이미 포로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의 고백으로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고백으로서 다윗의 시를 시편의 세 번째 자리에 놓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이 모든 성경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서 그들의 삶의 고백으로서 기록되어졌습니다. 그 일을 한 대표적인 사람은 성경학자 에스라였지만, 그것은 곧 포로생활을 하는 모든 유대인들의 고백이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바벨론 포로생활이 없었다면 유대인들의 신앙은 정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를 통해 묵상되고 가르쳐지고 정리된 대부분의 구약성경은 오늘의 기독교의 모판이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성경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인식한다면 바벨론 포로기간의 영적 가치는 결코 그 어느 것보다 못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많은 성경을 정리하고 기록하면서, 그리고 150편의 시편을 정리하면서 1편에 바로 그 모든 것에 말씀의 근본이 되는 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복 있는 사람에 대한 고백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복 있는 사람은 바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읽고 또 읽습니다. 묵상하고 또 묵상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의 심장으로 느껴집니다. 그 말씀이 나의 폐부까지 내려옵니다. 그 말씀이 나의 삶의 자리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나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묵상합니다.

그 묵상이 그들에게 엄청난 소망과 비전을 갖게 합니다. 다니엘은 그 말씀을 묵상하다가 종말에 있을 일들을 봅니다. 에스겔은 그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 넣고 늘 새롭게 묵상하고 그 묵상으로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벨론 강변에서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묵상하며 기도했고, 울고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묵상을 통해서 조상들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없으면 살 수 없었습니다. 비록 이렇게 비참한 포로의 삶 가운데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이것이 그들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70년의 포로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말씀을 묵상하고, 그 묵상의 과정을 통해 깨달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 은혜가 하나의 이미지로 그들에게 새겨졌습니다. 그 이미지가 바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였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포로생활을 하는 유대인 모두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부근에 수로를 만드는 일에 투입되었습니다. 그곳의 땅을 파고 수로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리로 물이 지나가도록 합니다.

그런 후 그 수로 주변에 나무를 심습니다. 먼 곳 산에서 나무를 뽑아 와서 그곳에 심는 일이었습니다. 나무를 뿌리 채 파서 옮겨 와가지고 다시 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잘못하면 나무가 죽을 위험이 있습니다. 새로운 곳에 새롭게 뿌리를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무를 갖다 심기만 하면 잘 자랍니다. 많은 물이 바로 옆 수로를 통해 흐르고 있기에, 나무들은 심기만 하면 잘 자라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습니다. 유대인들은 고된 노역 중에도 그 일을 지속적으로 보고 경험합니다. 그렇게 자라는 나무는 그들에게 그나마 위안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유프라테스 강 가에 활기찬 생명력을 주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바로 자기들 자신임을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먼 산에서 시냇가에 옮겨 심겨진 나무가 바로 자기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은 3절을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평생 삶 속에서 늘 보며 살아왔습니다. 그 나무를 보면서 그들은 묵상했고, 그 나무를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곳으로 옮겨온 존재들입니다. 비록 강대국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유대 땅에서 뿌리 채 뽑혀서 왔습니다. 하지만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가 되었습니다.

자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이곳 바벨론으로 옮겨심긴 나무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새로운 곳으로 옮겨 심는다는 것은 나무나 사람이나 모두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날마다 눈물로 살아왔습니다. 새로운 뿌리를 내려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계절에 따라 어김없이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보지도 못합니다. 레위인들의 그 우렁찬 찬양소리를 들으면서 마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주님 앞에 내어놓는 경험도 잊은 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전 누구에게도 없었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자리를 경험합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지를 알게 됩니다. 다윗이 어떻게 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상 어느 시대에서도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것으로 고백하면서 기록 정리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본래 있던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공간적으로 우리는 고국에서 미국이라는 새로운 자리로 옮겨 심겨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미국 땅에 옮겨 심겨졌습니다. 다 고향 땅을 떠나 새로운 삶의 자리로 옮겨온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본래 의도하고 누리던 그 토양, 그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옮겨 심은 나무는 뿌리를 내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고 계획하던 바로 그 자리에 지금도 여전히 서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내가 의도한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누군가에 의해 혹은 어떤 상황에 의해 옮겨진 곳에 심겨졌습니다.

그래서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아파합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전에 누리던 그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전에 지녔던 그 화려한 성전 제사와 찬양을 잃어버렸습니다. 얼마나 어렵고 힘드십니까? 얼마나 아프고 괴롭습니까?

하지만 유대인들은 바로 그 자리가 곧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은 자기들의 인생을 발견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라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곳으로 와서 뿌리를 내리기가 힘들다고요? 맞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뿌리를 강하게 내리도록 하십니다.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절대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계절에 따라 합당한 과실을 맺습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입니다. 세상적인 가치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로 우리의 자리를 옮기는 것입니다. ‘내가 도대체 어쩌다 이곳까지 왔습니까?’ 주님께 질문하십시오. 울고 싶을 때 우시고, 따지고 싶을 때 따지십시오. 말씀을 가지고 묻고 또 물어 보십시오. ‘하나님! 내 인생의 답은 어디에 있습니까?’ 모세의 삶을 보면서, 다윗의 고백을 묵상하면서, 다니엘의 삶을 드려다 보면서, 사울의 인생을 보면서, 사무엘의 인생을 보면서, 내 인생의 답을 주님께 물으십시오.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묵상으로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묵상한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묵상으로 찬송하는 것입니다. 묵상되지 않은 기도, 묵상되지 않은 찬송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짜 기도가 아니며 진짜 찬송이 아닙니다. 조상들의 고백, 모세의 고백, 다윗의 고백이 그들 자신의 고백이 되기까지 그들은 그 율법과 말씀과 시편들을 묵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성도님)들의 인생이 바로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임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찬송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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