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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츠빌한인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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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교회는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이방인 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데미 신, 즉 다이애나라는 신(로마 신화에 나오는 달과 사냥의 여신)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기업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얼마나 능력 있으신 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깨닫고, 성령 하나님의 인치심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새로운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존재(신분)의 변화에 대해 말씀합니다. 전에는 이방인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귀하고 소중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 당시 참 아름다운 교회였고, 가장 모범적인 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9장에는 에베소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시아(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이 당시에 세워진 교회들)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10절).” 모든 사람들이 다 와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에베소 지역 사람들의 마음 문이 열렸습니다. 말씀이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말씀이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입니다. 그들은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반응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성령 받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 때 열 두 명이 성령의 충만을 받으며 방언을 하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회당에서 3개월 간 말씀을 전하고, 또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마술 하던 자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건입니다. 당시 에베소에 있던 마술사들이 단체로 회심하고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그동안 사용하던 책들을 전부 정리해서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책값을 계산해 보니 무려 은 오만이나 되는 엄청난 책들을 다 불태워 버릴 만큼 그들은 철저히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교회와 그들의 가정과 삶을 축복으로 이끌었습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에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샬롯츠빌 한인교회도 에베소 교회에 주신 은혜와 동일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보다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은혜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에만 부요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 샬롯츠빌 한인교회에도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에만 능력이 있으신 분이 아니라, 오늘 우리 교회에도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도 있습니다. 조금도 부족함 없이 우리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주님의 동일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 우리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처럼 동일한 모습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에베소 성도들도 우상을 섬기던 이들이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처럼 반응하면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과 부요하심과 능력 앞에 반응하는 방법에 대해 보통 교회는 전통적으로 다섯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반응합니다. 예배는 성도로 하여금 믿음의 깊은 경험을 하게 합니다. 두 번째, 교회는 교제로 하나님께 반응합니다. 성도를 사랑하고 돌보고 격려합니다. 교제는 교회를 더 따뜻하게 만들어갑니다. 세 번째, 교회는 훈련으로 하나님께 반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키는 훈련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순종하는 삶을 삶으로서 반응합니다. 훈련은 교회를 더욱 강하게 합니다. 네 번째, 교회는 사역 혹은 봉사로 하나님께 반응합니다. 사역과 봉사는 교회를 더욱 넓게 자라가도록 합니다. 다섯 번째, 교회는 하나님께 전도로 반응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전도함으로 주변에 있는 많은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전도는 교회를 더욱 크게 자라가도록 이끌어줍니다.

우리는 매주일 마다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반응하도록 도전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반응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누리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나에게 정말 귀한 선물을 주려고 합니다. 그 선물은 평생 내가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주려고 하는 사람이 전화를 하고 메일을 합니다. ‘한 번 만납시다. 그러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주소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반응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면 반응을 보낼 때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반응하는 내용에 대해 몇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훈련에 대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는 그 자녀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훈련받아야 합니다.

얼마 전 한국에 최초의 우주인 후보 두 명(고산, 30, 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 이소연, 28, 여, 한국과학기술원 박사과정)이 뽑혔습니다. 그들은 지금 러시아에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한국 최초의 우주인 후보로 선발된 후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훈련을 받는 일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최초의 우주인 후보로 뽑힌 후 지금까지 조금의 여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반드시 우주선을 타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8월 중에 그들 중에 한 명이 다시 선발되어 우주선을 타게 된다고 합니다. 우주인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고된 훈련을 받는 것으로 반응합니다. 그들은 그 일을 불평하지 않습니다. 죽지만 않는다면 아마도 그들은 끝까지 그 일을 감당하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가 그 영광을 누리기 위해 반응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훈련 없이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풍성하게 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훈련을 능히 감당합니다. 불평하지 않습니다. 죽지만 않는다면 끝까지 감당하려고 합니다. 아니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죽는 데까지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 일을 감당하다가 그냥 그곳에서 죽는 일이 있어도 그들은 그 일을 힘들다고 하지 않고 감당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생명을 얻고 지키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믿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편하게 예수 믿고 좀 쉽게 살 방법을 찾기 위해 교회를 나오고 예수를 믿으려고 했다면, 지금이라도 포기하셔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 안에 은혜가 있고, 복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영광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훈련 없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국의 교계에 원로이시고, 종로에 있는 연동교회에서 사역하셨던 김형태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얼마 전 그 분이 어느 모임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설교 도중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축복에 대한 것만을 전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한다고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살 길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다시 걷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서 가신 비아 돌로로사, 즉 슬픔의 길을 걸어갈 때 참된 회복과 능력의 역사가 있다’고 애통해 하면서 전하셨다고 합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제 마음이 얼마나 뜨겁게 달아 오는지 몰랐습니다. 축복의 선언만 무성한 말씀은 사실 교회와 성도들을 죽이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회개하게 됐는지 모릅니다. 혹시 제가 그렇게 교회와 성도들을 영적으로 죽이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필요한 몇 가지 훈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주선을 타는 사람에게는 훈련 하나 하나가 곧 그들의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있어서 말씀과 삶의 훈련은 곧 우리의 영적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기업과 능력이 있지만, 우리가 훈련 받기를 거부한다면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첫 번째 훈련은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가 지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체라는 말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의 몸은 곧 교회입니다. 교회가 몸이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체라는 말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몸은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이는 신경조직을 통해 일사불란하게 온 몸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움직입니다.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몸의 모든 지체가 같이 움직이는 것이 몸이고 곧 지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거짓을 버려야 하고,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어느 한 지체만 말을 듣지 않아도 몸은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 몸은 바로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깨어진 관계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위선과 거짓은 교회를 온전한 몸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와 교회의 지체된 성도가 성도 간에 참된 말을 하며 거짓을 버려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면에 있어서 우리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부부 간에 참된 말이 필요합니다. 성도 간에 참된 관계가 필요합니다. 성도 간에 불편한 관계를 지니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진실과 정직이 있을 때 주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교회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언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29)”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기 위해 유익한 말들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듣는 자들에게 유익을 끼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우리의 혀를 불이라고 표현합니다. 혀가 온 몸을 더럽히고 우리 인생 전체를 불 태워버리는 힘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파괴적인 힘이 혀에 있습니다.

어느 성도님이 어려운 일을 마쳤습니다.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고백합니다. 그동안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몰랐습니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자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한 두 시간 전의 자신의 모습을 본 사람은 자신을 정신이상이라도 생긴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이런 자신을 왜 이런 삶의 상황으로 몰아가시는지 하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다시 아름다운 감사의 고백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쏟아내는 수많은 말들이 결국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거칠고 부정적인 언어는 자신과 이웃에게 상처를 남기고 맙니다. 우리 자신의 언어를 들어보십시오. 자신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을 유심히 들어 보십시오. 놀랍게도 우리에게서 나오는 말들이 얼마나 엄청난 독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부정적인 언어습관, 저주에 가까운 표현들, 무관심의 말들,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비하하는 표현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정없이 찌르고 후비는 가시와 같은 언어들, 이런 모든 언어들이 우리가 누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빼앗아 버립니다.

고든 맥도날드라는 사람이 아주 마음을 찔리게 하는 말을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피곤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논지는 단순히 열심히 일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만성피로에 시달리면서 살아가던 시대는 역사상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피곤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지금 얼마나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을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피곤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피곤한 것 자체를 자기 삶의 존재의 의미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독자들에게 제안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 보라고 말합니다. ‘나는 지금 기분이 너무 좋고, 컨디션도 최상이며, 지금보다 더 나은 적이 없었다’고 한 번 얘기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당신이 자기를 놀리고 있다고,,, 그리고 당신이 성실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어쩌다가 우리는 스트레스와 피로가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살게 되었는가?’

우리교회 대학생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대부분 학생들이 하는 말들 중에 지난밤에 몇 시에 잤다고 하는 말은 하지만, 몇 시에 일어났다는 말을 하는 것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를 상대방에게 보여주려는 강박관념에 싸여있다는 것입니다. 대학부 학생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마음이 순수하고 상처 받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이야기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인격과 삶과 신앙을 모두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을 보면 그의 인생을 드려다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변해야 합니다. 좀 더 긍정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좀 더 격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변할 때 우리는 정말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 안하면서 그냥 무조건 은혜를 달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얼마나 속 시원한 말씀입니까? 원하는 대로 구하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에 왜 우리는 기도하지 못할까요? 피곤하기 때문인가요?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인가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만성피로로 시달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사실 자신이 너무도 바쁘게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고 있는 말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속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위의 말씀을 다시 들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그 말씀 앞에로 나아갑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럴 때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이렇게 대답하시길 원합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신나는지 모릅니다.’ 힘들다는 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신앙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해 더 큰 은혜를 누렸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에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며, 바른 언어를 사용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749 인자를 파는 사람(마26:14-29) 2007. 3. 11 주일예배
748 죽음을 통과한 승리(마27:45-61) 2007. 3. 18 주일예배
747 사랑의 비밀(아4:1-16) 2007. 3. 25 주일예배
746 나귀 타고 입성하신 주님(눅19:28-44) 2007. 4. 1 종려주일설교
745 부활 신앙(고전15:12-20) 2007. 4. 8 부활주일예배
744 열 두 돌의 기념비(수4:1-9) 2007. 4. 15 주일예배
743 징계를 통한 강한 믿음(히12:5-8) 2007. 4. 22 북한선교후원예배
742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수10:1-11) 2007. 4. 29 주일예배
741 은총을 받은 자녀(삼상2:26) 2007. 5. 6 어린이주일 예배
740 온전한 가정(엡5:22-33) 2007. 5. 13 주일예배
739 도피성으로 가라(수20:1-9) 2007. 5. 20 주일예배
738 여호와만 섬기라(수24:14-18) 2007. 5. 27 주일예배
737 하나님의 은혜(엡2:1-10) 2007. 6. 3 주일예배
» 반응하는 신앙(엡4:25-32) 2007. 6. 10 주일예배
735 말씀묵상과 기도(엡6:10-17) 2007. 6. 17 주일예배
734 회복의 하나님(욜3:13-21) 2007. 6. 24 주일예배
733 시냇가에 심은 나무(시1:1-6) 2007. 7. 1 주일예배
732 다윗을 세우시는 하나님(시8:1-9) 2007. 7. 8 주일예배
731 주의 장막에 거할 자(시15:1-5) 2007. 7. 15 주일예배
730 여호와여 구원하소서(시20:1-9) 2007. 7. 22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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